©게티이미지뱅크

예술가들이 국가 지원을 요구하는 것이 민주주의적 실천으로 평가되던 때가 있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국가가 예술을 검열하고 억압하는 관행이 남아 있었으므로, 허용에서 나아가 지원까지 끌어내자는 운동은 일종의 대의였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곤혹스러운 현상을 경험했다. 지원이 시작되자 예술가들이 국비에 생계를 의존하며 정권에 줄을 대었고, 어떤 정부는 이를 미끼로 예술을 통제했다. 국가가 모든 예술을 지원할 수는 없으므로 지갑을 열기 전 반드시 선별과 심사를 거쳐야 한다. 그것이 권력이 되었다.

따라서 지금도 예술을 지원해야 한다면 그 이유를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예술 지원정책이 매번 폐지되고 새로 만들어지는 까닭은 목적이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고상한 감수성을 지닌 이들은 훌륭한 예술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므로 예술 지원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물질로 채워지지 않는 영역을 예술이 채울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예술이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예술의 가치를 어떻게 매기느냐는 미학적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예술의 비물질적 가치만으로는 지원의 당위로서 부족하다.

예술이 인간을 교화하여 더 나은 인격으로 도야를 이끌어낸다는 주장도 비슷하다. 이 주장은 예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더 행복하며 사회봉사에도 많이 참여한다는 등의 낡은 통계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대개 그런 사람들이 더 나은 경제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고려하지 않는다. 현실에선 예술가 혹은 예술 애호가들이 기행을 일삼거나 심지어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다. 미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는 원래 다른 것이므로, 이런 목적의 지원 또한 마땅치 않다.

위와 같은 전통적인 생각과 달리 예술의 시장 가치에 주목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에 따르면 예술도 하나의 산업이며, 육성하면 수출사업이 되거나 관광객을 끌어올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예술이라면 국가가 개입하기보다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발전을 이루도록 두는 편이 낫다고 본다. 물론 경제적 수익이 없거나 적은 예술이라도 예술이 국가 이미지를 좋게 만들고 기업에도 도움을 준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일본의 대중예술을 좋아하지만 국가로서의 일본은 싫어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중국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도 중국 상품은 멀리할 수 있다.

시장 가치가 낮은 예술을 지원하자는 주장은 예술의 다양성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상업적이지 않은 예술은 유행에 밀려 사장되는데, 그렇게 사라지는 비주류 예술을 우선 지원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모든 예술을 비주류로 만들고 있는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시대에 무엇을 보전할지가 문제로 남는다. 한편 예술가의 소득이 낮으므로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에는 저소득층 시민을 위한 생계지원 외에 예술가에게 다른 몫을 배정해야 할 이유와 예술 노동이 다른 노동보다 특별한 지원 대상이 되어야 할 근거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일부 엘리트를 위한 순수예술보다 모두를 위한 공공예술을 지원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공적 자금을 사용하는 것이니만큼 예술가가 아닌 이들에게도 이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외국의 예술가들은 점점 더 지역사회 코디네이터나 공동체 커뮤니케이터로 고용되어 사회적 역할을 맡고 있다. 이것은 사실 옛날부터 예술의 주요 역할이었다. 쿠르베가 그린 아틀리에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듯이, 지역문화센터가 없던 시절에는 예술가 작업실이 공적 교류의 장이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지원금 받기를 당연히 여기던 전문 예술가와 그러한 예술만 알고 있던 일부 관료의 불만을 야기할 수 있다. 최근 서울문화재단을 두고 나오는 잡음도 고급예술을 주로 지원하던 정책의 방향이 지역의 생활문화 지원으로 급격히 바뀐 데서 오는 반발이다.

손이상 문화운동가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