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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우리 안의 제국

입력
2019.04.06 04:4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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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태어나 초ㆍ중ㆍ고등학교를 다녔다. 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공무원으로 취직했다.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이던 스무 살 청춘의 시절, 느닷없이 이 땅을 떠나 바다 건너 생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곳으로 영구 이주를 해야만 했다. 그는 그 뒤 평생 동안 고향 한반도의 파랗고 높은 하늘을 그리워했다. 새로 이주한 곳은 땅도 사람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의 인생을 안쓰럽게만 여길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서 태어나 자란 어느 일본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다시 살펴보면, 그는 일본에 가서 짐 운반이나 농사 등 힘든 일을 일본인이 하는 것을 처음 보고 놀랐다고 한다. 경성(서울)에서 살 때도 일본인들끼리 사는 동네에서 그들만의 생활을 누렸다. 태어나서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긴 세월을 이 땅에서 살았지만 깊이 사귄 한국인 친구는 없었다. 그는 철저하게 식민지에 군림한 제국 지배층의 일원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일본으로 귀환한 뒤에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노인이 되어서도 ‘그곳은 참 좋았어. 섬나라 근성으로 가득 찬 이런 좀스러운 일본에는 정말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어’라는 말을 하곤 했다. 사실 일본은 2차 대전에서 패배한 뒤 자국으로 밀려들어 온 ‘귀환자’들을 반기지 않았다. 종전 이후의 열악한 경제 상황에 대부분 빈손으로 들이닥친 그들은 부담스러운 존재일 뿐이었다. 그 때문인지 만주나 한반도 등에서 귀환한 ‘외지인’들 상당수가 모국 일본에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일본인의 이야기는 꽤나 흥미롭게 읽혔다.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를 다른 관점에서 색다르게 보게 만드는 신선함이 있었다. 그런데 문득 기묘한 기시감이 일었다. 화자의 입장에 공감 내지는 감정이입이 되는 순간이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식민지의 삶을 알 리 없는 내게 그런 느낌이 든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의문은 이내 풀렸다. 나는 어쩌면 일제보다도 더 강고하게 여전히 군림하고 있는 제국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바로 남성이라는 제국의.

앞서 소개한 일본인은 개인으로서는 순진무구한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집에 가정부로 한국인이 있었지만 특별히 멸시하거나 괴롭힌 적도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림하는 제국의 일원이라는 원죄를 깊이 자각하지 못한 채 그저 좋았던 시절만을 그리워하는 뒤틀린 노스탤지어를 품고 살았다. 바로 이것이 제국의 악덕 중 하나이다. 제국의 지배층으로 태어난 사람에게 어릴 때부터 차별과 편견의 시선을 학습시키고 세뇌시켜 결국은 부조리의 현신으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대부분은 적당한 양심적 소시민의 삶을 택할 뿐, 과감히 그 범주를 벗어던지고 더 옳은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이는 드물다.

남성으로서 나는 지금 우리 사회에 첨예한 이슈가 된 여성 혐오나 페미니즘, 젠더 평등, 성적 다양성 등에 열린 마음을 지녔다고 자부해 왔다. 딸을 가진 아빠이기에 더더욱 세상이 지금보다 더 성평등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위 이슈들과 관련된 여러 사건들을 접하고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 안에 잠재된 남성 제국주의적 본성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고 튼튼해서 사실상 무의식을 장악한 듯하다. 가치관은 물론이고 사소한 발상에서조차 그 영향을 문득 깨닫고는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이 땅의 남성들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군림하는 제국이다. 그렇지만 우리 다음 세대의 남성들을 또다시 제국의 지배층으로 키워내서는 안 된다. 세상은 바뀌고 있는데, 그들에게 자칫 뒤틀린 노스탤지어를 남겨 주어서야 될 말인가. 제국의 아량을 보여주는 너그러움 같은 가짜 공감으로는 어림도 없다. 여성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고, 여성의 입장에 더 많이 서 봐야 한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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