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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담] “한국의 미래 결정 역할, 트럼프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건 위험”

입력
2019.04.05 04:4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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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비교정치학 권위자 시드니 태로 코넬대 교수 

시드니 태로 미국 코넬대 교수가 2일 한국일보사에서 이충재 수석논설위원과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대담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2019-04-02(한국일보)
시드니 태로 미국 코넬대 교수가 2일 한국일보사에서 이충재 수석논설위원과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대담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2019-04-02(한국일보)

미국은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성공적인 민주주의 국가다. 하지만 지금 유례없는 민주주의의 쇠퇴와 붕괴를 경험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독단적인 성향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에 구멍이 뚫리면서 전 세계 민주주의도 이상 징후를 보이고 있다. 영국의 ‘브렉시트’, 유럽 각국과 남미의 포퓰리스트 정치인 등장이 단적인 예다. 최근 고려대 초청으로 방한한 비교정치 분야의 권위자인 시드니 태로(80) 미국 코넬대 교수를 만나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진단을 들어봤다.

-민주주의 모범국인 미국이 트럼프 대통령 등장 이후 민주주의 시스템이 무너지고 사회가 갈등과 분열로 치닫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렇게 위험한 인물인가.

“현재 미국 민주주의가 위기 상황인 것은 법의 지배가 완전히 깨졌다는 점이다. 가장 큰 이유는 트럼프 대통령 자체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공직자라는 관념이 없다. 본인은 제왕이고, 공직자는 제왕에 봉사하는 신하라는 잘못된 시각을 갖고 있다. 민주적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의식이 희박한 것이다. 특히 미국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시스템인 양당 정치는 합의의 과정을 매우 중요시하는데 트럼프는 합의가 아닌 오직 이기는 것이 최고라고 여긴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에 백인 민족주의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많다. 당신의 연구 결과는 1960년대 미국 사회 진보화에 대한 반동으로 백인 보수주의가 결집한 것이 바탕에 깔려있다고 분석하는데.

“트럼프는 정치적 기회를 매우 잘 이용할 줄 아는 ‘천재성’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백인 민족주의는 트럼프가 만든 게 아니라 원래 미국 백인 사회에서 1960년대부터 저변에 깔려 있던 것을 그가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당시 흑인 민권운동이 활성화하자 이에 반대하는 세가지 세력이 형성됐다. 백인 민족주의와, 리버럴한 성적 자유에 반대하는 기독교 근본주의, 주정부와 연방정부의 규제를 반대하는 세력 등인데 이들이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이 된 것이다. 이들의 분노와 불만을 정치적으로 잘 활용한 것이 트럼프의 당선 이유다.”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가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공화당과 민주당의 당파 분열이다. 그동안 지켜져 온 규범과 불문률이 무너졌는데, 특히 인종과 종교적 차이가 크지 않은가.

“공화당과 민주당의 양극화 역시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에서 시작됐다. 그들에게 정치적, 시민적 권리를 주면서 인종 문제가 미국 사회를 가르는 균열선으로 자리잡았다. 이는 단지 백인과 흑인이 아니라 백인과 유색인종과의 균열을 의미한다. 공화당 지지층은 백인과 고령층, 저학력층인 반면 민주당은 유색인종과 젊은 세대, 고학력층으로 나눠져 있는데 60년대 이후 불평등이 심해지면서 갈등이 커졌다. 더 우려되는 것은 양 당의 대립이 정치적 차원에서 사회적, 문화적 현상으로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설문조사를 해보면 양 당 지지층의 50% 이상이 상대당 지지층과 결혼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응답한다. 심지어 지지층 간에 주거지역도 분리돼 있고, 시청하는 케이블뉴스와 소셜미디어도 확연히 다르다. 다른 의견을 접할 기회가 아예 사라지면서 고립화 현상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뉴질랜드 테러 사태는 백인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청년의 무차별 총격이 초래한 참극이다. 인종 혐오 범죄가 세계 어디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발생하는 데 백인이 인종 차별의 희생양이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인종 혐오와 백인 우월주의가 점점 심각해지는 것은 이민 문제 때문인데 이를 문화적 세계화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극단적 인식이 전 세계적인 운동으로까지 번지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너희 나라에서 행동에 옮겨라’는 식으로 서로 부추기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2017년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일어난 충돌이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나치 깃발을 들고 참여해 폭력시위를 벌인 사건인데 독일 네오나치와 미국 백인 우월주의자들간의 동질화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미국 보수주의의 우위를 논할 때 개신교를 빼놓을 수 없다. 현대 선진국 중에서는 예외적으로 종교적인 국가가 미국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 지지층이 많은 ‘선벨트’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복음파 기독교가 큰 영향력을 갖고 있지 않나.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종교 문제도 운동과 대항운동 간의 상호작용이란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기독교는 70년대 이전까지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불문률을 지녀왔다. 그런데 진보적 기독교 단체의 흑인 민권운동으로 기독교가 정치에 뛰어들었고, 대항운동으로 기독교 근본주의가 세를 넓혀갔다. 하지만 아직까지 진보진영의 기독교 운동도 정치적으로 매우 강력하다. 멕시코 불법 이민자들에게 은밀히 피난처를 제공하는 등의 활동을 펴고 있다.”

-진보 기독교 조직의 활동을 비롯해 미국 내에서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시민운동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실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가.

“미국은 역사적으로 시민사회 전통이 강한 국가다. 가령 코넬대가 위치한 뉴욕주 이타카시만 해도 지역신문의 토요일자 한 면 전체가 시민 모임과 행사를 알리는 소식으로 채워진다. 미국의 시민운동이 살아있다는 것은 트럼프 취임 다음날 시작된 ‘위민스 마치(Womens March)’가 2년 넘게 전국적으로 열리고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시 시위참여자는 350만~55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숫자였다. 지금도 트럼프에 저항하는 시민들이 400개 넘는 도시에서 시위에 나서고 있다. 한국의 촛불집회와 비슷한 양상인데 다만 시위 주도 세력인 여성들이 지난해 중간선거에 대거 출마해 정치에 직접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여부가 미국 민주주의 회복 여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본다. 최근 나온 뮬러 특검 보고서가 트럼프에게 면죄부를 줬는데 재선에 유리해진 것 아닌가.

“중요한 건 경제상황인데 지금은 양호한 편이서 재선에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진보층에서는 농담으로 ‘경기가 나빠졌으면 좋겠다’는 말도 나온다. 분명히 할 것은 트럼프는 전통적 보수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비즈니스맨이지만 자유시장에 대한 믿음이 없다. 중국과의 무역전쟁만 해도 많은 미국인에게 더 큰 피해를 초래하고 있다. 그의 경제정책은 신자유주의냐, 친기업적이냐는 전통적 기준으로 재단하기 어렵다. 우려되는 것은 경제정책의 경우 정권이 바뀌면 치유될 수 있지만 외교정책은 다르다는 점이다. 자칫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베네수엘라와 이란, 북한 문제가 걱정되는데 지지율이 떨어졌을 때 미국이 써먹던 방식인 전쟁을 선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양상을 보이는 데는 기득권층에 대한 반발, 불평등과 난민 문제 등이 자리잡고 있다. 민주주의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인데 어떻게 전망하는가.

“다른 학자들 보다는 긍정적으로 본다. 민주주의 위기를 상징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영국 브렉시트와 포퓰리즘을 들고 있는데, 브렉시트는 민주주의의 본질적 위기라기 보다는 영국 정치인들의 결정 장애라는 측면이 크다. 포퓰리즘의 경우 이탈리아를 보면 좌파와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이 연합해 정권을 잡았지만 3개월 만에 대립으로 치닫고 있다. 포퓰리즘은 유권자의 감정에만 호소하는 매우 단순화된 접근 방식으로 실체가 없다. 프랑스의 포퓰리즘 정당인 국민전선도 국민들이 실체를 확인하고 지지를 거둬들이고 있다.”

-세계 민주주의 위기 상황과는 달리 한국은 촛불혁명을 통해 진보시민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불과 2년 만에 ‘태극기 부대’로 대변되는 극우 세력의 반동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경제와 남북문제를 둘러싼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격렬한데 어떤 조언을 할 수 있나.

“미국은 지난 20년간 생산성과 자동화, 무역 확대 등 세가지 엔진을 갖고 경제 성장에 전념해왔다. 하지만 경제개혁에 등한시한 결과 불평등이 급속히 진행돼 부작용이 매우 큰 상황이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가장 중요한 이슈가 불평등 문제다. 한국도 보수와 진보간에 성장과 분배를 놓고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데 어떤 식으로든 해결의 가닥을 잡아야 한다. 하지만 더 걱정되는 것은 남북문제다. 지정학적으로 남과 북이 모두 강대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긴 하다. 그러나 내가 문재인 대통령이라면 한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역할을 전적으로 트럼프에게 맡기지는 않겠다. 하노이 회담 실패에서 봤듯이 트럼프는 외교정책을 이기고 지는 문제로 여긴다.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에게 한국의 미래를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

인터뷰=이충재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 시드니 태로 교수는 

미국 예일대와 코넬대에서 50년 동안 사회운동과 정치갈등 연구를 해온 비교정치 분야의 권위자다. 서유럽과 미국의 시민사회와 사회운동, 정당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저항의 주기 이론과 정치갈등의 동학 이론을 창출했다. 트럼프 행정부 등장과 이에 저항하는 미국 시민사회 운동에 대한 거시역사적 분석에서 탁월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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