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그리고 사람 이야기] 
대만 사진작가 윤-페이 토우의 '메멘토 모리'. 윤-페이 토우 홈페이지

인간 사회에서 동물의 죽음은 일상화되고 심지어 산업화돼 있다. 어떤 동물은 ‘죽음’이 삶의 목적인 채로 태어난다. 인간은 동물을 죽이는 행위가 인간을 위해 ‘정당한 목적’을 지닐 때 ‘정상적인 인간의 행동’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누군가와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아서 일상에서 감춰진 동물의 죽음에 대해서도 우리는 슬픔과 죄책감을 느낀다. 그래서 동물이 고기가 되고 음식이 되는 과정에서처럼, 동물의 죽음을 분해하고 상징화해 포장하고 외면한다.

따라서 동물의 죽음에 대해 드러내 슬퍼하는 것은 ‘유난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오랫동안 인간은 동물에게 영혼도 사후세계도 허락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특별한 누군가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느끼는 상실감은 그 존재가 동물이라고 해서 가벼운 것은 아니다.

 ◇광견병 걸린 반려견과 마지막까지 함께한 영국 시인 바이런 경 

인간이 동물을 사고 팔 수 있고, 인간과는 다르게 동물이 다른 동물로 대체될 수 있다고 해서 이들을 잃은 슬픔이 작아지는 것도 아니다. 영국 시인 바이런 경도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가 일생 동안 키운 동물이 개 ‘보우선’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보우선은 특별한 존재였다. 15살에 처음 이 개와 인연을 맺은 그는 개가 광견병에 걸려 죽을 때까지 5년을 함께 살았다. 광견병이 사람에게 치명적인 질병임에도 불구하고 바이런은 마지막까지 손수 개를 돌보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보우선의 죽음을 기리며 기념비에 시를 새겼다. ‘아름다움이 있으되 허영심은 없고, 힘은 있으되 거만하지 않고, 용기를 가졌지만 잔인하지 않은’ 진정한 친구를 기리는 그의 글은 그가 살았던 영국 노팅엄셔 뉴스테드 애비 정원에 남아 있다.

영국 시인 바이런 경의 반려견 보우선 기념비. 위키피디아

물론, 이렇게 대단한 사람들만 자신에게 특별했던 동물의 죽음을 기린 것은 아니다. 영국 런던의 하이드파크 구석에 숨겨진 작은 반려동물 묘지에는 이들의 이름과 죽은 날짜가 적힌 작은 묘비들이 남아있다. 1880년 하이드파크 안의 건물인 빅토리아 로지의 문지기였던 윈브리지가 정원에 한 틈을 내어 친구의 개를 묻은 것이 그 시작이라고 전한다. 이곳에 묻힌 개 체리는 요크셔테리어 종의 개로 문지기의 친구와 함께 이 공원에 종종 놀러 왔었다. 이후 윈브리지는 애완견을 잃은 사람들에게 조금씩 더 땅을 내주었는데, 사람들이 죽은 개를 자루에 담아 데려오면 손수 매장도 했다. 하지만 곧 묻을 장소가 부족해져 결국 1903년 문을 닫았다. 그러나 120여년 전 반려동물을 묻던 사람들의 마음은 작은 비석들과 함께 남아있다.

영국 런던 하이드파크의 반려동물 묘지. 게티이미지뱅크
 ◇반려동물을 떠나 보낸 슬픔을 작품으로 남긴 예술가들 

아끼던 반려동물을 잃은 한 남자의 슬픔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예술가들에게도 공감을 이끌어냈다. 19세기 초 프랑스의 시인 밀부아는 말의 죽음을 슬퍼하는 한 아랍인의 이야기를 시에 담았다. 자신과 함께 전장을 누비던 말을 묻고 무덤 앞에 선 남자는 ‘용감한 자의 친구’였던 ‘충성스러운’ 말이 더 이상 세상에 없음을 탄식한다. 그리고 이 시는 동시대 화가 쟝 밥티스트 모재스의 그림으로 옮겨진다. 그는 황량한 사막을 뒤로하고 죽은 말 옆에 황망히 앉은 아랍인의 비통한 모습을 그렸다. 슬픔과 분노에 찬 아랍인은 말을 죽인 자를 찾아 머리를 베어 응징했다. 그림 한편에는 응징 당한 자의 주검이 보인다. 이 그림은 지금 미국 앨라배마 버밍엄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이 슬픔에 공감한 사람은 화가만이 아니었다. 당시 한 가곡집에는 이 시에 곡을 붙여 연주한 악보도 보인다.

프랑스 화가 장 밥티스트 모재스의 ‘말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랍인’ (1812)

사고나 병으로 반려동물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의 죽음을 결정해야 한다면 그 고통은 더욱 무겁다. 프랑스의 철학자 겸 소설가 장 그르니에는 ‘어느 개의 죽음’에서 자신의 개를 안락사 시키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는 ‘인간과 짐승들이 영위하는 삶의 두 방식 사이에 놓여, 죽음 뒤의 천국에 대한 믿음도 없이 지상에서의 천국마저 누리지 못할 위기에 처한 개들’을 위해 슬퍼했다. 프랑스의 소도시 시스트롱의 한 거리에서 이 철학자를 만난 개는 상처를 입고 있었고, 그를 따라왔다. 개는 타이오라는 이름으로 가족이 됐고, 삶을 함께했다. 그리고 더 이상 소소한 일상을 함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순간까지도 함께하게 된다.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지켜보던 끝에 안락사를 결정한 후, 철학자는 타이오를 보내는 하루를 깊은 슬픔으로 정리한다. 타이오와 함께했던 시간, 함께했던 공간을 떠올리고, 개의 즐거움과 고통에 대해 생각하며, 타이오와 그가 함께 지내기 위해 서로 포기한 자유와 기꺼이 받아들여야 했던 속박에 대해 이야기한다. 수의사가 주사를 놓는 동안 그르니에는 타이오의 머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당신이 사랑하는 이를 안락사 시킨다면 그것은 그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서인가, 당신의 고통을 덜기 위한 것인가?’ 그의 글에 담긴 공허함과 슬픔이 책을 덮은 후에도 한참 동안 먹먹하게 남아 있다.

반려동물은 인간보다 수명이 짧다. 그래서 숙명적으로 우리는 이들의 노화와 죽음을 겪게 된다. 내게로 다가와 머리를 부비고 있는 내 고양이의 죽음을 생각하면 멀리 있는 슬픔으로도 머리가 멍해진다. 반려동물을 잃은 슬픔이 유난하다고 타박하는 자의 천국엔 인간만 있기를. 그리고 그곳이 어떤 종교에서 그리는 천국이든 그런 곳엔 가고 싶지 않다.

프랑스의 시인 밀부아의 시 '말 무덤가의 아랍인'을 노래로 만든 곡의 악보.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전자도서관 갈리카 홈페이지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을 죽음을 위해 

대만 사진작가인 윤-페이 토우는 동물보호소에서 안락사 직전에 있는 동물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는 이 프로젝트에 ‘메멘토 모리(네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라틴어 제목을 붙였다. 작가는 3년간 5만여장의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그가 사진을 찍은 시기는 대만이 동물보호소에서 안락사를 시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 전이었고, 당시 매년 8만마리의 유기동물이 죽임을 당했다. 작가는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이들은 살아있는 동안 사랑 받지 못했고 버려졌고, 입양을 갈 수도 없었고, 이미 포화상태인 보호소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도 없었다. 이렇게 주인 없는 개들은 죽었고 잊혀졌다. 사진 속 개들은 때로는 관람자를, 때로는 먼 곳을 응시한다. 사진 속에 있는데도 죽음을 앞둔 개들의 눈을 바라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인간이 ‘길들인 것에 대한 책임’을 져버렸다는 죄책감과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을 이들의 죽음 때문에, 그리고 여전히 그렇게 죽어가고 있을 다른 동물들이 많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최근 한 동물보호 단체 대표가 보호소에 있던 개들을 지속적으로 안락사 시킨 것이 드러나 큰 이슈가 됐다. 고통 받는 동물의 삶을 끝낸 것이 오히려 인도적이라는 그의 주장처럼 동물의 고통과 생명의 권리를 둘러싼 철학적 논쟁은 있을 수 있겠다. 다만, 피와 살을 가진 동물의 한 종인 우리는, 동물의 어떤 죽음이 인도적이고 안락한지 확인해 줄 수 없다. 그러니 그 죽음이 ‘피할 수 없었고, 안락했다’하더라도 그런 이유로 그 죽음에 슬퍼하고 애도하고, 때로 분노하는 것도 막을 수 없다. ‘안락한 죽음’이라는 변명으로 합리화하는 모습이 우리가 가진 ‘이성’의 한 기능이라면, 그 기능은 죽음을 공감하고, 죽음을 막는 데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은가.

천명선 서울대 수의대 교수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사회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