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또 하나의 반성문, 도산사숙록 
다산이 퇴계 이황을 흠모하고 따르겠다는 다짐을 담아 적어 내려간 ‘도산사숙록’ 첫면. 다산은 퇴계가 벗과 문인에게 준 33통의 편지글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적었다. 정민 교수 제공
 
 금정에서의 세 번째 미션 

이존창 검거와 봉곡사 강학회를 마친 다산은 마지막 하나의 미션을 더 수행했다. 금정에 내려온 직후 나주목사 이인섭이 편지에서 말했던 당부를 실천에 옮긴 것이다. 그것은 정주(程朱)의 글을 부지런히 읽고 깊이 믿어 그 가르침에 합치되기를 구하되, 그 모범을 퇴계에게서 찾으라는 주문이었다. 이인섭은 편지의 끝에서 “늙은이의 진부한 얘기라 하여 소홀히 여기지 말고, 오직 때때로 스스로를 아껴 맹렬히 실다운 공부에 힘 쏟기 바란다”고 적었다.

다산은 이인섭의 충고를 받아들여 퇴계의 글을 따라 읽기로 작정했다. ‘금정일록’에 따르면 1795년 11월 19일에 다산은 ‘퇴계집’의 일부를 얻었다. 그리고는 날마다 새벽에 세수를 마치자 마자 퇴계가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를 한 편씩 읽었다. 그리고 낮 동안 편지에서 미끄러져 나온 생각을 부연하여 자신에게 비추어 읽었다. 그 방식은 다산의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 서문에 상세하다.

‘도산사숙록’은 도산의 퇴계 선생을 혼자서 사숙한 기록이다. 퇴계를 흠모하고 따르겠다는 다짐을 담았다. 읽은 내용은 퇴계가 벗이나 문인에게 준 편지글이었다. 모두 33통의 편지에서 짧은 한 단락을 끊어 인용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담하게 적어 내려갔다.

 고요함으로 나를 찾자 

퇴계의 편지를 통해 퇴계를 사숙하는 일은 처음엔 반성문의 모양새로 시작했던 일인데, 뜻밖에 다산에게 잔잔한 기쁨을 주었던 모양이다. 이익운에게 보낸 ‘이계수에게 답함(答李季受)’에서 당시 일을 이렇게 적었다.

“제가 근래 퇴계 선생께서 남기신 문집을 얻어 마음을 가라앉혀 가만히 살피니 진실로 심오하고 아득하기가 후생말류(後生末流)가 감히 엿보아 헤아릴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정신이 펴지고 기운이 편안해지며 뜻과 생각이 가만히 가라앉고 혈육과 근맥(筋脈)이 모두 안정되고 차분해져서, 종전의 조급하고 사나우며 날리던 기운이 점점 내려가는군요. 이 한 부의 묵은 책이 과연 이 사람의 병증에 꼭 맞는 약이 아닐는지요.”

다산시문집에는 이와 별도로 당시의 심경을 노래한 시가 한 수 실려 있다. ‘퇴계 선생이 남기신 책을 읽다가(讀退陶遺書)’가 그것이다.

한가할 제 겨우 보니 물건마다 다 바빠서 閒裏纔看物物忙

이 속에서 세월을 붙들어 맬 길이 없다. 就中無計駐年光

반생은 낭패 속에 가시밭길 연속이라 半生狼狽荊蓁路

일곱 자 몸이 싸움터를 어지러이 떠돌았네.七尺支離矢石場

만 번 움직임이 한 차례 고요함만 못하거니 萬動不如還一靜

뭇 향기가 외론 향기 지킴만 같겠는가? 衆香爭似守孤芳

도산과 퇴계가 어디인지 아노니 陶山退水知何處

아스라이 높은 풍모 흠모함 끝이 없네. 緬邈高風起慕長

돌아보니 이제까지의 인생은 낭패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한 번도 화살과 돌멩이가 어지러이 날아드는 전쟁터 아닌 적이 없었다. 무엇을 이뤄보겠다고 온통 난리를 치며 부산하게 살아왔지만, 시골 역으로 내려와 고요히 자신을 돌아보니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 일만 번의 움직임을 내려놓고 한 번의 고요로 나를 정화시켜 보자. 더 이상 현란한 바깥 향기에 취해 기웃대지 않겠다. 내가 지닌 본연의 향기를 지켜나가겠다. 다산은 퇴계의 편지글을 읽으며 이런 마음을 다잡았다.

 한 수만 잘못 둬도 판을 버린다 

‘도산사숙록’의 내용을 잠깐 소개한다. 퇴계가 참판 박순(朴淳)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산은 다음 한 대목을 짧게 인용했다. “다만 바둑 두는 자를 보지 못했더란 말입니까? 한 수만 잘못 두면 전체 판이 잘못되고 맙니다. 기묘년의 영수였던 조광조는 도를 배워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레 큰 이름을 얻어, 성급하게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자임하였지요.”

이 구절에 대한 다산의 소감은 이렇다.

“이 한 단락이야 말로 바로 선생의 평생 출처가 말미암은 바이다. 당시에 군자가 뜻을 같이 하는 무리를 얻고, 여러 착한 이들이 뒤를 따르니, 마치 기러기가 순풍을 만난 것 같아서 꺾을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어진 이를 등용함의 성대함이 마침내 어그러짐이 없기가 이때 같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선생께서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처럼 깊어, 앞서 실패한 일을 거울로 삼아 늘 경계로 삼았다. (중략) 아! 예로부터 진출하는데 욕심 부리기를 싫증 내지 않는 무리들은 임금이 바야흐로 증오하는데도 오히려 아첨으로 용납됨을 얻으려 하고, 조정이 장차 참소하고 있건만 변명하고 논박하여 나아가려고 한다. 또 백성이 원망하고 있는데도 이를 속여서 덮어 가려 제 지위를 굳건히 하려고 든다. 그러다가 끝내 형세가 떠나가고 운이 다하면 허물과 재앙이 나란히 일어나고, 영수(領袖)가 한번 무너지자 따르던 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져 버린다.”

공부가 완전히 익지 않은 상태에서 얻은 이름은 결국 자신을 해치는 독이 된다. 바둑판에서 한 수의 패착이 전체 판세를 망가뜨리듯, 군자의 처신도 단 한 번의 잘못된 판단이 자신을 무너뜨리고 나라에 해독이 됨을 말했다.

퇴계 이황의 표준 영정. 다산은 퇴계가 쓴 편지글을 읽으며 “더 이상 현란한 바깥 향기에 취해 기웃대지 않겠다. 내가 지닌 본연의 향기를 지켜나가겠다”고 다짐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허물을 어찌 고칠까 

또 영천군수(榮川郡守)에게 보내려 한 편지에서, 퇴계는 “김중문(金仲文)이 비록 두 번의 허물이 있었지만, 능히 고친다면 허물이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다산은 이에 대해 다음의 소감을 남겼다.

“우리는 허물이 있는 사람이다. 당면한 급선무는 오직 개과(改過)란 두 글자뿐이다. 세상을 우습게 보고 남을 능멸하는 것과 기예를 뽐내고 재능을 자랑하는 것이 각각 한 가지 허물이다. 영화를 탐내고 이익을 사모하는 것, 은혜를 마음에 품고 원한을 염두에 두며, 뜻이 같으면 무리 짓고 다르면 공격하는 것이 각각 한 가지 허물이다. 잡서 보기를 좋아하는 것과 새로운 견해를 내기에 힘쓰는 것이 또한 한 가지 허물이다. 이 같은 여러 종류의 병통이 이루 셀 수가 없다. 한 가지 마땅한 약재가 있으니, 오직 고칠 개(改) 한 글자일 뿐이다. 진실로 고치기만 한다면, 우리 퇴계 선생께도 또한 장차 ‘아무개는 허물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해 주실 터이니, 아! 어찌해야 이 말을 들을까?”

다산은 글에서 모두 7가지 허물을 꼽았다. 저만 잘난 줄 알아 남을 우습게 보는 태도, 제 알량한 재주를 믿고 날뛰는 것, 은혜와 원한을 갚고야 말겠다는 생각, 패거리 지어 몰려다니는 습관, 무엇보다 읽어서는 안 될 잡서에 빠지거나, 남을 이겨 먹겠다고 새로운 견해를 내미는 버릇 등을 당장 고쳐야만 할 나쁜 습관으로 나열했다. 이 버릇을 고친다면 퇴계 선생에게 아무개는 허물이 없는 사람이라고 칭찬해 주실 텐데, 그 칭찬이 듣고 싶다고 썼다. 은연 중 글 위로 자신을 투사해서 퇴계의 편지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았다.

다산은 이렇게 ‘도산사숙록’으로 퇴계를 존모하는 마음을 피력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서른 세 편의 반성문을 작성했다. 다산은 퇴계의 편지 한 통 한 통을 곱씹으면서 자신의 삶을 겸허히 때로는 아프게 점검했다.

 커져가는 비방과 부끄러운 상경 

다산이 이 같은 반성문을 작성하고 있는 동안에도 다산에 대한 비방은 더 커져만 갔다. 12월 10일에 다산과 함께 충주 목사로 좌천되어 떠났던 이가환이 다산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는 “산 밖이 떠들썩한 것으로 보아 기필코 작은 꼬투리로 죄를 얽어냄이 더욱 기이할 듯싶네”로 시작해서 “독랄한 예봉(銳鋒)이 반드시 장차 옮겨가 향하리니 그대를 위해 깊이 염려하는 바이오”라는 말로 맺었다. 다산을 해코지 하려는 움직임이 계속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2월 20일의 인사고과에서 이가환은 “공경(公卿)의 반열로 고을에 보임되었지만, 앉아서 누름에 여유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고, 다산 역시 “역에 있으면서 더욱 삼가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을 들었다.

12월 22일에 다산은 마침내 상경하라는 임금의 부름을 받았다. 부름을 받은 당일 오후 4시에 그는 짐을 꾸려 전별의 자리조차 갖지 않고 총총히 금정역을 떠났다. 다산이 이곳에서의 시간을 얼마나 못 견뎌 했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곳에서의 5개월은 다산에게는 가혹하고 끔찍했다. 1795년 7월 26일에 다산은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내려와, 정확히 5개월이 지난 12월 25일에 서울 명례방 본가로 돌아왔다.

이 다섯 달 동안 다산은 이 지역 천주교 지도자 이존창을 검거했다. 관찰사와 해당 고을 현감이 애를 써도 못 잡았던 그를 다산은 장교 하나, 포졸 하나만 데리고 가서 붙들어왔다. 이 후 다산은 성호의 종손(從孫) 이삼환을 좌장으로 모시고 남인 학자 13명과 ‘가례질서’의 편집 정리 작업을 주도했다. 다산은 이삼환을 졸라 비용까지 자기가 다 대어가면서 이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남인 내부의 반대파들에게 혹독한 비난과 비방을 들어야만 했다.

필자 개인의 생각으로 다산은 자신의 생애에서 금정 시절을 가장 부끄러워했을 것 같다. 그는 천주교 신앙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었으면서 이존창을 검거했고, 성호의 학문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지만 그의 저술 정리에 앞장섰다. 퇴계보다 율곡의 학설에 기울었으나 정작 반성문은 퇴계의 이름 아래에 두었다. 겉보기엔 전향 선언과 반성문 작성으로 면모를 일신한 거듭나기의 모양새를 갖추었어도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다산의 노력에도 여론이 호전되지 않았던 이유는 다산이 금정에서 보여준 일련의 행보가 상황 모면을 위한 고육책일 뿐이라고 믿는 시선이 집요하게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다산 자신도 그 점을 잘 알았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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