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8> 일본 폐부 찌른 서화가 김진우
임시정부 추진 소식에 상하이로… 그림 팔아 독립운동가 자금 지원
한국전쟁 때 좌익으로 몰려… 독립운동사ㆍ근현대 미술사서 묻혀
김진우 선생은 당대 최고의 서화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한국전쟁 중 좌우 이념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바람에 후손에게 사진 한 장, 작품 한 점 남기지 못했다.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학고재 갤러리에서 조부 김진우 선생의 작품을 목격한 넷째 손자 김남현 할아버지가 벅찬 감정을 억누르며 ‘매죽도’ 앞에 섰다. 홍윤기 인턴기자

동족상잔의 비극에도 1950년 서울의 성탄전야는 빛을 냈다. 한미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 직후 연달아 성과를 낸 탈환 작전들로 잠시 북한에 내줬던 서울을 수복하면서다. 정부청사로 사용되던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태극기가 걸리고, 전쟁을 피해 떠났던 이승만 대통령 일행도 서울로 돌아온 후다. 12월 24일.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짙은 전운 속에서도 서울 시민들의 마음은 부풀어 올랐고, 거리 곳곳 전등 불빛이 번쩍인 밤이었다.

창살 밖 분위기와는 달리, 같은 밤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의 구석방에 누운 예순여덟의 노인은 살을 에는 추위 속에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었다. 당대 최고의 ‘대나무 화가’라는 평을 듣고, ‘문화재 지킴이’ 간송 전형필(1906~1962)마저 묵죽화를 십여 점 가까이 수장했던 문인화가. 사군자 그림 노대가(老大家)로 평가받던 일주(一州) 김진우(金振宇ㆍ1883~1950) 선생이다. 그가 일제 치하도 아닌,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눈 전쟁 도중 감옥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김진우 선생은 일제의 총칼이 서슬 퍼렇던 시절, 병장기 대신 붓을 들어 대나무를 강직하게 그려낸 항일 서화가(書畵家)였다. 12세에 항일 의병장을 스승으로 모시고 서간도 전장을 누비며 수많은 의병 전쟁을 치렀고, 만주 벌판의 추위를 이겨낼 정도로 강인했다. 독립운동을 하며 수차례 압록강을 건너 국경을 넘기도 했다. 1921년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귀국길에 일제 경찰에 체포돼 칼바람 내리치는 황해도 서흥 감옥에서 3년을 붙들려 있었다. 옥살이 중 추위에 부르튼 손으로 돗자리 지푸라기를 뜯어내 만든 붓을 맹물에 적셔 대나무 치기를 수련했다. 그토록 강직했던 그가 좌우 이념 중 한쪽 편에 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역자로 몰렸고, 평생 염원했던 해방 조국의 옥중 추위 속에 끝내 숨을 거뒀다.

이름을 들어보기는커녕, 그림으로 일제에 저항했던 서화가의 존재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이념 갈등과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독립운동가의 가치를 평가해 온 우리 사회의 수치스러운 민낯이다. 몽양 여운형(1886~1947ㆍ대한민국장), 고하 송진우(1890~1945ㆍ독립장) 등 당대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히 교류했던 인물이었지만, 그는 전쟁 중 좌익으로 몰려 수감생활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운동사와 근현대 미술사에서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 무려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김진우라는 이름 석자는 어떤 인명사전에도 오르지 못했다. 항일투쟁 이력뿐 아니라 회화사적 업적도 체계적으로 평가받지 못했던 그는 다행히 1991년 간송미술관의 작품 전시로 세상의 부름을 받았고, 동지들보다 뒤늦은 2005년이 되어서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일주 김진우. 간송미술관 제공

◇ 무기 대신 붓을 든 서화가

그가 평생 “내게 그림 선생은 없다”고 강조했던 데에는 그림이 기교가 아닌 정신의 영역이라 믿어온 신념 탓이 크다. 근대 서화가 김규진이 개설한 서화교육기관 ‘서화연구회’ 첫 졸업생(1918년 6월) 가운데 한 명인 김진우 선생은 사군자에 아로새긴 항일 정신만은 스승 의암 유인석(1842~1915ㆍ대통령장)에게서 전수받았다. 강원 영월군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을미사변에 반발해 1895년 거대 항일 의병을 일으켰던 유인석 문하에 12세에 입문했다. 유인석은 한때 3,000명이 넘을 정도로 규모가 큰 의병진을 이끌었고, 연해주로 망명해 1910년 의병세력의 연합체인 13도의군 도총재로 추대됐다. 1915년 스승이 서간도에서 생을 다하자, 당시 33세 김진우는 일제 치하의 조국으로 돌아와 1917년경 서울 종로구 종로 4가(경성부 종로통 4정목 92번지)에 작은 서화상을 차렸다. 관련 사료와 행적이 완전히 소실되다시피 해, 그를 다룬 일제강점기 신문기사와 ‘독립운동사자료집’에 남아 있는 판결문(대정 10년 형상 제184호) 등을 통해 겨우 확인할 수 있는 첫 미술계 행보다.

곤궁함에 생업을 시작했지만, 뼈에 스며든 항일 정신은 식지 않았다. 선생은 그림을 판 돈으로 독립운동 단체의 군자금을 지원했다. 지난달 19일 경기 평택시 자택에서 한국일보와 만난 넷째 손자 김남현(80) 할아버지는 “서화상을 운영하던 할아버지는 어디선가 연통을 받고는 형님들에게 ‘잠시 다녀오겠다’고 말한 후 홀연히 떠나 한두 달 뒤나 집에 오곤 했다”라며 “땅이 비옥해 비교적 돈이 많았던 호남 사람들의 집에 초청받아 그림을 그려주고 받은 돈을 모아 (독립운동)단체들에 보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의병 활동을 하며 나라 안팎의 토왜(土倭) 세력을 척결하던 그였기에, 1919년 3월 경성(京城ㆍ서울) 한복판에서 울려 퍼진 만세 소리에 가슴 떨리지 않았을 리 없다.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꾸려진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서화상을 접고 떠날 채비를 한다. 그는 한 쌍의 화폭 중 난초 그림에 ‘사천이백오십이년 기미년 초여름에(時 四千二百五十二年 己未肇夏)’라는 단군기원연호를 남겨 놓고 홀연히 중국으로 떠난다. 일제가 근본부터 한민족의 바탕을 부정하던 시기,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벌일 수 없는 행동이다.

◇ 그림 팔아 독립운동 자금 마련해

1919년 7월, 베이징(北京)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한 김진우 선생은 8월 18일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현재의 국회) 제6차 회기에 강원도 대표 의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임시정부가 이념과 노선에 따라 흩어져 구심점을 상실해 가자 1921년 2월 박은식(1859~1925ㆍ대통령장) 등 독립운동가 15인과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을 발표해 무능한 임정에 대한 비판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장했다.

일제가 임정의 활동과 정보 수집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터라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외교청년단을 조직한 정낙륜(1884~미상ㆍ애족장)의 체포 기사(동아일보 1921년 9월 4일자) 중 “조선 임시정부 의원 조덕진, 김진우 등과 의논한 결과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의 재정 곤란과 또는 그곳에 있는 조선 사람의 생활 곤란을 구제하기 위하여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원이 되어가지고 금년 이 월에 조선에 돌아왔다”는 대목에서 이름을 올렸고, 독립운동가 이종률의 회고록 중 “임시정부에서 대(竹)를 그려 중국 사람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아 독립운동자금을 댔다”는 구절에 등장해 공을 드러냈다.

임정요원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던 1920년. 애국지사 조완구(1881~1954ㆍ대통령장), 여운형과 평생지기의 연을 맺는다. 하지만, 그해 말 형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 1921년 귀국길에 올랐다가 경찰에게 체포됐다. 그의 소식은 체포부터 재판 과정, 상고와 출소까지 속속들이 신문에 보도된다. ‘도중에 체포된 가정부(임시정부) 의원’이라는 제목의 당시 기사는 “서화를 팔아가며 여비를 마련한 김진우가 6월 9일 만주 안동현에서 중국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역에서 경의선 기차를 탔다가 경찰에게 체포돼 6월 22일에 검사국으로 압송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경찰에게 갖은 고문을 당하며 임정에서의 일을 집중 추궁당했다. 알몸으로 두들겨 맞다 기절하기를 세 차례, 그는 “서화가로서 중국을 유람하였을 뿐 정치와는 무관하다”라며 어떤 정보도 누설하지 않는다. 같은 해 7월 19일 신의주지청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자, 다음날 바로 평양복심법원에 상고하고, 이 역시 기각되자 다시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했다. 1921년 9월 29일 고등법원은 “다이쇼(大正) 9년(1920년) 7월 20일경 중국 상해에서 다수의 조선인이 조선의 독립 달성을 목적으로 조직된 임시정부의 입법기관 의정원의 강원도 대표의원으로 취임해 안녕질서를 방해했다”며 3년형의 원심을 확정했다.


36세 김진우가 그린 ‘묵란’. 1919년 경성(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울려 퍼지자, 그는 화폭에 4252년이라는 단군연호를 남기고 임시정부가 꾸려지던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간송미술관 제공

◇ 창칼보다 날카로운 붓

김진우 선생의 황해도 서흥 감옥에서의 3년간 고행은 크나큰 불행이었지만, 역설적으로 ‘독립운동가’와 ‘서화가’로서 정체성을 무르익게 한 계기였다. 가장 오랫동안 그를 스승으로 섬긴 옥봉 스님(1913~2010)은 “선생님은 ‘감옥에서 그림을 자득했다’며 ‘서흥 감옥에서 자리밥을 뜯어 붓을 만들어 맹물로 마루 바닥에 한정 없이 죽치는 연습을 했다’고 항상 말했다”고 회고했다(최완수, ‘일주 김진우 연구’). 일제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었을까. 이때부터 그의 온건했던 묵죽법은 매섭고 강인한 화법으로 변했다. 대나무 마디는 결이 모질고, 댓잎은 살기를 띤 칼날 같아 어떠한 폭력에도 꺾이지 않는 기상을 드러낸다. 보는 것만으로 대나무 그림에서는 날카로운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듯하다. 출옥(1923년 5월)한 뒤부터 신문사들의 신년휘호를 도맡기도 한 그는 1926년 조선총독부 주관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내면서,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 서산대사의 시를 써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일제가 심사하는 대회에 작품을 내면서 ‘만국의 도성은 개밋둑 같고, 수많은 집의 호걸은 초파리 같다(萬國都城如蟻垤, 千家豪傑若醯鷄)’며 일제와 부역자들을 개미와 초파리에 빗댄 것이다. 총독부는 차마 이 작품에 상을 줄 수 없어, 함께 출품한 ‘가을난초(秋竹)’라는 묵죽화를 특선으로 뽑았다. 이후 제7회, 제8회에도 특선과 입선을 거듭하고 신문에 작품이 게재되며 당대 최고의 사군자 대가로 인정받았다. 1931년이 되자, 일제는 만주사변을 앞두고 민족미술인 사군자를 출품부문에서 제외해버린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소장은 “그의 묵죽은 대나무가 아니라 예리하고 강인한 금속제의 도검과 창날, 도끼 등 살상용 병장기를 집합시켜 놓은 듯 삼엄하다”고 평했다.

1933년에 김진우가 그린 ‘묵죽’. 간송미술관 제공
◇ 서화가도 피해가지 못한 좌우갈등 소용돌이

“예끼! 먹을 갈 때는 힘을 빼고 천천히 정성을 다하라고 했지?”

일제의 패색이 짙었던 1945년, 문인과 예술인들이 모여 살았던 서울 종로구 원서동의 한 집에서 아이를 호통치는 소리가 울렸다. 붓에 먹을 찍어 농담을 가늠하던 이는 김진우 선생이었고, 방문 밖에서 야단을 듣는 아이는 당시 국민학교 4학년이었던 셋째 손자 김남수(84ㆍ재미) 할아버지였다.

지난달 통화에서 김남수 할아버지는 “골목에 나가면 친구들은 비석치기를 하는데 얼마나 먹을 갈기 싫었겠냐”라며 “철이 없어 친구들과 후다닥 먹을 갈아놓고 놀기 일쑤였다”고 70여년 전을 회상했다. 때로는 이웃에 살던 송진우, 가까운 계동에 살던 여운형의 자택까지 서신을 들고 심부름을 다니기도 했다. 넷째 손자 김남현 할아버지는 “조부께서 예비검속 날이면 미리 약주를 거나하게 드시고 누워 계시고는 했다”라며 “이미 인사불성이 되어 있어서 순사들도 별 도리가 없어 되돌아가곤 했다”고 말했다.

그의 사랑방에는 애국지사와 민족지도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해방 후 이념 대립이 심해지면서 그의 주변도 뒤틀리기 시작했다. 김남수 할아버지는 “고하 선생(송진우)이 집에 왔다가 신발을 보고는 ‘몽양이 있군’ 하며 되돌아 가고, 몽양 선생이 왔다가 신발을 보고는 ‘고하가 있으니 난 가네’ 하며 돌아가곤 했다”며 “어릴 때는 뜻을 잘 몰랐지만, 고하 선생이 총을 맞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맨발로 뛰어 갔고, 몽양 선생이 암살당했을 때의 애통해 했던 조부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고 회상했다.

어느 편에 서지 않아, 어느 쪽에서도 환영 받지 못했다. 일본의 패전이 거의 확실해지던 1944년, 여운형이 위원장이 되어 광복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밀단체인 조선건국동맹에서 큰 역할을 했지만, 1947년 평생지기였던 여운형이 암살당하고 정치 활동에 큰 뜻을 두지 않는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일시적으로 수도 서울을 수복했을 때는 ‘강을 건너 피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민군 부역자로 몰려 체포됐다.

“일흔 가까운 노인이 뭘 알았겠어요. 잘못한 게 없으니 금방 조사받고 나올 줄 알았다가 일제강점기에도 견뎠던 감옥에서 숨졌어요. 전란 중 원서동 자택에 있던 작품은 모두 소실 됐고, 항상 옆에 두었던 연적과 벼루 하나 가족들에 남아 있질 않아요. ‘인민군 부역자’ 누명을 쓰고 돌아가셨으니, 이후 가족들도 숨죽이고 사느라 조부의 작품 하나 간직하질 못했죠. 그나마 미국에 있는 셋째 형님은 90년대 초 갤러리에서 한두 점을 샀다더군요. 저요? 부끄럽지만 한 점도 없습니다.” 몇 해 전, 진품 여부를 가리는 TV 프로그램을 보고서야 조부가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작품을 남겼는지 자세히 알게 됐다는 손자 김남현 할아버지가 서글픈 마음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학고재 갤러리에서 김진우 선생의 넷째 손자 김남현(80) 할아버지가 조부를 떠올리며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 홍윤기 인턴기자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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