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아직도 어딘가에는 남아 있을지 모를 보물섬을 찾아서 제국주의자들이 이동할 때 영국은 서아프리카 식민지 자산을 지키기 위해 귀족 출신 군인 그레이스톡 경을 파견한다. 하지만 그는 도착하지 못한다. 제국주의와 평행우주처럼 유행하던 선상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귀족 부부는 무인도에 떨어져 오두막을 짓고 아들을 낳는다. 그리고 아들은 외톨이가 되었다.

밀림의 동물들에게 외톨이 아기는 좋은 먹잇감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동정심이 넘치는 개체가 있는 법. 칼라는 외톨이를 키웠다. 외톨이는 유인원 무리 속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다른 개체들보다 더 크고 강해졌다. 어느 날 우두머리 커착과 다투게 되었다. 커착의 잔혹한 송곳니가 그의 구릿빛 피부에 닿으려는 순간 거대한 몸집이 외톨이 옆으로 쓰러졌다. 외톨이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이제 외톨이가 유인원 무리의 왕이 될지 말지 결정해야 할 순간이다. 외톨이는 커착의 몸을 딛고 서서 숲 전체가 떠나가도록 정복자의 포효를 외쳤다. “아~아아~”

그렇다. 칼을 지닌 외톨이는 타잔이다. 타잔은 매일 싸운다. 야생에서 싸우는 이가 어디 한둘인가. 하지만 백경의 허먼 멜빌과는 다르다. 허먼 멜빌은 지루하고 지난하게 싸운다. 그의 싸움은 매우 현실적이다. 하지만 타잔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계신 같은 존재가 있다. 맥락 없이 “아~아아~” 외치기만 하면 밀림에 있는 온갖 동물들이 몰려와서 반란을 일으키는 무뢰한들, 허세만 부리는 나약한 지식인과 귀족들, 미개한 식인종 원주민들을 무찌른다. 이야기가 빠르다. 그리고 재밌다. 그 옆에는 “가자 치타!”라는 말만 알아 듣는 침팬지가 있다.

타잔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언어로 고백한다. “나는 너를 원한다. 나는 네 것이다. 너는 내 것이다. 우리는 여기 내 집에서 평생 함께 산다. 나는 너에게 가장 맛있는 과일과 가장 부드러운 사슴 고기와 밀림에서 가장 좋은 고기를 가져다 줄 것이다. 나는 너를 위해 사냥할 것이다. 나는 밀림에서 최고의 사냥꾼이다. 나는 너를 위해 싸울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제인 포터였다.

물론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실화가 아니다. 에드가 라이스 버로스가 1912년부터 잡지에 연재한 ‘정글의 왕 타잔’과 영화, TV 시리즈물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이 책을 우리보다 먼저 읽은 여인이 있다. 1934년에 태어난 발레리 제인은 영국 남부 해안가 도시에서 ‘둘리틀 선생 아프리카로 간다’를 읽으며 자랐다. 어린 발레리 제인은 틈만 나면 동물과 어울렸다.

발레리 제인이 닭장에 들어가면 닭들이 나갔고, 발레리 제인이 닭장에서 나오면 닭들이 들어갔다. 그래서 닭장 구석에서 조용히 몇 시간이고 버텼다. 그러자 닭들은 그녀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닭장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발레리 제인은 닭의 뒤꽁무니에서 달걀이 쑥 나오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발레리 제인이 좋아한 책이 한 권 더 있다. ‘정글의 왕 타잔’이 바로 그것이다. 아이는 타잔을 처음 만난 순간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자신과 이름이 같은 제인 포터를 몹시 질투하게 되었다. 질투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법. 아프리카 동물들을 연구하기 위해 무턱대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거기서 만난 사람이 올두바이 협곡에서 진잔트로푸스라는 고인류 화석을 발굴한 루이스 리키다. 루이스 리키는 발레리 제인의 동물에 관한 관찰력이 뛰어나다는 걸 깨닫고 그를 조수로 채용했다.

1960년 7월부터 발레리 제인은 빅토리아 호수에서 곰비 침팬지 관찰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침팬지가 도구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유아 살해와 같은 어두운 측면도 꼼꼼히 기록했다. 침팬지의 무분별한 포획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켜서 실험에 사용하는 동물의 수에 한계를 정하게 하고 동물들의 사육환경을 개선시켰다.

발레리 제인은 어릴 때 불리던 이름이다. 그의 정식 이름은 발레리 제인 모리스 구달. 우리가 흔히 제인 구달이라고 하는 바로 그 분이다. 유인원 침팬지의 본모습을 최초로 밝힌 여인이다. 재밌는 사실이 있다. 사람과 가까운 거대 유인원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이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침팬지에게 제인 구달이 있다면, 고릴라에게는 다이앤 포시, 그리고 오랑우탄에게는 비루테 갈디카스가 있다. 이 세 여성 과학자가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인원의 모습은 타잔 옆에 있던 치타 수준에만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유인원은 원숭이와 달리 꼬리가 없다. 그런데 이름이 잘못 붙은 유인원이 있다. 긴팔원숭이가 바로 그것. 한국 연구팀은 10년 넘게 자바긴팔원숭이를 연구했다. 여기에도 당연히 여성과학자가 포함되어 있다. 김예나 박사가 바로 주인공이다. 동물 생태 연구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당연히 현지에 연구센터가 있어야 한다. 사람과 함께 돈이 있어야 한다. 연구팀이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지원이 필요하다.

제인 구달 선생님, 85번째 생신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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