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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의병에서 의열투사로... 감옥대장ㆍ배포대장으로 불린 한훈

입력
2019.03.26 04:4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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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7>日 총독 암살 나선 배포대장 한훈

지난 7일 충북 청주시 자택에서 만난 한상길씨가 할아버지 한훈 지사가 쓴 양동우 동지를 추모하는 내용이 담긴 친필 액자를 가리키고 있다. 한훈 지사는 해방 후 사망할 때까지 계룡시 신도안에서 의열 투쟁 중 숨진 동지들에 대한 추도제를 지냈다. 박소영기자[저작권 한국일보]
지난 7일 충북 청주시 자택에서 만난 한상길씨가 할아버지 한훈 지사가 쓴 양동우 동지를 추모하는 내용이 담긴 친필 액자를 가리키고 있다. 한훈 지사는 해방 후 사망할 때까지 계룡시 신도안에서 의열 투쟁 중 숨진 동지들에 대한 추도제를 지냈다. 박소영기자[저작권 한국일보]

'육혈포 암살단 한군 외 13명은 검사국에'.

1920년 9월 22일 동아일보는 한 달전인 8월 경성(京城ㆍ서울)에서 계획된 일제 총독암살 계획 주동자들의 동대문경찰서 조사 결과를 이러한 제목 아래 보도했다.

‘미국 의원단이 경성에 도착한 것을 계기로 암살단과 만세단을 조직해 경성에서 소동을 일으키려 했던’ 사건은 사전 예비검속 과정에서 그만 경찰에 발각돼 미수에 그쳤다.

하지만 한일병탄(韓日倂呑) 10년을 맞은 상황에서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와 연결돼 무기를 지원받고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총독 암살이라는 대담한 계획을 세운 30세 암살단장 한훈은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8월 23일 거사의 또 다른 주동자로 지하신문 ‘혁신공보’를 발행하던 요시찰 인물 김상옥(1890~1923)의 집에서 잠복하던 경찰에 붙잡혔는데, 권총 3자루와 탄환 300발이 함께 나와 일제를 대경실색하게 했다.

그런데 경찰이 파악한 1920년 전 한훈의 행적은 다소 기이했다. 기사 한 단락은 이렇다. ‘피고 한군(한훈을 지칭)은 일한병합 이래로 배일ㆍ독립사상을 품은 채 해삼위(海參崴ㆍ지금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만주, 관동주 등지를 방황하여 다녔다. (중략) 우연히 모 사업에 착수해 1만여 원의 이익을 얻었다. 조선에 돌아와 전남 용담군으로 가 도사 행세하는 노인에게 도술을 배우다 대둔산에 들어가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어가며 4년 동안을 도를 닦았다(하략)‘

이에 따르면 1910년 이후 한훈은 사업으로 돈을 벌고 도술을 배우고 산중에서 풀뿌리를 캐 먹으며 도를 닦다 3ㆍ1 운동이 전국을 휩쓴 1919년부터 항일에 나설 준비를 한 셈이다. 경찰은 한훈이 간발의 차로 도주한 김상옥과는 이번 거사를 준비하다 처음으로 만나 함께하기로 결의했다고 파악했다. 한훈은 이 사건으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19년 6개월에 달하는 길고 긴 수감 생활의 시작이었다.

한훈 평전을 집필한 장석흥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교수는 50여 년에 달하는 한국 독립운동사를 의병장들로 이뤄진 1세대와 김구, 이동녕, 이동휘, 안창호 등 근대 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인 2세대, 의열단의 김원봉, 3ㆍ1 만세운동의 한위건, 6ㆍ10 만세운동의 권오설 등 신세대와 해외 독립군이 주축이 된 4세대로 나눈다. 장 교수는 “한훈은 연령으로는 2.5세대에 해당하지만 소년 의병으로 나서 1세대와 의병전쟁을 치렀고, 시대 변천 과정에서 독립운동의 계획을 발전시키며 2세대와 3세대에 걸친 독립운동 방략을 수용해 갔다”라며 “독립운동사에서 보기 드물게 의병, 의협, 의열의 방략을 취해 간 인사”라고 평가했다.

한훈 지사의 딸이자 김상옥 열사의 며느리인 한정수 할머니의 자택 벽에 김상옥 열사의 동상 사진과 한훈 지사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박소영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한훈 지사의 딸이자 김상옥 열사의 며느리인 한정수 할머니의 자택 벽에 김상옥 열사의 동상 사진과 한훈 지사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박소영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의병, 군자금 모금, 친일부호 처단

지난 7일 충북 청주시에서 만난 한훈(1889~1950ㆍ본명 한우석ㆍ건국훈장 독립장) 지사의 손자 한상길(67)씨는 과거 동지들의 할아버지에 대한 묘사를 생생히 기억했다. “너희 할아버지는 감옥대장, 거짓말대장, 배포대장이었다고 항상 말씀하셨어요. 감옥생활을 오래 해 감옥대장이었고 일본 경찰이 총을 겨누어도 가슴팍에 숨겨둔 육혈포(六穴砲ㆍ6연발 권총)를 쥐고 태연히 지나가곤 해서 배포대장이었고, 또 거짓말을 많이 하고 다녀 거짓말대장이라고요.” 한 지사는 조 선달, 한훈 등 활동 명을 오래도록 사용했고 행적을 철저히 위장했다. 총독 암살 미수사건으로 붙잡혔을 때 경찰에 진술한 과거 행적도 모조리 거짓이었다.

충남 청양 출신인 한 지사의 독립운동 투신은 17세 되던 1906년 지금의 홍성에서 일어난 홍주의병부터 시작된다. 외숙부를 따라 형 한태석(건국훈장 애국장) 지사와 함께 의병 운동에 참여한 한 지사는 이 때 비극적인 개인사를 겪었다. 한상길씨는 “할아버지가 홍주성 전투에 참여했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임신했던 할머니가 갓 태어난 아기와 함께 돌아가셨다. 왜경이 할아버지가 의병활동 하러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을 감시해 할머니가 꼼짝하지 못하고 굶어 돌아가신 것”이라며 “할아버지가 겪은 비극이 독립운동을 이어간 강한 동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한 지사는 이후 의병활동을 계속하다 부여에서 유응두(1890~1976)씨를 만나 부인으로 맞이했다.

한 지사가 1945년 작성한 자필이력서에 따르면 1907년 그는 직산 군수를 살해한 뒤 만주로 망명했다가 1910년 만주에서 채기중을 만나고, 1913년 채기중이 경북 풍기에서 결성한 광복단에 가장 어린 나이로 참여한다. 광복단의 당면 과제는 군자금을 확보해 만주의 독립군 기지로 보내는 것. 광복단은 1915년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의 박상진 등 젊은 강경파와 통합해 1910년대 가장 큰 의열투쟁(무력항일투쟁) 비밀결사 단체인 대한광복회로 발전했다.

한 지사는 광복단에서 평생의 동지로 여긴 김상옥 열사와 함께하기도 했다. 역사학자 유준기의 ‘김상옥의 항일의열투쟁’에 따르면 한 지사가 김상옥 열사의 양자이자 자신의 사위가 되는 김태운씨에게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경위를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한 지사는 대전을 지나다 약품을 판매하고 예수교를 전도하던 김상옥을 만났는데, 그가 모인 군중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모습에 감명을 받아 동지로 끌어들였다는 내용이다.

한 지사는 1916년 5월 김상옥, 유장렬, 이병호, 이병온 등과 함께 전남 보성의 친일 부호 양재성과 낙안군 벌교의 서도현을 처단하고, 1917년 1월에는 김상옥, 유장렬, 고제신 등과 벌교에서 서도현의 오촌 동생 서인선을 납치해 군산, 대전, 경성, 평양 등지로 75일간 옮겨 다니며 감금시켜 군자금 1만원을 끌어모으기도 했다. 또한 보성군 소재 일본군 헌병대 분소를 습격해 장총 2정과 군도 1개, 권총 2정을 탈취했다. 광복단의 조선헌병대분소 기습은 한일병탄 이후 최초로 성공한 일본군부대 습격 작전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대한광복회는 1917년 말 칠곡 부호 장승원과 도고 면장 박용하 처단 사건을 계기로 세상에 알려졌다. 박상진을 비롯한 지도부가 체포돼 조직이 와해되기에 이르렀고, 한 지사는 일제 수사망을 피해 만주로 망명했다.

10일 서울 강남구 도산 안창호 기념관에서 열린 안창호 선생 서거 81주기 추모식에서 김재실 안 선생 기념사업회장이 추모식사를 위해 안 선생 영정 앞을 지나고 있다. 연합뉴스
10일 서울 강남구 도산 안창호 기념관에서 열린 안창호 선생 서거 81주기 추모식에서 김재실 안 선생 기념사업회장이 추모식사를 위해 안 선생 영정 앞을 지나고 있다. 연합뉴스

‘육혈포 암살단’ 배후는 도산 안창호

군자금 모금과 친일 부호 처단 등 고집스러울 정도로 일관된 한 지사의 외길 의열 투쟁에서 흥미로운 만남도 이뤄졌다. 계몽운동 계열로 분류되는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과의 조우다. 1920년 2월 26일자 도산 안창호 일기에 따르면 이날 도산 선생은 한 지사가 이동휘 임정 총리를 비롯한 각계 인사를 초대해 상하이 영안(永安)백화점 부속건물 대동여사(大東旅社)에서 벌인 만찬에 참석했다. 이틀 후 한 지사는 도산 선생을 따로 방문해 독립방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한 지사는 임시정부 인사들과의 만남에서 독립군 모병과 결사 암살단 조직을 목표로 만든 조선독립군사령부에 대한 임정의 지원을 호소했다.

1920년은 1919년 3ㆍ1운동으로 전국적인 독립에 대한 열망을 확인한 후, ‘국내를 중심으로 한 독립전쟁론’이 탄력을 받던 시기였다. 안창호 선생은 국내외 연결을 중시하며 1919년 7월부터 전국 도ㆍ군ㆍ면에 임시정부 국내 조직으로서 연통부를 설치하고, 이듬해 임시정부 신년축하회 연설에서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했다.

임시정부의 지원을 약속 받은 한 지사는 국내로 돌아와 조선독립군사령부 산하의 소규모 조직인 광복단결사대를 꾸려 4월과 6월 전라도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에 나섰다. 한 지사의 예심종결결정서에 따르면 7월 임시정부 파견원이자 서로군정서의 집법과장 최우송을 중국 안동현에서 만나 모젤ㆍ콜드ㆍ브로우닝 권총 3자루와 실탄 300여 발을 건네받기도 했다.

항일 독립전쟁 당시 사용됐던 독일제 모젤 권총과 총알 7개.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저작권 한국일보]
항일 독립전쟁 당시 사용됐던 독일제 모젤 권총과 총알 7개.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저작권 한국일보]

이러던 가운데, 1920년 8월 미국 의원들과 그의 가족 50여명으로 구성된 의원단이 중국과 한국, 일본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임시정부에서는 안창호 선생이 의원단을 만나기 위해 홍콩으로 파견가는 등 의원단에게 독립의지를 전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기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비밀결사들이 보다 강렬한 의열투쟁을 준비했다. 장석흥 교수는 “한 지사가 상해에서 돌아온 직후 1920년 3월 조선총독 사이토 처단을 계획할 때에도 막후에서 조정한 이가 도산이었다”라며 “도산은 미 의원단 방한에 맞춰 임시정부의 외교적 노력과 달리 국내에서는 보다 강렬한 의열투쟁을 지휘했다”고 설명했다.

한 지사가 4년 전 광복단 활동을 함께한 동지 김상옥과 재회한 때도 이 무렵이다. 이들은 임시정부로부터 받은 폭탄과 권총으로 미 의원단 환영 차 남대문역에 나오는 조선 총독과 정무총감을 살해하고 ‘조선독립을 위해 일반 민중은 한층 분기해야 한다’는 내용의 선언서를 배포하며, 군중들로 하여금 독립만세를 부르게 할 계획이었다. 이들은 환영 인파가 흔들게 할 미국기와 조선국기 수십 장을 만들고 암살단취의서 3,000장을 인쇄하고는 심지어 인부 수백 명에게 술을 사며 거사 당일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도록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의원단 입국 전날 검속에서 덜미가 잡히지 않았다면 모두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았을 거대한 계획이었다. 암살계획의 무산 직후 미 의원단의 방안조차 취소됐고 한 지사를 비롯해 16명이 체포됐다.

한 지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광복회 시절 서도현을 처단하고 서인선에게 군자금을 받아냈다는 행적이 탄로 났다. ‘한훈 평전’에 따르면 한 지사는 옥중에서 4년형이 추가됐고, 두 번 감형된 끝에 1929년 2월 22일 만 10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야 쇠약해진 몸으로 출옥했다. 하지만 후에도 한 지사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가족의 보살핌으로 회복되자마자 충남 강경에서 신문사 지국장으로 일하면서 그해 11월부터 다시 군자금 모금에 나섰다. 결국 또 경찰에 발각돼 1930년 10년 형을 선고 받았다. 그가 다시 형무소 밖을 나선 때는 1939년이었다.

한훈 지사의 부인 유응두(가운데)씨와 아들 한세택 딸 한정수 할머니가 함께 찍은 사진. 한정수씨 제공
한훈 지사의 부인 유응두(가운데)씨와 아들 한세택 딸 한정수 할머니가 함께 찍은 사진. 한정수씨 제공

19년 수감생활, 핍박받은 가족

“다섯 살 때였나, 대전형무소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뵈러 갔는데 면회를 안 시켜주더라고. 사정사정해도 안 시켜줘 형무소 밖을 나오면서 어머니가 나를 때리고는 ‘아버지 보고 싶다고 울어야지 왜 보고 싶다 한마디도 안 하느냐’고 혼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나는 아버지 얼굴 한 번이라도 봤어야 보고 싶지.”

14일 경기 수원시 자택에서 만난 한정수(90) 할머니는 1929년 한 지사가 첫 번째 복역을 마치고 잠시 집에 머물렀을 때 태어난 둘째다. 19년 복역 기간 동안 한 지사는 경성, 전주, 신의주, 대전, 대구 등 형무소를 거쳤고 그럴 때마다 부인 유씨는 두 자녀를 데리고 옥바라지를 위해 전국을 누벼야 했다. 손자 한상길씨는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서대문형무소에 계실 때 인왕산 바위를 베개 삼아 주무시고, 남의 집 신세 져 가며 힘겹게 살았다고 말씀하셨다”라며 “할머니와 함께 보따리 장사를 하며 다닌 아버지는 국민학교도 다니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 지사 못지않게 부인 유씨 역시 일제 경찰의 고문을 견뎌야 했다. 한 할머니는 “아버지는 어머니가 빨래해 널지도 못하고 물기만 짠 옷을 보퉁이에 넣어 도망 다녔다”라며 “어머니는 하도 경찰에게 뺨을 많이 맞아 나이 마흔에 귀를 잡쉈다”고, 상길씨는 “경찰이 할머니를 매달아 놓고 고문하는 바람에 팔이 남보다 훨씬 길었다”고 기억했다. 유씨는 한 지사 대신 권총 등 무기를 옮기는 데에도 힘을 보탰다. 한상길씨는 “하루는 할머니가 권총을 다리에 매고 한참 걸으니 피부가 벗겨져 피가 흐르는 걸 경찰이 보고 ‘왜 치마 밑에 피가 흐르느냐’고 추궁하자 할머니가 월경혈이라 둘러댔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경기 수원의 자택에서 만난 한훈 지사의 딸 한정수(90)할머니. 박소영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경기 수원의 자택에서 만난 한훈 지사의 딸 한정수(90)할머니. 박소영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한정수 할머니는 독립운동하는 집안이란 이유로 국민학교도 다니지 못할뻔한 걸 어머니가 옆집 학교 교사에게 ‘게장 담가주고 김치도 담가줘’ 간신히 들어갔다. 하지만 ‘도둑놈 딸’이라는 급우들의 놀림과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어머니에게 ‘왜 아버지가 도둑놈이냐’고 물어도 어머니는 ‘나중에 알거다, 시방(지금을 뜻하는 전라도 사투리)은 말 못한다’라며 달래주셨어요. 아버지가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독립 운동했다는 사실은 해방 후에야 알았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가계, 친정 식구들까지 괴롭힌 남편의 독립운동, 기약 없는 남편의 출옥 등으로 유씨는 두 차례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어머니는 독립운동이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가 아프다고 하셨어.”

한훈 지사의 딸 한정수 할머니와 김상옥 열사의 양자 김태운씨의 1952년 결혼사진. 한정수씨 제공
한훈 지사의 딸 한정수 할머니와 김상옥 열사의 양자 김태운씨의 1952년 결혼사진. 한정수씨 제공

두 독립운동가 가족의 결합

1939년 출소한 후 한 지사는 처음 광복회 활동을 했던 충남 계룡산 남측 자락 신도안으로 돌아가 집을 지었다. 할머니(한훈 지사의 부인 유씨)와 함께 살았던 한상길씨는 유달리 특이했던 당시 집을 기억했다. “목재로만 지은 댁은 넓은 지하실에서 사랑방, 부엌으로 각각 나갈 수 있었고 2층 다락에서 사랑방과 부엌, 심지어 안방 벽장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는 미로 집이었어요. 가족이 하도 도망을 다니다 보니 탈출하기 쉽도록 지으셨던 거죠.”

한 지사의 딸 한정수씨와 김상옥 열사의 양자 태운씨의 결혼식도 이 집에서 열렸다. 하지만 한 지사는 딸의 결혼을 보지 못했다. 광복을 맞고 한 지사는 서울을 왕래하며 광복단 재건운동을 벌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에게 붙들려 간 후 다시는 가족을 만날 수 없었다. 행방이 묘연했던 한 지사의 사망은 이후 인민군의 한 지사 총살 목격자 증언으로 확인됐다. 김상옥 열사는 1923년 일제 경찰과의 종로 시가전 끝에 자결, 생전에 두 사람이 다짐했던 ‘자녀들끼리 결혼을 시켜 사돈을 맺자’는 약속의 결실은 1952년에야 이룰 수 있었다. 한정수 할머니는 “남편과 서로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결혼했다”라며 “전쟁 통이라 남편 집에서도 아무도 오지 못해 어머니만 참석하고 동네 사람들이 잔치 음식을 준비해 줬다”고 기억했다.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특히 할아버지처럼 국내에서 운동하신 분은 자식들이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어 나중에 잘 살기도 힘들고. 우리 가족도 그랬어요. 그래도 우리는 어려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할머니와 아버지가 ‘절대 피 더럽히지 마라. 거짓으로 돈 벌지 마라. 편안할 때는 이웃, 어려운 사람 생각하고 살아라. 나라 힘들 땐 목숨 바칠 각오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걸 듣고 컸어요. 그 덕에 돈은 많이 벌지 못했지만, 당당하게 살아서 좋기는 해요.” 딱 하나 남아있다는 할아버지 친필이 담긴 액자를 가리키며 한상길씨가 말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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