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성 서울시 3ㆍ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총감독 
 내달 북촌서 정세권 선생 삶 조명 전시회 
서해성 서울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총감독이 최근 ‘조선어학회 터 표지석’ 앞에서 “북촌을 개발해 얻은 수익으로 조선어학회 회관을 지어 기증한 정세권 선생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한글은 있기 어려웠을 것이다”고 말했다. 표지석 우측으로 난 골목을 따라들어가면 보이는 2층 양옥주택이 조선어학회 회관 건물이다. 현재 원불교 정토회관 분원으로 주말에만 법회가 열리는 이 건물은 평소에는 굳게 닫혀 있다. 고영권 기자

“여기가 조선어학회가 있던 건물입니다. 영화 ‘말모이(우리말사전)’에서처럼 유리창 낸 개량한옥이 아니라 사실은 2층짜리 양옥이었어요. 조선어학회는 돈이 어디서 나서 이런 건물을 구했을까 궁금하지 않으세요?”

북촌한옥마을 일대인 서울 종로구 화동 129-1번지에는 ‘조선어학회 터’라고 쓰여진 표지석이 있다. 최근 이 곳에서 만난 서해성 서울시 3ㆍ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총감독은 “한 조선인이 이 건물을 조선어학회에 기증했다는 사실을 알고 굉장히 놀랐다”며 “독립군 군자금을 대는 건 비밀리에 가능했지만 건물을 줬다는 건 일제에 바로 포착될 수밖에 없는, 목숨을 건 독립운동이었다”고 강조했다.

이 조선인은 바로 부동산 개발회사 ‘건양사’의 대표 기농(基農) 정세권(1888~1965) 선생이다. 당시 ‘건축왕’으로 불리면서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유통왕), 광산재벌 최창학(광산왕)과 함께 경성의 ‘3대 왕’으로 통했다. 그러나 ‘집 장사’를 통해 번 돈을 독립운동에 댔다는 점에서 정세권은 이 둘과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정세권 선생. 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제공

“일본식 주택은 절대 지을 수 없다.” 오늘날 북촌과 익선동의 한옥마을을 만든 게 정세권이다. 정세권은 북촌 일대의 큰 대지를 차지하던 기존 한옥을 부수고 필지를 쪼개 작은 평수의 한옥을 대량 공급했다. 서 총감독은 “일본공사관이 있던 진고개(현재 예장동~충무로1가) 일대에 살던 일본인들이 점점 북촌으로 거주지역을 확장해오던 때 유일한 조선인 거주공간을 지켜냈다”고 설명했다.

정세권은 한옥집단지구 개발로 얻은 막대한 부를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좌우 합작 항일단체 신간회 등 독립운동 후원에 썼다. 특히 화동 129-1번지 32평 대지를 구입해 2층 양옥을 짓고 조선어학회에 기증했다. 조선어학회는 1935년 7월 11일 이 건물에 입주해 해체될 때까지 사전편찬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조선어학회가 셋방살이를 계속 전전했다면 과연 16만개에 달하는 우리말 어휘의 뜻풀이를 완성할 수 있었을까요.” 학계에서는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언어 독립투쟁’이라고 정의 내린다.

내선일체를 앞세워 우리말 사용을 금지했던 일제는 1942년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정세권도 다음해 홍원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재산도 일제에 빼앗겼다. 이러한 민족자본가 정세권의 존재는 뒤늦게 후세에 알려졌다. 정세권 기념사업을 준비 중인 서울시는 3ㆍ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다음달 9일부터 북촌 한옥청에서 ‘북촌민족문화의 방파제’라는 주제로 정세권의 삶과 북촌을 재조명하는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조선어학회 항일투쟁사’를 쓴 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역사학 박사)은 “조선어학회회관은 우리말 원고를 일제에게 강탈당한 민족 수난의 장소이자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대항해 우리말과 한글을 지킨 항일투쟁의 장소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우리말과 한글을 지켜내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는 조선어학자들에게 물적 토대인 회관을 지어 기증해준 정세권의 공로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화동 129번지 ‘조선어학회 터’라고 쓰여진 표지석이 세워진 골목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조선어학회가 있던 2층 양옥주택. 고영권 기자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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