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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축복

입력
2019.03.25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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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머리 깎으셨나 봐요. 언제 미장원 갔다 오셨어요?”

잠시 머뭇거리던 아버지가 나지막하게 대답한다.

“나는 이제 시간 개념이 없어져 버린 사람이야. 그러니 나한테 그런 건 물어보지 마.”

나는 조금 놀란다. 그냥 모른다고 하거나 엉뚱한 이야기를 꺼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거의 자기 성찰이라고까지 할 만한, 이토록 솔직한 대답이 나올 줄 몰랐다. 아버지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내가 아버지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나? 솔직히 나는 아버지에 대해 잘 모른다. 아버지도 나에 대해 잘 모를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알 기회가 별로 없었다. 아버지와 딸로 만났으나 평생 단둘이 마주 앉아 친밀한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다. 이렇게 내가 먼저 아버지에게 말을 건네는 것도 아버지가 알츠하이머라는 진단을 받은 다음부터의 일이다.

“누구나 90년 넘게 살면 나처럼 돼. 그냥 기억이 안 나는 것뿐이야.”

하필이면 큰언니가 해외여행 중이라 내가 보호자 자격으로 병원에 간 날이었다. 의사는 MRI로 찍은 아버지의 뇌 사진을 가리키면서 수축한 형태로 볼 때 전형적인 알츠하이머 증상 같다고 했다. 서서히 혹은 급격히 병세가 진행될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고 나서 두 해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의사의 예측대로 아버지의 인지능력은 나날이 변해갔다. 이제는 새로운 정보를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도 많이 잊었다. 다행히 성격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폭력적이 되거나 망상에 시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좀 더 온순하고 조용한 사람이 되었다. 90년 넘게 살다 보니 기억이 흐릿해진 것이라는 아버지의 말이 의사의 진단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믿고 싶을 정도다.

아버지가 젓가락으로 초밥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는다.

“이거... 어디에 찍어 먹어야 하지?”

아버지 앞에는 튀김용 간장과 초밥용 간장이 따로 담긴 종지 두 개가 놓여 있다. 어머니와 나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낙담한다. 그래, 의사 말이 옳겠지.

“내가 무릎 수술 받으러 가면 내 얼굴을 잊어 버릴까봐 걱정이란다. 네 아버지가.”

어머니는 곧 인공 연골 수술을 받을 것이다. 수술과 재활 기간이 한 달쯤 걸릴 예정이라고 한다. 아버지 혼자 지낼 수 없어서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동안 나와 언니가 아버지를 돌보기로 했다.

“제가 아침마다 엄마 사진을 보여드릴게요. 제가 넷째 딸이라는 것도 매일 알려드리고.”

나는 재밌는 농담이라도 하듯 소리 내어 웃는다.

“그래도 얼굴을 보면 딸이라는 느낌은 있어. 몇 째인지 몰라서 그렇지.”“그럼요, 딸이 여섯이나 있는데 어떻게 다 기억할까.”

아버지는 넷째 딸에 대한 기억을 거의 모두 잊었을 것이다. 내가 스무 살 무렵,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한동안 문 밖 출입을 안 하고 있을 때, 아침 저녁으로 찾아 온 빚쟁이들과 날마다 등하교 길에 마주쳐야 했을 때, 나는 아버지에게 자주 대들고 사납게 굴었다. 너희들 눈에는 내가 쓰레기로 보이지? 어느 날 아버지가 고함을 질렀을 때, 망설이지도 않고, 네, 라고 대답했다. 나쁜 기억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축복이다. 열심히 노력하거나 소망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눈이 펑펑 내리고 또 그러다가 봄이 와서 꽃이 활짝 피듯이.

너도 흰머리가 많아졌구나, 아버지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도 하지 않던 행동이다.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드라마 속 대사처럼 중얼거린다. 오, 우리 예쁘고 착한 딸. 차갑고 어색해서 특별하던 내 아버지가 상상 속 모든 아버지들처럼 다정해졌구나. 어설픈 봄볕 속에서 나는 문득 슬프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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