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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스토리] 술 취한 환자에 멱살 잡히고… 응급실은 극한직업

입력
2019.03.25 04:40
수정
2019.03.25 09:04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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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악전고투’ 응급실 의사들 

 열악한 지방 종합병원 응급실에 중증환자 두세명 닥치면 ‘마비’ 

 심근경색ㆍ뇌졸중 환자 앞에서 경미한 환자가 “내가 먼저와” 고함 

 주취 환자 들어오면 온 병원 촉각… “맘대로 CT 찍나” 술 깨면 난동도 

※‘메디 스토리’는 의사, 간호사 등 의료계 종사자들이 겪는 애환과 사연, 의료계 이면의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한국일보>의 김치중 의학전문기자가 격주 월요일 의료계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응급환자가 응급실로 이송되고 있는 모습. 시화병원 제공
응급환자가 응급실로 이송되고 있는 모습. 시화병원 제공

비가 추적추적 내린 지난 15일 밤 찾은 경기 남부의 한 종합병원 응급실. 병원 밖 도시는 ‘불금’을 맞아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지만 이 병원 응급실은 갑작스런 사고를 당해 신음하는 환자들로 가득했다.

응급실에 들어서니 의료진들은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심근경색으로 한 환자가 실려왔지만 이 병원에는 심장내과 전문의가 없어 인근 병원으로 전원(transfer)해야 했다. 환자의 혈압이 계속 떨어지고 있어 간호사 1명이 환자와 함께 응급차에 올랐다.

환자를 실은 응급차가 떠나고 나서야 의료진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병원 응급실 과장 A씨는 “인근 병원에서 입원실과 수술실이 꽉 차 환자를 받을 수 없다고 하면 자리가 날 때까지 응급실에서 대기해야 하는데 저 환자는 운이 좋았다”며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보낼 때까지 1시간 넘게 전화통화를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저런 환자 2, 3명이 들어오면 업무가 마비된다”고 덧붙였다.

2017년 기준으로 응급실을 운영하고 있는 의료기관 전체 532개 중 261개(49%)가 이같은 ‘지역응급의료기관’으로 가장 많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에 따르면 지역응급의료기관은 응급실 내원환자 수가 전년도 연간 1만명 이상일 경우 최소 10병상을 확보하면 된다. 환자 수가 연간 1만명 미만일 경우 5병상만 있으면 된다. 경증과 중증환자가 밀려들어오면 응급실은 순식간에 시장통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가뜩이나 열악한 지역의 종합병원들이 수익이 나지 않는 응급실에 예산을 투입할리 없다. 2008년 329개였던 지역응급의료기관 숫자가 2017년 261개로 68개나 감소한 것도 응급실 운영으로 인한 경영압박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은 말한다.

상태가 위중한 응급환자를 이송할 때 전문의가 없어 심‧뇌혈관질환 등을 볼 수 없는 지역응급의료기관 대신 중증 응급환자 진료가 가능한 지역응급센터 이상급(級) 의료기관에 환자를 보내면 신속한 치료가 가능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환자발생지역, 환자상태 등을 고려해야하기 때문이다. 한철 이대서울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환자가 발생한 지역이 지역 및 권역응급센터와 너무 떨어져 있을 경우 이송 중 환자가 사망할 수 있어 우선적으로 지역응급의료기관에서 응급처치를 한 다음 전문적인 치료가 가능한 병원으로 환자를 이송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최근 보건복지부에서 응급의료정책 전문가, 환자대표 등이 모여 대형병원과 중소병원 응급실의 역할 분담방안을 모색하고 있지만 갈 길은 멀다. “경증과 중증을 가리지 않고 모든 환자를 봐야하는 현실에서 역할분담을 해도 효과는 미미할 것”이라고 응급의학과전문의들은 말한다. 박재찬 복지부 응급의료과장은 “지역상황에 맞는 응급환자 이송 가이드라인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중증 응급환자를 안전하고 신속하게 치료할 수 있게 대안을 만들고자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나부터 봐 달라” 목소리 큰 경증환자가 ‘왕’ 

심근경색 환자를 이송한 후 한숨 돌린 것도 잠시. “여기요. 저 눈이 아픈데 좀 봐 주세요” 하며 50대 여성이 응급실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응급실 보안요원과 야간 원무과 직원이 병원에 안과 의사가 없어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안과 진료는 할 수 없다고 간호사가 다시 설명하자 환자는 “무슨 놈의 병원이 사람을 가리며 치료를 하느냐”며 되레 역정을 냈다. 의사와 간호사가 번갈아 가며 ‘눈이 어떻게 아프냐’고 물었지만 환자는 “모르겠다. 그냥 눈이 침침하다. 1회용 인공눈물약이라도 달라”며 억지를 부렸다. 심근경색으로 사경을 헤매는 환자, 손가락이 절단된 환자가 있는데도 침침한 자신의 눈부터 치료하라고 환자는 소리를 질러댔다. 의사와 간호사들은“대꾸할 기력도 없다”고 했다.

응급실이 말 그대로 응급실답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경증환자의 응급실 이용을 최소화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중앙응급센터가 2017년 전국 센터급 이상 154개 응급의료기관의 응급실 내원 건수 581만3,188건을 분석한 결과, 경증인 4등급(46.7%)과 5등급(10.2%) 환자비율이 56.9%(330만7,704건)로 절반이 넘었다.

홍기정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지금도 지난 연말 응급실에 만난 ‘진상환자’를 잊지 못한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를 보고 있을 때였다. 안전요원과 간호사, 레지던트의 저지를 뚫고 그에게 달려든 환자가 “순서상 내 차례인데 왜 나를 보지 않고 저 사람을 치료하고 있느냐”며 소리를 질렀다. ‘사람이 죽게 생겼다’며 환자를 보여줘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홍 교수는 2명의 환자를 동시에 진료해야 했다. 뇌졸중은 응급전문의가 60분 내 치료를 해야 한다. 홍 교수는 “당시 경증환자가 계속해서 난리를 쳤으면 뇌졸중 환자가 제대로 치료를 못받고 자칫 사망할 수도 있었다”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홍 교수는 “중동호흡기증후군(MERSㆍ메르스) 사태를 겪고 나서야 응급실에 들어올 수 있는 보호자 수가 1명으로 제한됐다”며 “그런 사태를 열 번쯤은 겪어야 응급실 문화가 완전히 바뀔 것 같다”며 씁쓸해했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ㆍ메르스) 사태 이후 응급실에 들어올 수 있는 보호자 수가 1명으로 제한됐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보호자 통제가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서울성모병원 제공
중동호흡기증후군(MERSㆍ메르스) 사태 이후 응급실에 들어올 수 있는 보호자 수가 1명으로 제한됐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보호자 통제가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서울성모병원 제공

응급실에서 중증환자를 우선적으로 치료해야 한다는 사실은 법에도 명시돼 있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응급의료종사자는 응급환자에 대하여 다른 환자보다 우선해 상담ㆍ구조 및 응급처치를 하고 진료를 위해 필요한 최선의 조치를 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법에서는 또 응급환자에 대한 구조ㆍ이송ㆍ응급처치또는 진료를 폭행, 협박, 위계, 위력 등으로 방해하거나 의료기관 등의 응급의료를 위한 시설ㆍ기재ㆍ의약품 기물 등을 파괴 및 손상, 점거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은 법과 현실은 별개라고 입을 모은다. 한철 교수는 “환자들에게 법에서도 중증 응급환자를 먼저 보도록 돼 있다고 설명하지만, 돌아오는 얘기는 ‘바로 내가 응급환자’라는 말”이라며 “응급실 시스템이나 제도 개혁도 좋지만, 결국 국민인식이 개선되지 않는 한 응급실 문화는 개선될 수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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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폭행, 진료방해가 범죄라는 안내 포스터가 붙어 있지만 응급실 문화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서울성모병원 제공
응급실 폭행, 진료방해가 범죄라는 안내 포스터가 붙어 있지만 응급실 문화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서울성모병원 제공

 ◇“응급실 근무 30년, 주취 환자가 최고 진상 

응급실 최고 진상은 술 취한 환자다. “응급실에서 30년간 일하면서 주취 환자는 질리도록 봤다”는 유인술 충남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도 치료는 받지 않고 응급실을 돌아다니면서 난동을 부리는 주취 환자를 만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는 “이런 환자가 들어오면 사고를 칠까봐 간호사, 레지던트, 안전요원이 붙어 있어야 한다”며 “때로 인간에 대한 신뢰마저 흔들릴 때가 있다”고 말했다. 복지부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응급실에서 응급의료 방해로 신고ㆍ고소된 이들의 67.6%가 주취자였다.

혹시나 뇌졸중 등을 우려해 주취 환자에게 검사나 치료를 했다가 낭패를 보는 일도 부지기수다. 신민철 시화병원 응급실 과장은 “길에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온 주취 환자가 구토 증상을 보이면 뇌 컴퓨터단층(CT)를 찍었다가 별 문제 없으면, 환자가 술이 깬 후 ‘돈 벌려고 마음대로 CT를 촬영했다’며 의사의 멱살을 잡는 곳이 응급실”이라고 말했다.

최석재 엘리야병원 응급센터장은 “종합병원 등에서는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이 1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며 응급실에서 일을 하는데, 환자로부터 불만사항이 많이 접수되거나 전원을 많이 보내면 병원 측에 찍혀 재계약에 실패하기도 한다”며 “환자와 병원 눈치를 보며 밤새 일해야 하는 것이 응급의학과 전문의”라고 말했다. 한 마디로 ‘극한 직업’이라는 것이다.

김치중 기자 cj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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