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디지털 금욕 불가능하다면… ‘멍때리는’ 시간이라도 許하라

알림

디지털 금욕 불가능하다면… ‘멍때리는’ 시간이라도 許하라

입력
2019.03.21 16:32
수정
2019.03.21 19:25
22면
0 0
하루 중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무수하게 쏟아지는 디지털 정보 속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키기 위해선 ‘여백’의 시간이 중요하다. 템플스테이 참가자가 명상에 빠져 있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하루 중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무수하게 쏟아지는 디지털 정보 속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키기 위해선 ‘여백’의 시간이 중요하다. 템플스테이 참가자가 명상에 빠져 있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두 대의 컴퓨터 모니터에 뜬 14개의 메신저 창이 경쟁하듯 불빛을 반짝이며 응답을 재촉한다. 동영상을 체크하라는 편집장의 업무 지시, 샐러드를 사다 달라는 어머니의 메일까지 확인하고 지쳐버렸다. 이번엔 휴대전화 알림이 매섭게 울리기 시작한다. “너 살아 있는 거야, 뭐야?” 답장이 늦어 화가 난 친구의 짜증 섞인 메시지다. 불현듯 심장을 스치는 ‘뼈 때리는’ 질문에, 그 길로 사표를 던진다. 마지막 업무는 이메일과 워드 문서, PDF 파일이 뒤엉켜 있는 컴퓨터 화면을 사진으로 남기는 일. 충동적 퇴사를 후회하지 않기 위한 기록이다. 그리고 다짐한다. ‘너의 정신을 흔들어놓는 이것들에게 또다시 속아 넘어가지마.’

제목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책 ‘우리에겐 쉼표가 필요하다’는 저자의 퇴사 장면으로 시작한다. 캐나다 라이프 스타일 잡지 ‘밴쿠버’의 기자였던 마이클 해리스(39)는 디지털에 지배당하는 삶에 돌연 회의감을 느끼고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선다. 책은 혼자만의 넋두리로 끝나지 않는다. 역사학자, 정신과의사, 심리학자, 컴퓨터 과학자 등 전문가들을 꼼꼼히 취재해 디지털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얼마나 다치게 하는지를 통찰력 있게 보여 준다.

저자는 스스로를 ‘디지털 이주민’이라 칭한다. 인터넷과 휴대폰이 없는 세상을 경험해 본 마지막 세대로서, 자신의 세대적 특성을 “한 발은 해변에 놓고, 한 발은 디지털 바다에 담근”이라 표현한다. 1985년 이전 출생자들이 디지털 이주민에 해당한다. 그들은 공중전화 부스 앞을 서성이거나, 손 편지로 마음을 전하던 기억을 어렴풋하게나마 간직하고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친구와도 말보다는 휴대폰 메신저로 대화하는 게 편하다는 ‘디지털 원주민’ 세대보다 새로운 삶을 상상할 여력이 더 크다는 얘기다.

지난해 4월 서울 여의도한강공원에서 열린 ‘2018 한강 멍 때리기 대회’에서 참가자들이 가만히 앉아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90분 동안 가장 안정적으로 멍 때리기에 성공한 참가자를 가리는 대회였다. 연합뉴스
지난해 4월 서울 여의도한강공원에서 열린 ‘2018 한강 멍 때리기 대회’에서 참가자들이 가만히 앉아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90분 동안 가장 안정적으로 멍 때리기에 성공한 참가자를 가리는 대회였다. 연합뉴스

책은 우선 ‘디지털 과잉’의 병폐를 조목조목 짚는다. 눈 뜨자마자 잠들 때까지 산사태처럼 쏟아지는 정보는 인간의 뇌를 활성화하기보다 퇴보시킨다. 도처에 넘쳐나는 정보들은 단기적으론 에너지 수준을 높이고 기억을 증강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인지 역량을 손상시키고 우울증까지 일으킨다. 전문가들은 이를 ‘기술로 인한 뇌 탈진’이라고 설명한다. 포털 검색 서비스가 인간의 뇌를 대신하는 상황은 식민지에 비유된다. 모든 것을 알지만,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역설 속에서 인간은 점점 ‘멍똑(똑똑하지만 멍청한)’이 돼 간다.

개방, 참여, 다양성 같은 디지털의 순기능도 때로는 의심받는다. 집단 지성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 ‘위키피디아’는 오류가 확대 재생산되는 출처가 되곤 한다. 페이스북, 구글, 유튜브 등 디지털 재벌 기업들은 소비자에게 맞춤형 정보를 제공한다고 우쭐해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편향되고 편협한 시야만 확대 재생산할 뿐이라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마찬가지다. “온라인 테크놀로지들은 이용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노출하라고 고백을 독려하면서, 정작 고백하는 사람은 소외시킨다. 테크놀로지가 우리에게 더 넓은 세상만을 열어주고, 더 풍성한 삶을 만들어줄 것이란 생각은 재앙적이다.”

우리에겐 쉼표가 필요하다

마이클 해리스 지음•김승진 옮김

현암사 발행•336쪽•1만 6,000원

디지털 라이프의 폐해를 충분히 체감한 저자는 꼬박 한 달간 ‘디지털 금욕’을 해 보기로한다. 인터넷도 끊고 휴대폰도 없애고, SNS 계정도 들여다보지 않는 아날로그적 삶을 산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디지털 문명의 유혹을 참아내기가 쉬울 리 없다. 저자가 매일 기록한 일기는 디지털 금단 증상을 극복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보여 준다.

“8월 1일. 모든 것의 ‘느으으으으림’이 미치게 한다. 5분마다 내 뇌는 부족한 정보나 이미지를 찾으라고 요구한다. 8월 2일 (휴대폰이 없으니) 영수증에 찍힌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물건을 계속 샀다. 결국 손목시계를 샀다. 8월 8일. 밤새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 완벽한 메일을 쓰는 꿈을 꿨다. 8월 21일. 우체부를 기다리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 광고 전단지가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한 달 뒤 일상으로 복귀하자마자, 저자는 또다시 수백 개의 이메일을 부랴부랴 확인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디지털 금욕 실험은 실패했다고 인정한다. “어차피 돈과 일, 사적 관계와 공적 관계가 연결돼 있는 사회에서 디지털 금욕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절대적인 거부는 또 다른 종류의 의존일 뿐이다.”

저자는 대신 일상 속에서 ‘여백’의 순간을 그때그때 찾으라고 조언한다. 하던 일을 아주 잠깐이라도 멈추고 생각하거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멍 때리는’ 시간이 저자가 정의한 여백이다. 여백은 디지털 라이프에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의 최후의 무기일 수 있다. 영상 통화가 아니라 직접 만나기, 인터넷 검색 대신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 보기, 실시간 검색어는 가볍게 무시하기. 당장 이 책을 읽는 몇 시간만이라도 휴대폰 꺼두기를 실천해보자. 빈 껍데기 같던 삶의 주인을 문득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