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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누가 더 나쁘냐고 묻거든

입력
2019.03.22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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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몸살을 앓고 있다. 어렵사리 합의된 탄력근로제가 계층대표의 불참으로 본회의 의결이 무산되면서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일부가 전체를 훼손’한다거나 청년, 여성, 비정규직 대표는 ‘중심축이 아닌 보조축’이라는 발언이 논란이 됐다. 두 번의 불참을 결정한 계층대표는 그들대로 소외 노동계층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안임에도 논의 과정에서 배제됐다는 점을 비판했다. 경사노위는 의결구조 변경을 위해 법 개정까지 고려할 태세이고 민주성 후퇴라는 반론이 비등한다. 한편에선 합의의 대의를 저버린 계층대표의 무책임을 나무라고, 다른 한편에선 다 된 합의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경사노위를 무능하다 비난한다.

누가 더 나쁜가. 슬라보이 지제크는 한 칼럼에서 “트럼프와 클린턴 중 누가 더 나쁜가”라는 질문에 대해 스탈린의 말을 빌려 “둘 다 ‘더’ 나쁘다”라고 답했다(‘동의 조작의 위기’, 한겨레신문, 2016.7.28.).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 예비경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와 버니 샌더스가 예상 밖으로 선전하자 이를 두고 공화당은 공화당대로, 민주당은 민주당대로 이들의 성공은 포퓰리즘적 ‘비정상’이며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이를 억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질문은 둘 중 더 나쁜 이를 고르라고 강요하지만, 지제크는 특유의 유머를 담은 비문(非文)의 답으로 물음을 비켜 나간다. 그 대신, 주체적 시민을 포퓰리즘에 포획된 우중(愚衆)으로 매도하고 민주주의를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는 주류 정당의 행태를 새롭게 질문에 부침으로써,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는 주범은 다름 아닌 엘리트 주의에 빠진 주류 정당 자신임을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선택지를 제한하는 질문은 강요다. 그렇기에 물음의 배후와 너머를 고려하지 못하면 어떤 답도 질문자의 의도에 포획되고 만다. 너무 에둘러 왔나 보다. 본회의 의결 무산을 둘러싼 책임이 계층대표와 경사노위 중 누구에게 더 큰가라는 질문은 이런 유형의 강요다. 사회적 대화의 발전을 기원하는 사람이라면 지제크식 위트를 섞어 “둘 다 더 나쁘다”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양측을 비난하는 게 아니다. 각각이 그럴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아쉬워하는 답이다.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을 함께 찾자는 제언이기도 하다. 이 폐쇄형 질문을 누가 하고 있는지에 주목하면, 비로소 정말 나쁜 사람이 드러난다. 보수언론은 둘 간의 공방을 대비하며 누가 더 잘못했는지를 은근하고도 끈질기게 묻는다. 이를 통해 사회적 대화의 기저를 흔들려는 그들의 속셈을 관철시키려 든다. 느닷없이 경사노위 해체론을 들고 나온 자유한국당은 어설프기도 하거니와, 대놓고 자신의 속셈을 드러내는 그 적나라함이 측은하기까지 하다. 이들이 정말 나쁜 이다.

새로 출범한지 반년도 채 안 되는 경사노위가 한 번의 의결 무산 때문에 해체돼야 한다면, 수두룩한 민생 법안을 쌓아두고도 매번 공전했던 국회는 여러 번 해산해야 했을 것이다. 우리의 대의민주제가 다양한 계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데 허점이 많은 만큼 산업민주제에 기반을 둔 사회적 대화로 보완돼야 한다. 민주주의는 참 어려운 제도임에 틀림없다. 때로는 효율성을 희생하면서라도 근본 원칙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 원칙은 일부의 위상을 전체의 그것과 차별하지 않으며 중심과 보조(혹은 주변)를 대립시키지 않는 것이다. 중심을 추구하면 기득세력이 출현할 것이고 일부를 부정하면 전체주의 위험에 빠져든다. 주류 중심 사고를 경계해야 한다. 그렇기에 더디 갈 수 밖에 없는 게 어쩌면 민주주의의 기본 값일지 모른다. 의결구조 개편은 신중해야 한다. 경사노위는 원칙을 흔들지 말고 과정상의 곤란을 대범하게 끌어안고 나아가길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나쁜 이들의 의도에 꼼짝없이 말려들지 모른다.

신은종 단국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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