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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 노포기행] 수천 번의 두들김이 만든 ‘인고의 그릇’ 방짜유기

입력
2019.03.23 14:00
수정
2019.03.23 15:3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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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함양방짜유기촌 이점식 촌장

경남 함양군 서하면 송계리에 위치한 함양방짜유기촌. 함양=전혜원 기자
경남 함양군 서하면 송계리에 위치한 함양방짜유기촌. 함양=전혜원 기자

전통 방짜유기의 본고장임을 알리는 경남 함양군 서하면 송계리 ‘함양징터’ 기념비 맞은편에 터를 잡은 함양방짜유기촌. 고아복 이후 30여개 유기공방이 성업하며 1970년대까지도 10여개의 방짜유기 공방이 유기촌을 이루며 전국적 명성을 떨쳤던 이곳에 적막을 깨고 망치질 소리가 다시 메아리 치고 있다.

옛 함양방짜유기의 명맥을 잇기 위해 30여년의 타향살이를 접고 유년시절 옛 공방터로 돌아 온 경남도무형문화재 제44호 함양방짜유기장 이점식(61) 장인의 ‘방짜 울림’이다.

19일 오전 9시 198㎡ 남짓한 유기공방에선 이 촌장과 5명의 교육생이 섭씨 1,000도를 넘나드는 화덕 앞으로 연장을 들고 모여들었다. 한 달에 한 번 부분적으로 연마해 온 기술을 점검하며 전통방식의 방짜유기를 제작하기 위해서다.

숯을 가득 품은 화덕에 불을 댕기자 숯더미에서 ‘탁탁’ 소리와 함께 시뻘건 불길을 뿜어내며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불길 사이로 도가니에서 구리와 주석을 78대 22로 합금해 녹인 쇳물로 만든 둥근 놋쇠덩이가 달궈지고, 벌겋게 달궈진 놋쇠덩이에 망치질(메질)을 하는 작업이 수없이 반복됐다. 거무스레한 놋쇠덩어리는 혼을 불어 넣는 수천 번의 두들김 작업 끝에 비로소 놋쇠 특유의 황금빛 광택을 뿜어냈다.

경남도무형문화재 44호 함양방짜유기장인 이점식 장인이 19일 오전 경남 함양군 서하면 송계리 함양방짜유기촌 내 공방에서 화덕에 불을 붙여 쇠를 녹이고 있다. 함양=전혜원 기자
경남도무형문화재 44호 함양방짜유기장인 이점식 장인이 19일 오전 경남 함양군 서하면 송계리 함양방짜유기촌 내 공방에서 화덕에 불을 붙여 쇠를 녹이고 있다. 함양=전혜원 기자

이 같은 과정에는 족히 8∼9시간이 걸리고, 작업을 진두지휘 하는 대정(대장장이)과 불을 지피는 불메꾼, 망치질을 하는 메질꾼 등 6명이 한 조가 돼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한다. 이 촌장은 “11명이 한 조를 이루는 북한식 방짜유기 제작과 달리 남한식은 6명이 한 조를 이룬다”고 귀띔했다.

방짜의 특징인 두들김은 이 촌장의 ‘허이~허이’하는 기합소리에 맞춰 3명의 메질꾼들이 마치 자동화된 기계처럼 일정 간격으로 망치질을 이어갔다. 2장의 놋쇠를 달구고 메질을 가하는 작업은 2시간여 동안 쉼 없이 반복됐다.

비로소 둥그스름하고 납작한 형태를 띤 2장의 놋쇠를 겹쳐 놓고 메질(우김질)을 한 뒤 겹쳐 놓은 놋쇠를 떼어(냄질)내 제품에 맞게 두들겨 가며 모양을 잡는 작업(싸개질)과 부질(제품의 형태를 세세한 부분까지 완성), 담금질(강도를 높이기 위해 가열하고 급랭), 벼름질(담금질 과정에서 발생한 변형을 바로 잡음), 가질(산화피막을 제거해 금속 고유의 색을 내도록 함), 연마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방짜유기 양푼이 탄생했다.

경남도무형문화재 44호 함양방짜유기장인 이점식 장인이 19일 오전 경남 함양군 서하면 송계리 함양방짜유기촌 내 공방에서 교육생들에게 달궈진 쇠를 얇게 펴는 네핌질 작업을 가르치고 있다. 함양=전혜원 기자
경남도무형문화재 44호 함양방짜유기장인 이점식 장인이 19일 오전 경남 함양군 서하면 송계리 함양방짜유기촌 내 공방에서 교육생들에게 달궈진 쇠를 얇게 펴는 네핌질 작업을 가르치고 있다. 함양=전혜원 기자

보잘것없는 쇳덩이가 이 촌장 등 6명의 손길을 거치며 황금색 ‘생명의 그릇’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처럼 방짜유기는 정형화된 틀에 넣어 만드는 주물유기와 달리 합금된 놋쇠를 불에 달구어 메질을 되풀이 해 얇게 늘여가며 서서히 형태를 잡아가는 기법이기 때문에 ‘인고의 그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이 촌장이 교육생들에게 유독 인내심을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촌장은 “몸도 마음도 힘든 전통방식의 방짜유기 제작 과정이지만 제가 아니면 기술을 지켜 나갈 사람이 없다는 사명감과 절박함에서 방짜유기촌을 열었다”면서 “하지만 힘들다는 이유로 전통 방짜 기술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없는데다 전통기법이 사라지고 기계로 찍어내는 유기만 남을까 하는 걱정에서 전통공방과 현대식공장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술을 배운 교육생들이 유기촌에 취직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방짜유기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명소로 만들겠다는 게 이 촌장의 복안이다.

총 9,917㎡ 규모의 방짜유기촌에는 4개동의 현대식 공장이 있고, 교육생과 직원을 위한 기숙사도 별도로 마련했다. 징과 세숫대야 등은 전통공방, 최근 방짜유기의 효용성이 알려지면서 생활유기로 각광받고 있는 수저 세트와 식기 등은 현대식 공장에서 제작하고 있다.

공장이라 해서 전적으로 기계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일련의 작업 과정은 기계의 힘을 빌리고 여기에 방짜 특유의 두들김을 통해 놋그릇을 만드는 것이다. 합금과 쇳물을 녹이는 작업, 마지막 가질과 연마 등에는 어김없이 장인의 섬세한 손길이 더해진다.

이곳에는 6명의 교육생이 전통 방짜 기술을 연마하고 있으며, 공장에는 1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교육생 중에는 이 대표의 두 아들도 포함돼 있다. 큰아들은 군대를 제대한 뒤 복학을 포기하고, 둘째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방짜유기 전수에 값진 땀방울을 쏟고 있다.

전수 9년 차 큰 아들 창훈(31)씨는 “불안감과 두려움도 없지 않았지만 방짜유기에 평생을 바친 아버지의 기술을 전수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아버지의 권유를 선뜻 받아들였다”며 “동생(28)과 함께 부지런히 기술을 닦아 전통 방짜유기에 현대 디자인을 입히는 생활유기를 만들고 싶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두 아들은 “아직도 배울게 너무 많고, 갈 길이 멀다”며 ‘방짜장인’ 외길을 걷고 있는 아버지이자 스승인 이 촌장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19일 오전 경남 함양군 서하면 송계리 함양방짜유기촌 앞에서 경남도무형문화재 제44호 함양방짜유기장 이점식(가운데) 장인과 그에게 기술을 전수받고 있는 큰 아들 창훈(맨 오른쪽)씨, 작은 아들 상운씨가 손을 맞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함양=전혜원 기자
19일 오전 경남 함양군 서하면 송계리 함양방짜유기촌 앞에서 경남도무형문화재 제44호 함양방짜유기장 이점식(가운데) 장인과 그에게 기술을 전수받고 있는 큰 아들 창훈(맨 오른쪽)씨, 작은 아들 상운씨가 손을 맞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함양=전혜원 기자

3부자 공방은 자연스레 3대(代) 방짜공방으로 이어졌다. 이 촌장 역시 경남도무형문화재 제14호 징장 이용구(83) 선생의 큰아들로 방짜에 입문했기 때문이다. 두 부자(父子)는 보기 드물게 부자가 방짜징과 방짜유기로 나란히 경남도무형문화재 보유자에 이름을 올렸다. 여기에 이 촌장의 세 동생도 모두 방짜 장인의 길을 걷고 있어, 방짜유기는 5부자에 이어 3대에 걸친 가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촌장의 부친은 여덟 살 때 ‘함양징’의 명장 오덕수(1978년 작고) 선생 휘하에 머슴으로 들어가 방짜 기술을 배우기 시작, 서른두 살 때 지금의 유기촌터에 징점을 열었으나 1970년대 들어 사양길로 접어들며 유기 공방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자 고향을 떠났다.

중학교를 갓 졸업한 이 촌장은 부친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 본격 방짜 기술 연마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서울에서도 방짜 공방을 운영했지만 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했습니다.”

이 촌장 일가는 1985년 고향으로 바로 돌아오지 못하고 인근 거창에서 ‘5부자 징집’을 차려 공방을 열었다. 이후 이 촌장은 부친으로부터 독립해 부친의 바람이자 자신의 꿈이기도 한 서하면 송계리 옛 꽃부리(송계리의 옛 지명)징터에 둥지를 틀었다.

돌고 돌아 오매불망 그리던 이 촌장의 귀향 과정은 녹록하지 않았다. 39년 만에 돌아온 고향 공방터는 콩밭으로 변해 땅을 사기 위해 지주를 찾아 읍소하고, 함양군청을 찾아 함양방짜유기촌 건립 계획을 설명하고 행정적 지원도 요청했다.

귀향 이듬해인 2013년 전통공방을 차린 뒤 지금의 유기촌을 완성하기까지 꼬박 5년이 걸렸다. 2017년 드디어 꿈에 그리던 함양방짜유기촌이 제 모습을 찾은 것이다.

군복무(3년)와 외국에서의 건설 근로자 근무(1년)를 제외한 40여년 한길을 걷고 있는 이 촌장은 무형문화재 보유자에 만족하지 않고, 방짜기술 전수를 위한 전문 전수관과 체험관, 방짜유기 전시관을 마련해 함양 방짜유기의 옛 명성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불사르고 있다. 이 촌장의 꿈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꼬박 3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징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함양군도 이 촌장의 ‘함양 꽃부리징’ 복원에 적극 힘을 보태기로 했다.

이 촌장은 “방짜유기가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게 제 마지막 남은 꿈 입니다”라고 말했다.

함양=이동렬기자 d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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