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성호에 대한 다산의 평가 
이가환이 1801년 천주교 문제로 사형 당하자 이삼환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제문. 천주교를 반대했지만 이가환은 한 시대의 천재였다. 이삼환의 제문에는 그 슬픔이 담겨 있다. 안산 성호기념관 제공
 
 ‘서암강학기’ 참석자 명단에 누락된 이승훈 

한편 ‘서암강학기’에 실린 13명의 참석자 명단에는 빠진 한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훈이 바로 그다. 이승훈은 모든 천주교 관련 사건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당시 다산과 함께 주문모 신부 실포(失捕) 사건에 연루되어 예산에 귀양 와 있었다.

다산은 문집 중에서 개인적으로 얽힌 글에서는 이승훈의 이름을 직접 호명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시문 속에서 그는 늘 ‘이형(李兄)’으로만 불렸다. 다산시문집과 일기 속의 이형은 예외 없이 이승훈을 가리킨다. 다산시문집 DB에서 ‘이형’이라고 쳐서 얻은 검색 결과는 모두 이승훈이라는 뜻이다. 이승훈의 이름을 지운 것은 1801년 그가 천주교 신앙문제로 처형당했기 때문이다. ‘서암강학기’에도 마땅히 그의 이름이 들어갔어야 하는데, 훗날 편집 과정에서 삭제되었다. 그 근거는 이렇다.

금정으로 내려올 때 다산은 7월 28일 진위(振威)의 갈원(葛院)에서 이승훈과 함께 하루 밤을 잤다. 둘은 이 때 유배와 좌천의 기간 중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성호 저서 정리 작업을 두 사람이 주도해 천주교를 벗어났다는 징표를 확실하게 인정받자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금정으로 내려오려고 서울을 떠나기 직전 찾아가 만났던 채제공 이가환 등과 상의한 일일 것이다.

다산은 ‘목재 선생께 올림(上木齋書)’ 제 1신에서 “성호 선생의 문집을 정리하는 작업은 간간이 이형과 상의하시는지요? 혹 근처 조용한 절에서 모이기로 약속해 주신다면 더욱 족히 머무르며 모시는 기쁨을 누리겠습니다”라고 썼다. 세 번째 편지에서는 온양의 석암사(石庵寺), 즉 봉곡사에 대해 말하면서, “이곳에서는 약간 멀어도 몇몇 벗들에게는 아주 가깝고, 또 이형에게 아주 가깝지는 않지만, 계시는 곳에서는 또한 50리에 불과합니다”라고 했다. 이승훈이 이삼환과 접촉해서 문집 정리 작업의 주선과 진행을 맡고 있었고, 장소를 처음 내원의 사찰에서 봉곡사로 옮길 때도 이승훈의 거처에서 그곳까지의 접근 거리를 말했다. 이승훈은 봉곡사 모임에 다산과 함께 발의자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던 것이 분명하다.

또 ‘목재 선생께 올림’ 제 4신에서 “어제 이형이 알려온 일로 한바탕 웃었습니다. 무릇 천하의 모든 일을 나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까지 순수하게 찬탄하게 만든 뒤에 손을 댈 수 있게 한다면, 죽을 때까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봉곡사에서의 교정 작업이 끝난 뒤에도 뒷담화와 비방 여론이 수그러들지 않았고, 이 때문에 이삼환은 계속 난감한 상황에 놓였다. 위 편지는 그 소식을 이승훈의 편지를 통해 알고 나서 위로 차 보낸 것이다.

 이승훈과 주고 받은 편지 

다산과 이승훈도 금정 시절 편지가 자주 오갔다. 1795년 11월 27일에 다산이 보낸 ‘만계에게 답함(答蔓溪)’ 제 1신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광주(光州)의 일은 짖어대는 무리이니 대꾸할 것도 없습니다. 하물며 지목하여 부추긴 자가 뻔하고 보니 다만 그의 죄과만 보태지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편안한 상태로 수고로운 저들을 기다려야 합니다.(중략) 자화(子和) 이치훈(李致薰)이 성실하게 채집하고 탐문하기를 부지런히 하고 있는 줄은 소식을 들어 잘 알고 있지만, 도움이 못 되고 그저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게 할 뿐입니다. 온양의 물론(物論)은 놀라거나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무릇 헐뜯고 비방하는 것은 흔히 제 스스로 선동하는 데서 나온 것이 많습니다. 음험하고 불량한 사람이 어쩌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유언비어를 만든다 해도 그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아 잊어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를 듣고서 다른 사람에게 변명하고 해명한다면 한 사람이 두 사람에게 전하고, 두 사람이 백 사람 천 사람에게 전할 터이니 어리석지 않겠습니까?”

온양의 물론(物論)이란 온양 봉곡사에서 진행된 교정작업에 대한 비방 여론을 가리킨다. 이승훈의 동생 이치훈은 여전히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정보를 염탐해서 시시각각으로 유배지의 형 이승훈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다산은 비방에 대처하는 방법은 무대응이라고 말했다. 다산은 해배 후에 쓴 ‘만계에게 보냄(與蔓溪)’에서도 “게다가 놀란 물결과 날리는 모래가 여태도 가라앉지 않아, 이따금 마음을 어지럽히고 눈썹을 찌푸리게 하는 얘기가 이따금씩 귀에 들어옵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당시 다산과 이승훈의 행보를 두고 남인 내부에서 비난 여론이 높았던 사정을 한 번 더 가늠케 된다.

다산은 진행 경비를 자기가 모두 전담하면서까지 성호 저술의 교정 작업을 주도했음에도, 오히려 그 때문에 흉흉한 비방이 그치지 않고 일어났다. 그것은 교정 작업의 본래 의도가 순수하지 않고, 자신의 면죄부를 받기 위해 성호의 저술을 이용한 것이며, 이삼환 등이 이를 알면서도 부화뇌동해서 다산에게 놀아났다는 남인 내부의 끊이지 않는 구설과 음해에 따른 것이었다.

1791년 진산 사건 당시 이승훈 형제와 다산은 일처리 방식을 두고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함께 유배지에 내려와 주고받은 편지로 볼 때 둘의 관계는 이때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다산은 전면에 나서서 작업의 진행을 진두지휘 했고, 이승훈은 이면에서 이삼환과 조율하는 작업을 맡았다.

성호 이익의 '논어질서' 첫면. 다산은 이삼환을 좌장으로 모시고 성호 이익의 '가례질서' 초고 편집 작업을 마무리 했지만, '성호사설'에 혹평을 내릴 정도로 애초에 성호의 학문 체계에 부정적이었다. 안산 성호기념관 제공
 성호의 학문에 대한 다산의 평가 

다산은 이삼환을 좌장으로 모시고 성호의 ‘가례질서(家禮疾書)’의 초고 편집 작업을 마무리했지만, 애초에 성호 이익의 학문 체계에 대해서는 얼마간 부정적인 생각이 강했다. 그것은 강진 유배기인 1811년 겨울에 흑산도의 둘째 형 정약전에게 보낸 ‘둘째 형님에게(上仲氏)’ 속에 자세하다. 조금 길지만 그대로 옮긴다.

“성옹(星翁)의 문자는 거의 1백 권에 가깝습니다. 혼자 생각해보니 우리가 능히 천지의 큼과 일월의 밝음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이 노인의 힘입니다. 그가 남긴 글을 산정(刪定)하여 책으로 만드는 것은 책임이 제게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돌아갈 기약이 없는데, 후량(侯良) 이재남(李載南)은 서로 연락조차 하려들지 않으니 장차 어찌한답니까? ‘성호사설’은 지금의 소견으로 마음대로 산삭(刪削)하게 한다면 ‘서경’의 ‘무성(武成)’과 똑같을까 걱정입니다. 한 면당 10행 20자로 쓸 경우 7,8책을 넘기지 않고 알맞게 마칠 수 있을 듯합니다. ‘질서’ 또한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예전 ‘주역사전(周易四箋)’을 엮을 당시 ‘주역질서’를 가져다 보니 또한 어쩔 수 없이 채록한 것이 많더군요. 만약 간추려서 적는다면 겨우 서너장을 얻을 만 합니다. 다른 경전에 관한 ‘질서’는 틀림없이 이보다 열 배쯤 될 겝니다. 다만 ‘예식(禮式)’의 경우 너무 간소한 데서 잃었을 뿐 아니라, 지금 풍속에도 어긋나고 옛 예법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 이루 셀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이 책을 널리 퍼뜨려 식자의 안목 속에 들어가게 한다면 대단히 미안한 노릇일 터인데 이 일을 장차 어찌 합니까?”

대단히 놀라운 혹평이 아닐 수 없다. ‘무성’편과 똑같다는 말은 맹자가 ‘맹자’ ‘진심’장에서 “나는 무성편에서 두 세 가지 정도만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고 한 데서 끌어다 쓴 말이다. ‘성호사설’이 열에 두 셋 정도만 믿을 만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또 책 한 권에서 서너 장 겨우 건질 수 있겠다 하거나, 아예 통째로 폐기해야 한다고 까지 말했다. 이런 책이 안목 있는 사람의 눈에 들어가면 그 망신을 어찌 하겠느냐고 까지 말했다. 글 속에 나오는 후량은 성호 이익의 증손자인 이재남(李載南, 1755~1835)을 가리킨다. 다산은 자신보다 7살 더 많은 이재남에게 편지를 보내 ‘성호전서’를 깎아내고 정리하는 작업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재남은 다산의 무례한 태도에 격분해서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다산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삼환의 종질 이재적(李載績)과 이기양(李基讓)의 아들 이총억(李寵億)에게도 편지를 부쳐 그 가정 문자, 즉 집안에 남은 성호와 이삼환의 저술을 수습하는 방안을 얘기했지만, 그 또한 답장을 받지 못했다. 다산은 화가 나서 “그 용렬하고 잔약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고 탄식하다가 아예 가련한 인생이라고까지 매도해 버렸다. 다산의 각진 성정의 한 자락이 드러나 보인다.

다산의 이같이 과격한 편지에 정약전은 이렇게 답장했다. “성옹(星翁)의 문자를 산정하고자 한다면 진실로 말한 바와 같을 것이네. 하지만 이재남 등 여러 사람은 틀림없이 크게 경악하고 괴이하게 여길 걸세. 그저 그 집안에만 전할 수 있을 뿐이겠지. 하지만 경제에 관한 여러 글은 조정의 계책에 크게 보탬이 있는 내용이라 너무 간략해서는 안 될 것이야.” 정약전이 다산에게 보낸 답장 13통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된 ‘여유속집(與猶續集)’ 25책 중 제 4책에 수록된 다산의 편지 끝에 나란히 실려 있다. ‘여유당전서’ 편찬 당시 다산의 글이 아니라 하여 정약전의 편지를 모두 삭제해 버리는 통에 이 편지들은 그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다산의 편지를 받아든 성호의 증손자 이재남 등이 격분해서 펄펄 뛰었을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제가 뭐라고 대학자 성호 선생의 글을 깎아 내야 한다느니 정리해야 한다느니 건방지게 떠들어댄단 말인가. 그래도 다산은 그것만이 진정으로 성호를 위하는 길이라고 믿어 자신의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이렇듯 성호의 학문에 대한 다산의 실제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성호는 남인들에게 태산교악(泰山喬嶽)과도 같이 우뚝한 큰 학자임에 분명했지만, 다산의 안목에는 산만하고 체계가 잡히지 않은 성호의 저술이 반눈에도 차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산은 머뭇거리는 이삼환을 재촉하고, 빈정대고 거부하는 내포 지역 남인들을 으르고 달래, 일체 비용을 직접 부담하면서까지 서암강학회를 밀어 붙어 성사시켰다. 정조와 채제공의 특별한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당시 다산은 절박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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