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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홀대받는 무(武)의 상징, 삼군부 건물

입력
2019.03.19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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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선열들의 국가 주권 회복 의지와 국권 침탈의 아픔이 되새겨지고 있다. 그렇지만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짓뭉겨진 조선의 국방력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높지 않다.

일제는 조선을 침략하면서 국가의 마지막 버팀목인 무를 철저하게 해체했다. 1907년 정미 7조약의 비밀 조치로 군대를 해산했다. 구한말 군인이 참가한 항일 무장투쟁이 전개되자, 잔혹한 토벌작전을 벌였다. 일제는 한일합방 이후에도 왕실 호위 명목으로 명맥만 남은 조선보병대를 순종 황제가 승하한 이후 이마저도 철폐했다. 1931년 4월 8일이었다. 민족의 무인 기관은 독립운동이 벌어지는 해외에서나 찾을 수 있었다.

조선의 무에 대한 일제의 능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선 무인들의 최고 기관인 삼군부의 건물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삼군부 가운데 주 건물인 총무당을 당시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성 밖 골짜기로 이전시켰다. 총무당 건물은 지금도 서울 성북동의 음지에서 스산한 바람을 맞으며 놓여있다.

조선시대 말기 무인 최고기관은, 문인의 최고기관이 의정부였듯이, 삼군부였다. 의정부와 삼군부는 양반의 최고 서열로 왕권을 보좌했다. 건물 위치 형태도 경복궁에서 바라보면 육조거리 왼편 맨앞에 의정부 건물이 있었고, 오른편 맨 앞(오늘날 서울 정부종합청사)에는 삼군부 건물이 있었다. 따라서 삼군부 건물은 민족 군사주권(병권)의 상징이었다.

그렇지만 삼군부 건물은 해방 이후에도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무시당하고 있는 측면이 있었다. 삼군부 총무당의 부속 건물인 청헌당은 1967년 정부종합청사 건립을 이유로 육군 공병단에 의해 태릉 육군사관학교 경내로 옮겨졌다. 이것은 그나마 나은 대접이었다. 다른 부속 건물인 덕의당은 서울 종로3가 단성사 부근으로 옮겨졌지만,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삼군부 정문도 필동 ‘한국의 집’의 정문으로 전용되었다가 10년 전에 철거돼 사라졌다.

오늘날 삼군부 건물의 홀대 상태를 감안하면, 국방부는 삼군부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결과적으로 간과했다는 비난을 받을 만하다. 삼군부 건물의 보존 안건이 제기될 때에 담당 장교는 귀찮다는 감정을 서슴없이 내뱉은 적도 있었다. 상부에서부터 서로가 책임을 회피한 결과이다. 군인을 우대한다는 소위 보수 정권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총무당 건물을 과거의 부지로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옮기려 한다면 국방부 혹은 전쟁기념관 내 부지, 국방부에 인접해 반환되는 용산 미군기지 부지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군 용산 기지가 서울시에 반환되더라도 연합사령부 건물은 그대로 보존된다고 한다. 연합사령부 건물 보존에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총무당 건물을 모른 체한다면 민족적 수치에 가깝다.

총무당 건물은 바닥면적 238㎡(72평)짜리 대형 건물이다. 중국은 청나라 시절의 건물에서 국제회의를 개최해 자신들의 오래된 역사를 은근히 자랑한다. 총무당 건물에서 국방 관련 국제회의를 상상하는 꿈은 지나친 것일까? 근본적으로, 독립 국가에서 살아가는 후손들은 일제의 잔학 행위를 복원시켜야 하는 의무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무인들은 자신들의 뿌리찾기에 좀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본다.

김성걸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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