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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사 취업이라더니... “도망치면 부모 해코지” 보이스피싱 덫에 걸리다

입력
2019.03.19 04:40
수정
2020.01.14 16:29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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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범죄, 당신을 노린다] <3> 중국 옌지 ‘보이스피싱’ 조직원 감금 사건

※사기를 포함한 지능범죄는 정보기술(IT)의 발달과 함께 더욱 고도화하고 있습니다. 일확천금의 미끼에 낚이는 순간, 당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지능범죄 시리즈는 매주 화요일 그 덫을 피해가는 지혜까지 전해드립니다. 

중국 옌지 보이스피싱 조직원 감금사건 개요. 강준구 기자
중국 옌지 보이스피싱 조직원 감금사건 개요. 강준구 기자

“편의점 알바? 야, 그렇게 벌어서 언제 돈 모을래?”

운전대를 잡은 친구 손목이 ‘번쩍’ 빛났다. 수백만 원부터 시작한다던 명품시계였다. 박승훈(21ㆍ가명)씨는 짐짓 놀리는 척 물었다. “그거 진짜냐?” 무슨 그런 질문이 다 있냐는 듯, 껄껄껄 웃음 소리가 대답의 전부였다. 오랜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의 모습은 낯설었다. 근사한 차를 몰고 와서는 명품 가방을 뒤적이는데 그 가방 안엔 척 보기에도 현찰만 수백만 원이 들어 있었다. 중고 휴대폰 판다던 녀석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

◇”제대로 된 일 해볼래?”

그에 비해 승훈씨는 열심히 살았으나 여전히 불안한 청춘이었다. 주변엔 ‘취준생(취업준비생)’이라는 이름의 ‘백수’ 형ㆍ누나들이 즐비했다. 승훈씨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또 열심히 뛰어야 했다. 주중엔 학점을 챙기고 자격증을 땄다. 주말엔 편의점에서 일해 월 50만원을 벌었다. 그런 승훈씨에게 중학교 동창은 그러지 말고 ‘제대로 된 일’을 해보라 권했다.

“우리 누나 남자친구가 중국 옌지에서 큰 여행사를 하는데 거기 사람이 좀 필요하대. 직원이 조선족이라 한국말을 잘 못하니까 진짜 한국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야.” 중국이라면 상하이나 베이징 정도만 알았지 ‘옌지(延吉)’는 낯설었다. 여행사업이 잘 되나 보다 넘어가려는데 동창은 결정적 한마디를 했다. “한 달에 기본 500만원에서 600만원 정도 받고, 일단 딱 3개월만 일하는 조건으로. 어때?” 콜센터 직원처럼 앉아서 준비된 답만 제대로 잘 하면 된다고 했다.

석 달에 1,500만원? 솔깃했다. 하지만 하는 일치곤 돈이 너무 많다 싶기도 했다. 그 생각을 읽었는지 동창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옌지가 북한과 가깝고, 조선족도 많아서 위험하다고 한국 사람들이 잘 안 가려고 해서 그래. 일종의 ‘위험수당’인 거지.” 열흘을 고민하다 옌지행을 결정했다. 부모님도 ‘사회생활 미리 경험해 보는 셈’치고 다녀오라고 했다.

일단 결정하자 불안감은 날아갔다. 출발 준비랄 것도 없었다. 비행편, 비자 등 모든 준비를 알아서 해준다 했다. 영어도 배우고 돈도 번다는 ‘워킹 홀리데이’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철컹’ 닫힌 철문 … 욕설과 구타, 협박

마침내 비행기에 오르는 출발일 아침, 동창은 전화를 걸어왔다. 급한 일이 생겨 내일 아침 비행기로 따라 가겠다는 연락이었다. 그러겠거니 했던 승훈씨는 옌지 공항에 내려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불안해졌다. 도심을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는 인적이 드문, 외진 곳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봐도 관광객들이 오갈만한 곳은 아니었다.

외딴 시골 마을의 낡고 오래된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승훈씨 등 뒤로 ‘철컹’ 철문이 닫혔다. 자욱한 담배 연기 사이로 한 사내가 나타났다. “여권이랑 휴대폰부터 내놓고. 이제부터 네가 할 업무는 보이스피싱이다.” 그 사내는 벌벌 떨며 뒷걸음질치는 승훈씨의 뺨을 호되게 올려 붙였다. “비자에다 비행기값, 네 몫의 유선전화기 설치비까지 해서 일단 1,000만원이야. 토해내지 못하면 못 가. 당장 일부터 해.” 그 사내가 바로 사장 윤모(29)씨였다.

둘러보니 50평 남짓 사무실엔 10명 정도의 직원들이 전화기 앞에 바싹 붙어 앉아 자신을 ‘OO은행의 아무개 대리’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대부분 20대 초반의 앳된 얼굴이었다. 가만히 보니 그 가운데 3명은 같은 동네에서 오가며 마주쳤던 동갑내기들이었지만 모두 가명을 쓰고 있었다. 동창의 짓이었다. 건물은 출입이 완전히 차단된 감옥이었고 창문은 비닐 커버가 덧씌워져 외부의 시선과 차단됐다.

윤씨는 “돈만 생각하라”며 죽여버리겠다는 둥 온갖 협박을 했다. 승훈씨는 매일 새벽 4시까지 ‘팀장’이라 불리는 사무실 관리자에게 맞아가며 ‘대본’을 외웠다. 겨우 3~4시간 정도 쪽잠만 잤다. 상담원과 피해자 역할을 바꿔가며 철저하게 대본 연습을 했다. 직원들도 서로를 대략은 알아보는 눈치였지만 협박과 폭행 때문에 아무도 서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욕설, 구타는 일상이었고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쇠파이프가 날아다니는 단체기합이 주어졌다. 식사는 그저 허기만 면할 정도였다. 팀장이 일주일에 한번, 싸구려 식재료만 골라 7일치 장을 봐왔다. 그마저도 아침은 주지 않았다.

가족과의 통화는 일주일에 딱 한번 할 수 있었다. 한국에 있는 가족이 ‘실종신고’라도 하면 골치 아프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통화는 팀장이 보는 앞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말만 할 수 있었다. 다들 울컥 눈물이 치솟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잘 지낸다고만 했다.

◇보이스피싱계의 전설, 윤씨

윤씨의 보이스피싱은 금융기관을 사칭해 대출금을 빼돌리는 ‘대출 빙자형’이었다. 목돈이 급한 서민에게 낮은 금리 대출 상품을 미끼로 던지는 방식이다. 중국의 ‘큐큐’나 ‘위챗’ 같은 모바일 메신저로 국내에서 해킹한 대량의 휴대폰 번호와 범행에 이용할 대포통장 계좌를 사들였다.

사기는 3인 1조로, 3단계에 걸쳐 진행된다. 우선 한국의 시중은행을 사칭해 국민행복기금과 같은 저금리 대출 상품을 권유하는 것처럼 상담하며 피해자들의 개인정보를 수집한다. 2단계에선 다른 조직원이 심사팀장인 양 전화를 걸어 “신용이 낮아 대출이 어려우니, 다른 곳에서 대출받고 바로 갚아 상환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고 부추긴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선 피해자가 대출한 금액을 미리 마련한 범행계좌로 송금시키도록 한다. 기존 대출 때문에 힘들어 하던 서민들에게 또 다른 빚을 떠안기는 수법이었다.

윤씨는 ‘보이스피싱 세계의 전설’이었다. 2014년 태국에서 처음 조직원 생활을 시작했다. 전화기를 한번 잡을 때마다 수백, 수천만 원씩 실적을 쌓았다. 1년 만에 범행 수법을 완전히 익힌 윤씨는 중국으로 넘어 가 자신의 조직을 차렸다. 여기서 ‘콜센터’ 조직을 3개나 차렸다. 보이스피싱 업계에 발을 들인지 2년 만에, 20대 중반의 나이에 ‘총책’ 자리에 오른 셈이다. 윤씨와 한 번이라도 같이 일해본 사람들은 “한 번 문 건수는, 절대로 놓치지 않는 프로 중의 프로”라며 혀를 내둘렀다. 윤씨는 천부적 사기꾼이었다.

윤씨의 조직 운영은 혹독했다. 엇비슷한 보이스피싱 조직 가운데 조직원들의 24시간을 통제하며, 주말 외출까지 금지한 건 그의 조직이 유일했다. 도망자들에겐 잔혹했다. 승훈씨는 감금된 지 1주일 만에 탈출하려다 붙잡혔다. 광대뼈가 박살 나도록 두들겨 맞았다. 앞서 2016년엔 비자 문제로 잠시 한국에 갔던 조직원 A(30)씨가 잠적하자, 집요한 추적 끝에 그를 찾아내 모텔에 가두고 야구방망이로 때린 적도 있었다. 남은 사람들에겐 “도망치면 한국으로 조선족을 보내 부모 형제 팔다리를 모두 자를 것”이라 협박했다. 커피 포트에 팔팔 끓인 물을 얼굴에 끼얹는 등 고문도 서슴지 않았다. ‘잡히면 배신한 조직원이 사장이라고 답하라’ ‘도망가면 사람을 시켜서 반드시 죽인다’ 같은 것들이 윤씨가 내린 행동강령이었다.

서울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가 지난해 9월 중국 옌지 보이스피싱 조직으로부터 압수한 유선 전화기. 연합뉴스
서울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가 지난해 9월 중국 옌지 보이스피싱 조직으로부터 압수한 유선 전화기. 연합뉴스

◇목숨 건 탈출,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처벌

승훈씨는 그래서 더 있을 수 없다 생각했다. 한 번 실패했으니 이번에 잡히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 싶었다. 모처럼 회식이라며 팀장까지 술에 취해 잠든 틈을 노려 2층에서 그냥 뛰어내렸다. 인근 고속도로를 지나던 택시의 도움으로 근처 경찰서를 찾았고 중국 공안의 도움으로 겨우 귀국했다. 3주만의 해방이었다.

귀국하자마자 집 근처 경찰서부터 찾았다. 윤씨에게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이름 ‘윤덕영 수사관’을 찾기 위해서였다. 윤씨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몇 년 동안 나를 끈질기게 쫓아온 경찰이 있어. 윤덕영이라고. 언젠가 내가 사람 보내 죽일 거거든.” 그 윤덕영 수사관이라는 사람은 만나자마자 얼굴 사진 하나 대뜸 내밀었다. “그 윤 사장, 이 사람입니까?” 승훈씨는 그 자리에서 윤씨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됐다.

경찰은 승훈씨 진술을 토대로 윤씨의 보이스피싱 조직을 캤다. 서울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1팀 남철안 반장 지휘 아래 중국 공안과 협조해 한국, 중국 내 조직원들 70여명을 잡아들여 57명을 구속했다. 보이스피싱 조직의 거점은 해외에 있어 수사해봐야 인출책 정도나 붙잡는데 그치는 게 보통인데, 이례적으로 핵심 조직원까지 검거하는데 성공했다. 피해자만 312명, 피해규모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56억 원이다.

승훈씨는 만신창이가 됐다. 애초 그를 팔아 넘겼던 중학교 동창은 승훈씨에게 미안해하기는커녕 끝까지 “조선족 시켜서 너 하나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라며 협박해댔다. 동창은 1심에서 사기 혐의로 4년 6개월형을 선고 받았다. 강제로 조직원 생활을 했던 이들도 1심에서 2년 안팎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남철안 반장은 “아무리 폭행이나 감금에 의한 행위라 해도, 범죄에 가담했다는 사실 자체는 성립되기 때문에 처벌을 피해갈 수는 없다”며 “애초에 엮이지 않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적극적인 탈출과 제보, 수사협조 등은 인정받겠지만 승훈씨도 처벌 자체를 피할 수는 없다. 피해자이면서 피의자이기도 한 이들은 대부분 20대 청년이다. 남 반장은 “요즘 취업난이 심하다 보니 해외취업에 눈을 돌리는 젊은이들이 많은데, ‘고수익’을 보장할수록 보이스피싱 조직일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 사건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주범 윤씨가 도주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중국 공안이 붙잡았으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홀연히 사라졌다. 남철안 반장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반드시 따라가 잡을 겁니다. 윤씨를 잡아 한국 법정에 세울 때까지 이 사건은 끝나지 않습니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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