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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야기가 무대에 오른다… 이것은 연극인가 치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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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야기가 무대에 오른다… 이것은 연극인가 치료인가

입력
2019.03.15 04:40
수정
2019.03.18 09:55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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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의 이야기를 즉석에서 공연으로 만드는 '플레이백 시어터' 국내 공연의 한 장면. 연극공간-해ㆍ글항아리 제공
관객의 이야기를 즉석에서 공연으로 만드는 '플레이백 시어터' 국내 공연의 한 장면. 연극공간-해ㆍ글항아리 제공

“우리 모두는 각자 삶의 주인공이다” 너무 많이 사용돼 진부해지기까지 한 이 문장은 커다란 이치를 담고 있다. 우리가 각자 삶의 주인공이라면, 우리 삶은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라는 것. 오늘 아침 출근길 지하철 환풍구에 구두 뒷굽이 끼는 바람에 지각을 한 것도, 어린 시절 무작정 가출을 한 뒤 길거리 한복판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던 것도, 첫사랑과 헤어지며 한강에 눈물을 흩뿌렸던 것도, 모두 ‘삶’이라는 이야기를 장식하는 극적인 장면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이야기에서 태어났다’는 삶은 결국 이야기로 이뤄져 있다는 이치를 연극으로 승화시킨 ‘플레이백 시어터(Playback Theatre)’에 관한 책이다. 보통 사람들의 평범하고 개인적인 이야기야말로 예술적 소재라고 보는 플레이백 시어터는 현장에서 들은 관객의 이야기를 즉석에서 극화해 상연하는 연극 모델을 일컫는다. 책은 플레이백 시어터의 역사와 원리, 형식과 철학을 망라하며 관객을 생생한 연극 무대 한가운데로 안내한다.

플레이백 시어터의 출발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4년 미국 코네티컷주 뉴런던에 살고 있던 작가이자 아마추어 배우, 비정규직 영어강사 조너선 폭스는 아이들을 위한 연극을 올리는 걸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조너선은 경쟁적이고 때로는 자기도취적인 주류 연극에 실망하고 있던 터였다. 그는 2년간 자원 봉사를 하며 머무른 네팔 시골에서 본 아마추어 연극을 떠올린다. 이를 ‘관객으로 모인 사람들의 실제 삶의 이야기에 근거해 배우들이 현장에서 만들어 내는 즉흥 연극’이라는 아이디어로 발전시킨다.

관객의 이야기를 즉석에서 공연으로 만드는 '플레이백 시어터'의 국내 공연의 한 장면. 연극공간-해ㆍ글항아리 제공
관객의 이야기를 즉석에서 공연으로 만드는 '플레이백 시어터'의 국내 공연의 한 장면. 연극공간-해ㆍ글항아리 제공

플레이백 시어터는 현장 관객 중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텔러(Teller)’, 텔러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연을 진행하는 ‘컨덕터(Conductor)’, 텔러의 이야기를 구현하는 배우와 악사, 조명 감독 등이 함께 이끈다. 연극이 시작되면 컨덕터는 관객을 향해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실 분 있나요?” 묻고, 손을 든 텔러를 무대로 불러내 인터뷰한다. 인터뷰에서 뽑아 낸 이야기를 바탕으로 배우들은 연기를 시작한다. 즉석에서 무대 장치를 만들기도 한다. 진행 방식은 ‘사이코 드라마’와 다소 흡사하다.

전문 공연장이 필요한 건 아니다. 교실, 교회, 교도소 구내식당 등 어디든 무대가 될 수 있으며, 학생, 신자, 재소자 모두가 텔러가 될 수 있다. 예컨대 소아과 병동이 공연장이라면, 아픈 아이들의 이야기가 즉석에서 연극이 된다. 공간, 사람, 상황이 바뀔 때마다, 연극은 ‘그 순간에만 존재하며 재공연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연극’이 된다.

우리는 모두 이야기에서 태어났다

조 살라스 지음ㆍ허혜경 옮김

글항아리 발행ㆍ288쪽ㆍ1만 6,000원

책은 플레이백 시어터의 구성과 원리를 소개하지만, 진짜 이야기하는 건 ‘이야기’의 본질과 정수다. 무엇이 이야기가 되는가,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가 필요한가,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치유받는가…. 치유 효능이 있다는 것은 ‘플레이백 시어터’가 종종 받는 질문 중 하나다. “그래서, 연극이야 치료야?” 플레이백 시어터의 공동 창안자이자 책의 저자인 조 살라스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 삶을 이야기로 만들 때 왜 그것은 치유의 기능을 하는가. 가장 절망적이며 고통스러운 경험조차 이야기로 말해질 때 어떤 식으로든 상쇄된다. 우리 경험을 이야기로 직조해낼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겪은 일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플레이백 시어터는 40년에 걸쳐 한국을 비롯한 27개국으로 확산됐고, 현재 세계 곳곳에서 타인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는 배우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을 준비가 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자신의 삶 자체, 또는 삶에서 비롯한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그저 무작위적인 혼돈으로 가득 찬 상황의 희생자가 아니며, 비탄과 무의미의 느낌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세계 속에서 의미 있게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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