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위기에 김정은 뒤통수 친 트럼프
한국엔 주한미군 방위비 3배 인상 압박
조미수호조약 교훈 새기고 실력 키워야

100m 달리기를 하다 결승선을 1m 남겨 놓고 갑자기 멈추더니 뒤로 돌아서면 어떻게 될까. 결렬된 2차 북미 정상회담 이야기다.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지만 가장 큰 내상을 입은 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다. 그는 66시간 3,800㎞의 열차대장정으로 세계의 이목을 끌며 하노이까지 갔지만 결국 빈손으로 돌아서야 했다. 영변 핵시설을 내주고 제재 완화를 끌어낸 뒤 경제 강국의 길로 매진하려던 계획에도 차질이 생겼다. 최고지도자의 영도력에 흠집이 난, 북한 외교의 대참사가 아닐 수 없다.

회담은 미국에 대한 북한의 이해도와 정보력이 어느 수준인지 보여 줬다. 김 위원장은 하노이에 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머릿속이 자신을 탄핵으로 몰아갈 수도 있는 마이클 코언 청문회로 가득 차 있다는 보고는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국내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초강경 노선으로 돌아설 가능성도 점치지 못했다. 그가 미국 신문 1면 톱이 청문회로 도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빅딜’이 아니면 아예 회담을 결렬시켜 스스로 ‘빅뉴스’를 만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엇보다 협상과정에서 배제됐던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돌연 하노이에 등장한 것은 불길한 징조였는데도 이를 간과했다. 북한의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다.

문제는 우리 실력도 북한보다 나을 게 없다는 데 있다. 청와대는 회담 결렬 30분 전까지도 문재인 대통령이 공동선언 서명식을 TV로 시청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회담이 깨지는 상황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물샐틈없는 한미 공조를 자랑했지만 외교망도 정보망도 먹통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에게 귀띔도 안 했다. 코언 청문회가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봄을 한순간에 날려 보낼 것이라곤 감조차 잡지 못했다. 볼턴을 놓친 것도 북한과 매한가지였다. 그는 회담 직전 방한할 예정이었지만 돌연 일정을 취소했다. 이상 신호였는데도 회담 성공에 대한 확신에 들뜬 나머지 미국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결국 신(新)한반도체제도, 평화경제도 모두 어그러졌다.

하노이 회담에서 남북은 모두 미국에 대한 무지와 근거 없는 낙관 탓에 어이없는 일격을 당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남북한의 미국에 대한 착각과 짝사랑이 19세기 말 상황과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이다. 1882년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 1조는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 다른 쪽 정부가 원만한 타결을 주선하도록 돼 있었다. 조선은 이를 미국과의 동맹 체결로 간주했다. 청이나 일본, 러시아가 침입하면 미국이 도와줄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국교 개시에 따른 인사치레 정도로 여겼다. 일제에 강점된 1910년까지 조선과 대한제국의 잇따른 요청을 미국은 한 귀로 흘렸다. 오히려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견제가 된다”며 “일본이 한국을 손에 넣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배경이다.

조미수호통상조약 1조를 오판한 조선처럼 북한도 싱가포르 북미 공동성명 1조(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를 과신하다 뒤통수를 맞았다. 우리도 미국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언제나 우리 편이 돼 줄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분명 은인이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은 국익을 위해 또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한반도는 언제든 버리는 카드로 쓰기도 했던 게 과거 역사다. 미 외교는 국내 정치의 연장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김 위원장의 당혹감이 우리에게도 닥칠 수 있다.

이미 트럼프 대통령은 주한미군 분담금을 1조원에서 3조원으로 올리는 ‘주둔비용+50%’안까지 내놨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을 다 빼겠다며 ‘빅딜 외 다른 길은 없다’고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면 우리도 북한처럼 꼼짝없이 당할 공산이 크다. 미국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조미수호통상조약과 하노이 회담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의 실력부터 키워야 하는 이유다.

박일근 논설위원 ik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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