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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언어번역기] 유승민의 파격과 나경원의 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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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언어번역기] 유승민의 파격과 나경원의 파행

입력
2019.03.13 09:52
수정
2019.03.13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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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한나라당 시절 나란히 최고위원을 지냈던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과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당시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얘기를 나누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1년 한나라당 시절 나란히 최고위원을 지냈던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과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당시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얘기를 나누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은 국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참 지루한 연설이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해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끝나는, 정해진 문법이라도 있는 듯한 말투와 내용 탓이다. 교섭단체 대표연설은 원내정당의 대표 혹은 원내대표가 국회 회기가 시작될 때 회기에 임하는 기조를 천명하는 자리다. 언론도 그 때문에 기사를 쓰긴 하지만, 내용이 재미있기는 쉽지 않다. 이런 건조한 기사를 독자들이 얼마나 읽을까 고민한 적도 있다.

 ◇‘박근혜의 보수’에 반기 든 파격, 유승민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 역시 여당 원내대표였던 2015년 교섭단체 대표연설로 대중에게 확실히 각인됐다. 지난해 11월 유 의원이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에서 특강을 하기 위해 강의실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 역시 여당 원내대표였던 2015년 교섭단체 대표연설로 대중에게 확실히 각인됐다. 지난해 11월 유 의원이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에서 특강을 하기 위해 강의실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눈길을 끌려면 파격이 답이다. 예상을 뛰어넘는 알맹이를 담는 거다. 대표적인 게 2015년 4월 8일 유승민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연설이다.

그는 미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세월호 참사’ 실종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연설을 시작했다. 방청석에선 세월호 가족들이 눈물을 훔치며 지켜봤다. 새누리당의 노선 개혁도 선언했다. 기득권 지향으로 비쳐졌던 과거 보수당의 행태에서 벗어나 “사회의 빈곤층과 약자들에게 노선과 정책의 지향을 두겠다”는 것이다. 그의 보수는 “나누면서 커가는 따뜻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보수”였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발언도 파격이었다. 여당 원내대표인데도, 당시 정부 정책 실정을 비판하기도 했다. 실은 이걸 뛰어 넘어 ‘박근혜의 보수’는 보수가 아니며, 구태의연한 보수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가 보수의 차기 주자로 각인된 것도 그래서다.

여당 원내대표로서 이례적인 연설이었다. 야당에서 되레 박수가 더 크게 나온 이유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에게 ‘배신의 정치’라는 낙인이 찍혀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교섭단체 대표연설로서는 이례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12일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대표연설도 성공이다. 제대로 흥행해서다. 투사 같은 야전사령탑 이미지도 쌓았다.

연설을 뜯어보면, 나 원내대표는 애초 작심한 듯하다. 그 역시 파격을 택하긴 했는데, 내용보다는 포장에 방점을 둔 게 문제다. 문재인 정부가 가장 듣기 싫어할 법한 단어로 채운 것이다. ‘반미종북’, ‘운동권’, ‘위험한 도박’, ‘사회주의’… 그 중에서도 11번이나 등장한 것이 ‘좌파’다. 심지어 ‘좌파독재’라는 표현까지 썼다. 우파가 있으면 좌파가 있는 게 민주사회의 작동 원리지만, 오랫동안 이 나라에서 좌파는 ‘빨갱이’의 순화된 표현이었다. 나 원내대표가 꺼내든 ‘김정은의 수석 대변인’이라는 표현도 좌파, 빨갱이 프레임 덧씌우기의 변주 아니었을까.

 ◇나경원의 ‘작심 연설’, 왜 그랬을까 

1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에 반발한 홍영표 원내대표 등 더불어민주당 원내지도부가 문희상 국회의장에게 항의의 뜻을 전하고 있다. 연합뉴스
1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에 반발한 홍영표 원내대표 등 더불어민주당 원내지도부가 문희상 국회의장에게 항의의 뜻을 전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나 원내대표는 “원고를 잘 보시라”고 했다.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낯뜨거운 이야기를 듣지 않도록 해주십시오”라고 말했지 않느냐는 것이다. 자신이 규정한 말이 아니라는 의미다. 본회의장에서 고성이 난무하며 난리가 나자, 그는 거듭 “외신의 보도 내용”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 외신 보도란, 지난해 9월 26일 ‘블룸버그 통신’의 한국 주재기자가 쓴 기사(South Korea's Moon Becomes Kim Jong Un's Top Spokesman at UNㆍ남한의 문 대통령, 김정은의 수석 대변인이 되다)를 일컫는다. 보도 이후 일부 언론이나, 한국당의 논평에도 이 표현이 등장했다.

나 원내대표는 외신을 인용한 것뿐이라고 해명하지만, 다른 의도가 엿보이는 게 사실이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굳이 이를 빌려 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낙인 효과를 노리고 일부러 말했으리라는 건 아군도, 적군도 다 짐작했을 거다.

4선 의원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나 원내대표가 이런 표현으로 점철된 연설이 파행을 부르리라는 걸 예상 못하진 않았을 터다. 역시나 민주당은 본회의가 끝나자 마자 의원총회를 소집해 국회 윤리위에 나 원내대표를 제소하겠다고 별렀다. 당분간 민주당과 한국당 사이에 대화가 오갈 것 같지도 않다.

어쩌면 나 원내대표는 이것을 바란 게 아닐까. 국회가 파행되고 공전하면 더 답답한 건 여당이다. 책임도 야당보다는 국정의 한 축인 여당에 돌아가기 마련이다. 더구나 여야 4당이 추진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한국당은 반대하고 있다. 안 그래도 지난해 12월 했던 합의를 뒤엎고 싶은데, 국회가 파행된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다.

 ◇‘원고 없는 연설’이 나았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1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면서 열변을 토하고 있다. 연합뉴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1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면서 열변을 토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나 원내대표의 연설 중 정부와 여당이 진짜로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도 있었다. 원고에 없던 연설이다. 민주당에서 “사과해”라는 시위성 항의가 잇따르자 즉석에서 했던 말이다.

“민주당 의원님들 호소합니다. 원내대표 연설을 들어주십시오. 여러분의 의사는 이 의사당 원내대표 연설 끝난 다음에 나가서 마음껏 표현하십시오. 그러나 이 시간은 야당 원내대표에게 주어진 시간입니다. 야당 원내대표의 이야기도 듣지 않겠다는 민주당의 이러한 태도가 이 정권을 오만과 독선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 본회의장은 의회 민주주의의 전당입니다. 이게 선진 의회의 모습입니까. 샤우팅 한다고 여러분들의 의사가 전달되는 거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과하란다고 제가 사과하겠습니까. 저는 이 자리에서 제 원내대표 연설 마칠 때까지 내려갈 수 없습니다. 그 정도의 포용성이 없으니까 이 정권이 힘들어지는 겁니다.”

막말도, 막힘도 없는 웅변이 인상적이었다. 더구나 지지층 내부에서도 조심스레 청와대의 독선과 불통을 걱정하는 얘기가 나오는 처지다. 차리리 연설을 이런 진정 어린 호소로 했더라면 어땠을까.

물론 문희상 국회의장의 말대로, 판단은 국민의 몫이다. 유승민과 나경원의 격이 다른 파격 말이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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