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대통령 선거 때 나는 당시 문재인 후보의 과학기술 특보 중 한 명이었다. ‘특보’라는 말이 주는 어감 때문인지 주위에선 내가 엄청난 감투를 쓴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그저 수많은 과기특보 중 한 명이었고 이메일이나 전화로 한두 번 정책에 대한 의견을 냈을 뿐이었다. 특보로 문재인 후보를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과학자들에게는 지난 노무현 정부 시절의 이른바 황우석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전도유망한 과학자를 국가 차원에서 지원한다는데 반대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여러 층위의 연구윤리를 챙기지 못했고 사후 대처과정도 매끄럽지 못해 과학계를 적잖이 실망시켰다. 인적으로나 정치철학적으로나 노무현 정부를 계승할 수밖에 없는 문재인 정부라면 새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을 수립하기 전에 지난 사건을 반성적으로 성찰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이는 비단 나만의 걱정은 아니었다.

문재인 정부 초기 황우석 사건과 관련이 있었던 박기영 교수가 과학기술혁신본부장에 임명되었을 때, 나는 선거기간에 전달했던 나와 학계의 우려가 어느 선까지 올라가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궁금해졌다. 최근 가장 큰 문제로 떠오른 미세먼지에 정부가 대응하는 방식을 보면서 나의 그 궁금증이 되살아났다. 당시 미세먼지를 30% 감축하겠다는 공약이야 훌륭하지만 이를 위해 화력발전소를 줄이면 탈원전 정책과 맞물렸을 때 앞으로 전체 전력수급을 어떻게 맞출지, 나아가 국가 전반의 에너지 정책은 총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 그 상이 있어야 한다. 국가 주요정책은 최소한의 자기완결성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과의 정상회담에서 미세먼지를 의제로 다루려면 아주 꼼꼼하고도 반박이 불가능한 데이터를 많이 확보해야 한다. 그걸 위해서라도 미세먼지의 발생 원인부터 철저하게 분석해야 한다. ‘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이라는 대세론이 퍼질 때부터 누군가가 이런 지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고민을 시작했더라면 지금 인공강우나 야외 공기청정기 같은 극한 처방보다 좀 더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대처법이 나오지 않았을까?

20여 년 전 신한일어업협정 때, 일본은 위성사진까지 동원해 한국 어선의 조업량도 모두 파악하고 있었던 반면 우리는 우리 어업실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주무장관이 상대 장관과 호형호제하는 사이라며 협상에 임했다는 일화가 문득 떠올랐다. 설마 아직까지도 호형호제로 데이터를 틀어막는 아둔한 짓을 하지는 않겠지만, 근본적인 인식이 바뀌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87년 체제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힘은 정치경제학의 담론이었다. 한마디로 어떻게 반민주 독재를 극복하고 민주화를 이룰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는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문제들(미세먼지에서 젠더 이슈에 이르기까지)은 민주/반민주나 보수/진보의 단선적인 구도만으로는 이해조차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정치경제학의 담론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겠지만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과학기술의 담론, 이공계적 마인드 또한 그만큼 중요한 축으로 작동해야만 한다. 장담컨대 새로운 시대정신이 과학기술의 담론을 피해갈 길은 없다. 문재인 정부 초기 어느 방송인은 새 정부가 인문학 정치를 한다고 평가했다. 청와대의 공감과 감성행보에 대한 상찬의 말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역설적이게도 그만큼 과학기술의 마인드가 부족한 한계를 정확하게 드러낸 (아마도 그 방송인의 의도와는 달리) 평가이기도 하다.

물론 문재인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에는 훌륭한 면도 많다. 일선 연구자들의 처우나 연구 환경을 개선하고 과학기술 분야의 정책적 자율성을 높이려는 시도는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얼마나 과학적인 마인드가 국정 전반에 녹아들었느냐 하는 점이다. 과학은 수단이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고 방법론이며 태도이다. 자기완결성도 한 사례이다. 이는 마치 잘 코딩된 컴퓨터 프로그램과도 같다. 내적 논리가 일관되지 않거나 필수요소가 누락되면 프로그램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연구자들의 환경이 아무리 좋아지더라도 그 연구자를 일차적으로 길러내는 대학이 온전하지 못하면 사상누각이다. 최근 타결된 카풀 서비스 도입의 협상결과가 아쉽게 느껴지는 이유는 공유경제 시스템을 도입해 일반 시민의 편의를 높인다는 원래 취지가 많이 퇴색했기 때문이다. 전화기에서 선을 없앤다고 스마트폰이 되지는 않는다. 에너지, 환경, 부동산, 거시경제 운용에서도 하나의 시책이 연쇄적으로 몰고 올 파생효과를 얼마나 충분히 반영했느냐, 예상되는 역효과를 줄이기 위한 방책이 얼마나 준비돼 있느냐, 그 모두가 하나의 패키지로 얼마나 잘 꾸려져 있느냐가 정책의 성패를 좌우한다.

과학기술의 담론은 오직 과학기술의 영역에만 작동하는 게 아니다. 21세기 과학문명의 시대를 이끌어가는 사회적 작동원리이어야 한다. 인문학 정치는 현 정부의 장점이면서 동시에 아킬레스건이다. 새 정부 출범 2년이 다가오는 지금, 좀 더 깊은 호흡으로 남은 3년을 준비하길 바란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