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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 “맹목적인 좌파의 무능, 세계 곳곳 극우 부상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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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 “맹목적인 좌파의 무능, 세계 곳곳 극우 부상 불렀다”

입력
2019.03.13 04:40
수정
2019.03.13 11:45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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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석학 슬라보예 지젝 - 박명림 연세대 교수 대담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다. 1차 세계 대전 직후 자주, 주권, 평화를 향한 외침이 터져 나온 건 한국만이 아니었다. 아일랜드, 우크라이나, 핀란드, 이집트, 터키, 인도, 중국 등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민중 저항의 물결이 넘쳐났다. 3·1운동이 항일 독립 민족 운동을 넘어 자유, 평등, 민주주의를 지향한 세계 시민 운동으로 평가 받아야 하는 이유다. 이에 한국일보는 김대중도서관 관장인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와 슬로베니아 출신의 세계적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류블랴나 대학교 사회학 연구소 선임연구원 간 대담을 기획했다. 동서양의 두 석학은 최근 서울 서초구 JW 메리어트 호텔에서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위기, 난민 다문화 한반도 평화 등 방대한 주제로 대담을 가졌다. 지구적 쟁론을 던지기로 유명한 좌파 지식인 지젝 박사는 지난 달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이 주최한 국제학술회의 ‘민주공화 100년, 세계시민 100년: 보편평화를 향하여’ 참석차 방한했다.

세계적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왼쪽) 류블랴나대 사회학연구소 선임연구원과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지난 달 서울 서초구 JW 메리어트 호텔에서 ‘위기에 빠진 세계’를 주제로 대담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세계적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왼쪽) 류블랴나대 사회학연구소 선임연구원과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지난 달 서울 서초구 JW 메리어트 호텔에서 ‘위기에 빠진 세계’를 주제로 대담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현재, 냉전보다 위험… 1차 대전 직전과 비슷

박명림 교수(박)= “1차 대전 직후 세계 곳곳에서 자유와 자주 주권 등 인류 보편적 가치를 향한 열망이 폭발했다. 그 때와 비교해 세계는 나아졌는가.”

슬라보예 지젝(지젝)= “불행하게도 현재의 세계는 1차 대전 직전과 비슷하다. 유럽에선 새로운 포퓰리즘, 인종주의, 그리고 파시즘이 부상했다. 세계 권력 지형도 불확실해졌다. 사람들은 여전히 미국이 초강대국이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때부터 미국은 세계 강대국 지위를 잃어가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물론이고 북한과의 대결에서도 완전히 승리하지 못했다. 지금은 냉전보다 위험한 상황이다. 냉전 시대엔 ‘상호확증파괴(MADㆍ적이 핵 공격을 가할 경우 상대편도 핵 전력으로 전멸시키는 보복 전략)’라는 일정한 규칙이 존재해 그나마 서로를 견제할 수 있었다. 오늘날 신흥 강대국 간의 상호 관계는 불분명해졌다. 중국은 새로운 경제 강국으로 떠올랐고, 러시아는 크림 반도 강제합병 등으로 군사적 위험을 야기하고 있다. 1차 대전 직전 영국의 패권이 약화되고 독일과 다른 국가들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치고 올라왔던 상황과 유사하다.”

박= “세계 평화 체제에 대해 아직까지는 낙관적이라, 그 평가가 흥미로우면서도 우울하게 들린다. 가장 위험한 현상은 무엇인가. 낙관적으로 볼 만한 부분은 없는가.”

지젝= “낙관적 견해를 굳이 묻는다면, ‘하늘 아래 대혼란이 있으니 상황이 아주 좋다’고 한 중국 마오쩌둥(毛澤東)의 ‘절망적 낙관주의’를 인용하고 싶다. 나는 이 말을 ‘대위기의 시대일수록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문제는 우리가 위험한 현 상황을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새로운 세계 대전이 실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미국, 중국, 러시아 등 모든 강대국이 국방 예산을 증액하며 전쟁을 준비 중이지만, 아무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1차 대전 때도 그랬다. 1차 대전 이전 유럽은 60~70년 간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누구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믿지 않았다. 120년 전 상황과 지금이 비슷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정말 위험한 일 아닌가.”

서재훈 기자
서재훈 기자

◇트럼프보다 유럽이 더 문제… 중도세력, 민생과 격리

박= “마오쩌둥은 ‘천하대란(天下大亂)은 천하대치(天下大治)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대란대치(大亂大治)라고 부르곤 한다. 당신의 해석은 위험을 인정하고 기회를 잡으라는 것인데, 인간 세계에서 얼마나 가능할지는 비관적이다. 인간은 일단 위험 앞에서는 위축되고 후퇴하는 속성을 갖지 않나.”

지젝= “위험의 좋은 점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지난 미국 대선 직전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는 게 어쩌면 미국을 위해 더 좋은 선택일 수 있다고 한 것도 비슷한 취지다. 트럼프는 혐오스럽고 상스러운 인물이다. 그의 행동은 문명의 퇴보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독립적 여론, 강력한 시민사회 등 다양성의 힘을 지닌 나라다. 미국 민주당에서 기성 정당 보다 급진적인 대안 세력이 형성되는 것이 한 예다. 이 같은 상황을 열어 준 건 바로 트럼프다. 트럼프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지난 대선에서 사회주의 돌풍을 일으킨 버니 샌더스도, 알렉산드리아 코르테즈(1989년생의 최연소 여성 연방 하원의원)도 없었을 것이다.

현재로선 트럼프를 파시스트로 볼 순 없다. 더 큰 문제에 직면한 건 유럽이다. 프랑스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이탈리아, 폴란드의 우파 포퓰리즘 정부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사회민주적 정책들을 제시해 인기를 끌고 있다. 반면 자유주의 중도 정치세력은 민생과 괴리된 맹목적 정책으로 보통 사람들과 단절돼 있다. 매우 큰 비극이다.”

박= “러시아, 중국, 브라질, 터키, 필리핀, 헝가리 등 일정 수준의 경제 발전을 이룬 나라에서 권위주의가 등장하거나 독재가 지속되는 현실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지젝= “지금 세계는 새로운 형태의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를 경험하고 있다. 과거 공산주의를 비판한 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혼이 자연스러우며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이미 이혼 서류를 작성한 듯하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민주주의 없이도 나아가는 단계에 진입했다. 싱가포르의 국부로 추앙받는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를 보라. 권위주의 통치 체제로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끌었다. ‘리콴유 모델’은 인도, 파키스탄, 터키 등으로 전파돼 세계적 흐름이 됐다. 중국, 베트남에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지만, 경제 발전은 폭발적이다. 자유민주주의 첨병인 미국조차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로 돌아서는 느낌이다. 트럼프는 대통령 행정명령을 동원해 각종 정책을 밀어붙이고, 김정은을 비롯한 전 세계 독재자들과 어느 지도자보다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박= “세계 역사를 보면, 일반적으로 시장 자본주의가 절대주의를 죽이고 경제 발전이 독재를 죽여 왔다. 지금은 경제 발전이 독재와 권위주의의 자양분이 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지젝= “나 역시 좌파 성향의 지식인이지만, 좌파 정치 세력들이 좋은 정책 대안을 갖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다. 베네수엘라 경제가 망가진 것이 미국 제재 탓이라고만 할 수 있는가. 각국의 좌파 정치세력은 효율적인 경제 발전 모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조심스러운 발언이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통치 방식이 민주적이지 않았음에도 번영과 발전을 이루었다. 자유주의 좌파 정치세력의 가장 큰 문제는 맹목이다.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그들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서재훈 기자
서재훈 기자

◇‘타자 무조건 이해하자, 세계는 하나’ 주장은 강박

박 = “한국의 사례를 보자면, 자유화에 한정된 민주화가 과두제로 연결되고 말았다. 양극화가 극심해졌다. 난민 문제와 다문화로 넘어가 보자. 전세계 난민의 숫자가 2차 세계대전 직후보다 많다. 지구적 불평등과 관련된 문제다. 인류는 다문화와 보편주의 사이에서 반드시 선택을 해야 하는 만큼, 세계화 시대의 다문화는 정말로 어려운 문제다. 한국에서도 지난해 제주에 도착한 예멘 난민을 둘러싸고 격렬한 사회적 토론과 논란이 있었다. ”

지젝= “따져 보자. 유럽에서 이슬람 공포증을 얘기하지만, 이슬람이 정말로 공포를 느낄 만한 대상인가. 트럼프처럼 장벽을 세우는 것만으로는 난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주자들은 우리가 모르는 어떤 곳에서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다. 왜 그들이 고향을 떠나게 됐는가 살펴야 한다. 미국은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나. 서구 자본은 아프리카에서 과연 어떤 일을 벌이고 있나. 난민들이 스스로의 잘못 때문에 전 세계를 떠도는 게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박= “트럼프는 시멘트 장벽을 쌓으려 하고, 유럽은 인종적, 심리적, 법률적 장벽을 높게 쌓으려고 한다.”

지젝= “어떤 종류든 장벽 쌓기는 끔찍한 일이다. 난민 문제는 또한 문화적 갈등을 낳는다. 나는 ‘다른 문화의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식의 접근을 혐오한다. 진정한 다문화의 의미, 내가 꿈꾸는 다문화의 요체는 ‘우리는 모두 친구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내 옆집에 아랍 사람이 살고, 그 옆집에 한국 사람이 살고, 또 그 옆집에 아프리카 사람이 살지만, 우리 모두는 친구는 아니다. 정중하게 서로를 무시하며 산다. 때때로 기적이 발생해 그들 중 한 명과 친구가 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타자를 무조건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세계다’는 주장 자체가 강박일 수 있다. 다문화에선 서로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박=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이념적으로 사회주의에 승리했지만, 불평등, 양극화, 난민 등 문제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최근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결합해보려 노력하는 이유다. 특히 복지 문제는 정치가 풀어야 할 핵심 과제다.”

지젝= “우리는 여전히 좌파적 시각의 대안을 찾아 나가야 한다. 급진적 좌파 이야기가 아니다. 50년 전 좌파를 지지한 사람들이 꿈꾼 ‘복지 국가’를 재발견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우리가 자유주의의 유산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트럼프와 그를 따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버니 샌더스는 미친 사회주의자’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50년 전의 유럽 사회민주주의와 비교하면 샌더스의 정책공약들이 훨씬 덜 급진적이다. 샌더스의 정책은 50년 전의 스웨덴이 추구했던 정책보다 덜 진보적이다. 그렇다고 우파가 대안이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우파 세력이 권력을 잡은 어느 국가에서도 의료 복지와 유치원 교육 문제 등은 해결하지 못했다. 현재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좌파적 시각에서 실천적 담론을 모색해야 한다는 뜻이다.”

서재훈 기자
서재훈 기자

◇클린턴이 대통령 됐다면 한반도에 이미 전쟁 났을 것

박= “북핵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세계인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한국인으로서도 걱정이 크다. 간략하게 평가와 전망을 듣고 싶다.”

지젝= “대화를 이어가려고 하는 남한의 태도를 존경한다. 2년 전 트럼프와 김정은이 누가 더 큰 핵 단추를 갖고 있는지 경쟁적으로 게임을 하고 있을 때 긴장감을 느꼈다. 트럼프는 매우 이상한 길을 가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성공적일 수도 있다고 본다. 트럼프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그런 사람의 선택과 행동이 실질적인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이 됐다면 한반도에 이미 전쟁이 났을 것이다. 우리는 트럼프를 ‘나쁜 아이’로 묘사하고, 미국 민주당을 이상적으로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민주당이 역사적으로 더 잔혹했다는 점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반공주의자였던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1972년 중국을 처음 방문해 미중 데탕트를 알린 ‘상하이 공동성명’을 발표했던 것을 떠올려 보라. 베트남전을 개시한 건 민주당이었고, 평화를 가져 온 건 결국 닉슨 전 대통령이었다.”

박= “나는 인류의 준거와 희망으로 보편성을 늘 탐구해왔다. 역사를 보면, 모든 종(種) 중에 가장 강력하고 패권적인 종과 강력한 지배자는 반드시 사라졌다. 인류의 생존과 미래를 위해 어떤 보편성이 필요할까.”

지젝= “마르크스라면 ‘노동자들은 커지고 있고, 그들 스스로 뭉칠 것이며, 이것이 바로 해결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비관적이다. 지금 이대로 가면 인류는 곧 종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현재의 상황을 진단하는 새로운 사유의 장을 열어나가야 한다.”

박= “우리가 각자의 비극과 재앙 속에서 기회와 위험을 맞이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겠다. 그것은 인간의 숙명인 듯하다. 긴 대화 정말 감사하다.”

정리=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김의정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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