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전향과 충돌 
성호 이익의 증손자이자 내포에서 존경받는 학자였던 목재 이삼환의 영정. 이삼환은 일찍이 천주교에 반대하는 뜻을 명확히 내비쳤다. 다산은 금정에 도착하자마자 이삼환에게 편지부터 썼다. 안산 성호기념관 제공
 
 이삼환이란 인물 

금정찰방 시절 다산은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와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지었다. 천주교를 극력 배척하는 성호 우파 남인과의 접촉면을 넓히고 퇴계와 성호를 정학으로 높여, 천주교의 낙인을 지우려는 의도가 담긴 저술이다. 일종의 전향 인증의 모양새를 얻고자 한, 순수하지만은 않은 글이었다.

다산은 부임 직후부터 부지런히 이 지역 남인들을 만났다. 이 지역 남인의 좌장은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 1729~1813)이었다. 성호 이익은 그의 종조부였다. 안산 첨성리에서 출생해서 어려서 성호에게 직접 배웠다. 1763년에 이병휴(李秉休)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충청도 덕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처음 천주교가 들어와 문제가 되자, 1786년에 그는 ‘양학변(洋學辨)’을 지어 천주교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반대의 뜻을 명확히 했다. 1791년 충청도관찰사 박종악이 정조에게 올린 보고서를 모은 ‘수기(隨記)’에는 이삼환이 중심을 잘 잡고 있어서 그가 사는 마을에 천주교도가 한 명도 없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산은 금정에 도착하자마자 이삼환에게 편지를 썼다. 핵심을 추리면 이렇다. ‘임금이 여러 차례 정학(正學) 숭상을 이단을 물리치는 근본으로 삼자는 뜻을 밝혔다. 성호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퇴계 이황의 바른 맥을 이어 정학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 하지만 정작 성호의 문집이 세상을 뜬 지 32년이 되도록 초고 상태로 방치되어 있으니, 가까운 절에서 함께 모여 집중적으로 정리 작업을 진행하자.’ 이어 다산은 자신의 이 제안이 이승훈과 상의한 일임을 말했다. 처음 금정으로 내려올 때 다산과 이승훈이 하루 밤을 같이 자면서 이 같은 상의가 있었을 것이다.

이삼환의 답장은 1795년 8월 5일에 도착했다. 이삼환은 자신이 하려 해도 엄두조차 못 내던 일을 다산이 나서서 함께 작업하자 하니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서두르는 주체가 다산인 것만은 조금 걸렸다. 공연히 다산의 주도로 성호의 저술이 정리되면 또 다른 구설을 야기할 염려도 없지 않았다. 다산에 대해 반감을 품은 젊은 축도 적지 않았다.

 이인섭의 편지 

8월 7일에는 나주목사로 있던 이인섭(李寅燮)의 편지가 금정에 도착했다. 다산의 견책 사실을 알고 위로 차 보낸 글이었다. 편지는 “이번에 그대가 견책을 당한 것은 실로 성상께서 옥으로 만드시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이를 위해 감축 드리오. 지금을 위한 계책으로는 정주(程朱)의 글을 부지런히 읽음만 한 것이 없을 것이오. 하지만 앞서의 허물을 덮고 새롭게 들은 것을 드러내려고 억지로 읽기만 하고 깊이 믿지 않는다면, 천 번을 넘게 읽어 자기 말처럼 외운다 해도 아무 실효가 없을 것이오”로 시작되고 있었다.

이인섭은 아버지 정재원의 벗이었고, 성호의 제자였다. 다산의 서누이가 이인섭의 서자와 혼인하여 사돈을 맺은 각별한 인연도 있었다. 글 속의 ‘앞서의 허물’은 천주교를 믿은 것을 말하고, 금정에 와서 ‘새롭게 들은 것’은 퇴계와 성호의 학문일 터였다. 이인섭은 겉으로 시늉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으니, 진실로 깊이 믿어 반드시 실행에 옮길 것을 당부했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퇴계 선생은 동방의 대현이시다. 일생 동안 주자의 글을 높이고 믿어서 한 글자도 어긋남이 없었다. 근세의 유자들이 비록 그 잘못을 지적한 바가 있다 해도, 그들의 학문은 반드시 퇴계에는 미치지 못한다. 어찌 이들의 말을 믿고 퇴계를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이 퇴계와 같다면 충분하고, 공부도 퇴계와 같이 해야 옳을 것이다.” 요컨대 이인섭은 다산에게 천주교 신앙을 온전히 버려, 퇴계의 추종자로 거듭날 것을 충고했다. 뒤에 다시 쓰겠지만 금정시절 다산이 쓴 ‘도산사숙록’은 이인섭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나 같았다.

정조와 채제공은 다산에게 천주교도 검거와 퇴계 및 성호의 추종으로 천주교와의 완전한 결별을 입증하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이인섭의 편지까지 더해져, 일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 작전이 가동되고 있음을 본다.

이도명이 이삼환에게 써 보낸 '방산산인시고'에는 성호의 학문에 대한 존경심이 드러나 있다. 그럼에도 이도명은 봉곡사에서 열린 성호 저서 정리 작업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다산이 보기 싫어서였다. 안산 성호기념관 제공
 
 냉랭한 시선, 이도명과의 논전 

8월 17일에 김복성을 잡아 문초한 다산은 8월 23일에는 예산으로 건너갔다. 한강동(寒岡洞)의 이수정(李秀廷)을 문상하기 위해 간 걸음이었다. 인근의 남인 학자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문상을 마친 다산은 인근 천방산(千方山)에 사는 남인 처사 이도명(李道溟)과 이광교(李光敎)의 집을 찾았다.

이도명은 그 지역의 명망 있는 선비였다. 젊어 몇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성리학 공부에 잠심했다. 문을 두드리자 삼베옷에 대나무 갓끈을 맨 그가 예를 갖추어 다산을 맞았다. 산림처사의 기운이 맑았지만 어딘가 싸늘한 기색이 있었다. 몇 차례 대화가 오가면서 두 사람의 생각 차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다산은 이도명의 공부하는 태도와 자세가 답답했고, 이도명은 자기보다 나이도 어린 다산이 훈계하듯 하는 말투가 못 마땅했다.

다산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그대는 스스로를 닦는 공부에만 힘쓰고 세상을 위해 쓰는 공부에는 관심이 없군요. 어째서 선왕의 도를 강습하고, 성인의 학문을 열어 성물(成物)하는 공부를 행하지 않으시는지요?” 어째서 자신을 위한 공부만 하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공부를 하지 않느냐고 나무란 것이다.

이도명은 불쾌함을 누르고 한껏 자세를 낮췄다. “제가 공소(空疎)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스스로를 닦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어찌 세상을 위한 공부를 하겠습니까?” 나이는 이도명이 훨씬 위였지만, 다산은 3품의 당상관을 지냈던 터라 처지가 현격했다. 고집스러운 시골 선비와 좌천된 관리의 대화는 평행선을 긋고 더 이상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에 서로에게 앙금이 남았다.

닷새 뒤인 8월 28일, 여전히 예산 이수정의 상가에 머물고 있던 다산에게 앞서 한번 만났던 이광교가 이도명의 편지를 들고 왔다. 이도명은 겸손하게 서두를 열었다. 젊어서 세월을 헛되이 보내다가 뒤늦게 공부의 깊은 맛을 알게 되어, 이것으로 삶을 끝마치고자 한다고 썼다. 편지 끝에 그가 슬쩍 칼끝을 보였다.

“이번에 그대가 동량(棟樑)의 자질과 훌륭한 재능으로 우리 학문에 마음을 두어, 스스로를 지나치게 깎고 덜어내어, 저처럼 배우기를 원하면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를 곡진히 돌아보시니, 그대는 어찌 참으로 옆 사람이 비난하고 비웃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이 같은 거동이 있는 것입니까?”

곧이곧대로 옮긴 이도명의 말뜻은 이랬다. “지금 그대가 나를 훈계하고 다닐 때인가? 너나 잘 해라. 곁에서 그대의 행동을 비난하고 비웃는 줄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이도명은 철저한 성호 우파의 지식인이었고, 퇴계의 추종자였다. 다산이 ‘금정일록’에 실어둔 이도명의 이 편지도 상당 부분 퇴계가 제자들에게 준 편지글을 짜깁기해서 지은 글이었다. 지난 닷새 동안 삭이지 못한 분노가 편지 속에 묻어 있었다.

 제 2차 논전 

다산은 즉각 붓을 들어 답장했다. 문집에 실린 ‘방산 이도명에게 답함(答方山)’이 그것이다. 앞쪽에 길게 예의를 갖췄다. 그런 뒤에 본론을 꺼냈다. 겸손도 좋지만, 공부는 개물성무(開物成務), 즉 사물의 이치를 살펴 세상의 일을 이루는 데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군자가 함양 공부에 힘쓰는 것은 베풀어 쓰기 위함이니, 먼저 나를 이루고(成己) 남을 이루어주는(成物) 데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대는 겸양이 지나치고 함축이 너무 깊어 남을 이끌어 깨우치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니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10월 26일에 다시 이도명의 답장이 도착했다. 이번엔 서두의 인사말이 짧았다. 대뜸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대가 나를 나무란 것은 크게 정리에 닿지 않으니,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이처럼 뜬금없는 말을 편단 말이오? 그대는 예전에 자신의 허물을 몰래 감추고서 저쪽에서 나와 이쪽으로 들어온 분간을 능히 자백하지도 않은 채 구차스럽게 미봉하였소. 한갓 삿됨을 물리치고 바름을 붙들어 세우는 뜻을 품어, 모호하게 행동하고 애매하게 넘기면서 풍파를 부추기는 세상에 처하고 있구려. (중략) 설령 괴이함을 감추고 처음에 미혹되었던 탄식이 있더라도 능히 본디 지닌 성품을 되돌려 굳세게 노력한다면 점차 고명한 경지에 다다를 것이오. 그렇게 한다면 옥구슬이 진흙 속에서 더럽혀졌더라도 씻고 닦으면 신명께 바칠 수 있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오. 그런데도 그대는 지금 도리어 자기처럼 하지 않는다고 탄식을 하고 있으니 이게 어찌된 셈이오?”

글의 핵심은 이랬다. “그대가 천주교 문제로 견책을 입어 여기까지 쫓겨 온 터에, 자신이 천주교 믿은 잘못을 명백하게 해명도 않으면서, 모호하고 애매한 태도로 남을 가르치려 드니 참으로 해괴하지 않은가? 반성은커녕 자기처럼 안 한다고 난리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배척의 뜻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도 받아줄지 말지인데, 도리어 훈계하려 드느냐는 뜻이었다.

다산은 이도명의 냉랭한 폭언에 꿈쩍 않고 답장했다. 이런 것은 다산의 특기였다. 상대가 기가 질려 나가떨어지기 전에 결코 자기편에서 먼저 논쟁을 그치는 법은 없었다. 후배가 공부가 정밀치 못하면 도와 바른 길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맞지, 오는 사람을 외면해 거절하는 것이 군자의 도리인가? 어떻게 먼저 한계를 두어 상대와 나를 편으로 가르려고만 하느냐고 다산은 반박했다.

두 사람은 끝내 화합하지 못했다. 이도명은 자신들을 이용하는 듯한 다산의 태도가 불쾌했고, 다산은 선을 그어 배척하는 그의 편협한 태도가 불편했다. 이도명은 10월 27일에 이삼환을 좌장으로 남인 학자들이 봉곡사에 모여 열린 강학 모임에도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모임의 주선자가 다산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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