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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서 돈버는 제주 노른자땅” 다단계로 불린 1000억대 사기

입력
2019.03.05 04:40
수정
2019.04.16 23:07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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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범죄, 당신을 노린다] <2> 제주 곶자왈 기획부동산 사건

※사기를 포함한 지능범죄는 정보기술(IT)의 발달과 함께 더욱 고도화하고 있습니다. 일확천금의 미끼에 낚이는 순간, 당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지능범죄 시리즈는 매주 화요일 그 덫을 피해가는 지혜까지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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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뒷골목에서, 전철에서 나뒹구는 흔하디 흔한 전단지다. 그렇기에 한번도 제대로 본 적 없는 전단지이기도 하다. “저렇게 쉽게 돈 주는 회사가 어디 있어” “지금 시대에 아직도 저런 거에 속는 사람 있나”라며 비웃는 게 거의 전부일 테니.

하지만 상황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주부 박미경(가명ㆍ47)씨도 그랬다. 박씨는 말 그대로 전형적인 가정 주부. 대형 공장이 밀집한 울산의 중산층 노동자 가정에서 성실한 남편과 함께 네 아이를 키웠다. 화목했지만 빠듯한 살림이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고민도 커져갔다. 아이들 대학 학비, 결혼 준비에다 부부의 노후 대비까지. 급할 때 요긴하게 쓸 수 있을 만한 몇백, 몇천 든든한 목돈에 대한 갈증이 일었다. 아이들도 어느 정도 컸겠다, 이제 나라도 나서서 뭘 할 수 없을까 하던 찰나였다.

그 때 친한 교회 언니가 접근해왔다. 몇 달 전부터 ‘꿀알바’를 하고 있는데 너무 좋은 자리라 소개해주고 싶다고, 특별한 기술도 지식도 필요 없다고, 몇 시간 앉아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박씨도 처음엔 당연히 웃어넘겼다. “세상에 그런 직업이 어디 있어요.” 그러자 인정에 호소했다. 자기 얼굴을 봐서라도 딱 한 달 정도만 와서 일해보라 졸랐다. 박씨는 ‘A부동산 영업1팀 과장’이라 찍힌 명함을 받아 들었다.

[저작권 한국일보] 기획부동산/ 강준구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기획부동산/ 강준구 기자

◇”제주 곶자왈 개발한다”

듣던 대로 아무 기술도, 지식도 필요 없었다. 출근해서 하는 일이라곤 하루 종일 강연 듣는 게 전부였다. 내용은 대충 이랬다. 제주에 아직 개발을 앞둔 땅이 많다, 화려한 홍콩 사진을 보여주며 머지 않아 제주가 이처럼 고층빌딩이 가득한 환상의 섬으로 변할 것이다, 제주는 국제자유도시라서 제주도지사는 육해공군만 없다 뿐이지 제주 내에서만큼은 대통령이다, 그러니 도지사가 마음만 먹으면 개발제한구역 해제 같은 건 식은 죽 먹기다, 등등.

조금 지나자 조금 더 노골적인 홍보가 나왔다. 제주 서귀포 인덕면에 있는 ‘제주신화월드’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맞은편에 아직 개발이 안 된 땅이 있는데 이 땅을 평당 98만원에 사면 2년 안에 37만원을 얹어 돌려주겠다”는 제안이었다. 100평을 9,800만원에 사면, 2년 안에 1억3,500만원이 된다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4,000여 만원을 벌 수 있다는 셈법이었다. 이 땅을 주변 사람들에게 권해서 팔아오면 두둑한 포상금도 주고 승진도 시켜주겠다고 했다. 너무 알짜배기 땅이니까 직접 사도 된다 했다.

이어 회사는 ‘현장 답사’를 제안했다. 항공권과 숙박비 등 모든 비용은 회사 부담이었다. 제주공항에 내리자 검은색 9인승 외제 밴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 현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차 안에선 ‘답사부장’이란 사람이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삼성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이었고 어머니가 부동산 법인 이사로 계십니다. 어머니 일이 너무 바빠서 퇴직하고 도와드리고 있어요. 제 아내는 서울 유명 4년제 대학 교수인데, 아내도 이미 땅을 100평이나 샀습니다. 저희 가족들을 걸고 과감하게 추천 드리는 땅 이에요.” ‘삼성 비서실’ ‘부동산 법인’ ‘교수’에 같은 헛된 이야기에 사람들 귀가 쫑긋했다.

현장 답사는 근사한 나들이였다. 제주신화월드 바로 옆에 위치한, 넓고 고른 땅과 평평한 잔디와 바로 옆에 붙은 큰 도로. 당장 개발된다 해도 이상 없어 보였다.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제주신화월드 정문 바로 맞은편에 상업시설을 짓기 위한 토지 분할이 끝났어요. 내년 하반기 개장 맞춰서 벌목 작업하는 모습 보이시죠. 모두 44채를 지어서 분양할겁니다.“ 벌채 허가를 받았다는 서류, 유명 건설 시공회사와 업무협약을 체결할 때 만들었다는 A4 1장짜리 계약서를 내밀기도 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각종 개발서류에 흥겨운 술자리까지

‘답사’의 마무리는 질펀한 술자리였다. 흑돼지 등 제주 특산물과 함께 소주잔이 돌았다. 계약 홍보는 은밀하게 더 노골적으로 이뤄졌다. 현장을 둘러본 뒤 마음에 든다며 계약을 한 고객에게 답사부장은 ‘여왕대접’을 바쳤다. 망설이는 이들에겐 담당 과장들의 집요한 설득이 이어졌다. 간혹 좀 더 정확한 정보를 달라며 망설이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들 목소리는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 묻혀졌다. 허둥지둥 계약서를 쓰고 술도 제대로 깨기 전에 울산행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실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가짜였다. 이들이 팔겠다며 선전한 토지는 ‘곶자왈’ 지역이었다. 나무, 덩굴식물, 암석 등이 뒤섞인 독특한 화산 지형인 곶자왈은 제주의 자연, 그 자체다. 애당초 그 어느 누가 와도 개발이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답사 때 보여준 곳은 그마저 곶자왈도 아닌, 인근 어디메 비슷한 지역의 공사장이었다. 설명과 다른 지역인 것 같다는 의심이 들 법 했다. 피해자 윤모(44)씨는 “땅에 대한 정보를 더 얻고 싶어서 지번이라도 알려달라 해도 ‘영업비밀’이라며 알려주지 않았다”며 “지번도 모르고 계약서에 사인한 피해자가 대부분”이라 전했다.

시공회사와 맺었다던 계약서도 알고 보니 아주 기초적인 단계의 ‘양해각서’였다. “토지개발 인ㆍ허가를 얻어온다면 협업을 고려해볼 수 있다”는 수준의, 하나마나한 언급이 전부였다. 벌목작업도 마찬가지였다. 시청에다 ‘벌채예정수량조사신청서’를 낸 게 다였다. 이 또한 내용은 나무를 엄청 베어내는 게 아니라 가지 치기 정도의 ‘숲 가꾸기’ 작업을, 그것도 일단 조사만 한번 해보겠다는 수준이었다. 답사비용도 회사가 전액 부담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모집한 고객의 계약이 성사되지 못하면, 그 비용은 그 고객의 담당 직원이 모두 물어내는 구조였다. 회사가 인심 쓰는 듯 답사 여행을 조직하고, 과장들이 필사적으로 설득한 건 그 때문이었다.

◇1,000억원대 최대 기획부동산 사기

속으로 곪아가던 문제점은 결국 고소로 이어졌다. 울산 남부서가 2017년 12월 12일 수사결과를 발표했을 때 피해자는 434명, 피해 금액은 221억 원이었다. 이 수사 덕에 또 다른 부동산 사무소를 통해 벌인 또 다른 제주 지역 토지 사기 사건까지 잇달아 적발되면서 이 사건은 피해자 수 1,000여명, 피해금액 1,000억 원대의 대형 사건으로 커졌다. 단일 기획부동산 사기 사건으로 최대 규모로 꼽힌다. 이들의 범죄 행각은 2016년부터 시작됐으니 기껏해야 1년 남짓.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런 사기행각이 가능했을까. 당시 남부서 경제1팀장으로 이 사건을 수사했던 윤종탁 경감은 가장 큰 이유로 “다단계 조직의 영업 방식이 동원됐기 때문”이라 말했다.

이전에 기획부동산 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장모(66)씨와 총책 정모(45)씨는 울산을 거점으로 삼았다. 범행 기획자 장씨가 정씨를 끌어들여 모기업 격인 ‘A부동산 주식회사’를 설립한 뒤 모기업 아래 다시 3개의 부동산 법인을 만들었고, 각각 ‘바지 사장’을 세웠다. 장씨는 아들 여모(41)씨에게 상무를 맡겼다. 1일 4시간 근무에 과장 직급과 월 140만원을 주는 조건이었다. 차장은 170만원, 수석 차장은 210만원, 부장은 250만원을 줬다. 일하는 시간과 노동 강도에 비해 급여가 괜찮은 탓에 직원은 쉽게 모였다. 지인에게, 지인의 지인에게 입소문을 타고 몰려든 직원들로 사무실은 북적였다.

직원들은 남들에게 제주의 투자가치를 설명할 수 있는 교육을 받았다. 실적이 없으면 즉시 해고됐다. ‘월급 140만원’의 맛을 본 직원들은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 가족, 지인들에게 적극적으로 땅을 권유했다. 정 끌어들일 사람이 없으면 자기가 직접 사기도 했다. 이를 위해 회사에선 ‘남편 몰래 대출 받는 방법’, ‘카드론 받는 방법’까지 교육시켰다. 윤 경감은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다시 다른 피해자를 끌어들이는 방식이라 뭔가 이상하다 느꼈을 때도 쉽게 고소하지 못 했다”고 말했다.

사무실은 하루하루가 축제였다. 130평 이상 판매했을 뿐 아니라 잔금 처리까지 깔끔하게 마무리 지은 직원에겐 포상금 200만원이 주어졌다. 200평 이상 판매자에겐 300만원, 300평 이상 판매자에겐 500만원이 포상금으로 지급됐다. 500평 이상 팔면 차장으로 승진했다. 포상금은 그냥 통장에다 넣어주는 게 아니었다. 사무실 전 직원이 보는 가운데 사장이 은쟁반에다 포상금을 현금다발로 실어다 날랐다. 팡파레를 울리고 금가루를 날렸다. 완전한 영웅 대접이었다. 흥을 띄우기 위해 한 달에 한번씩 전체 회식도 열렸다. 장기자랑, 신발던지기 게임, 모델 선발대회 등 온갖 이벤트를 다 벌였다. 5만 원짜리 돈 다발을 현장에서 뿌려대기도 했다. 부동산 사무실엔 노래방 기계가 구비되어 있었다. 소주와 맥주가 박스째로 사무실로 들어왔고 부장, 상무, 전무가 차례로 마이크를 잡았다.

◇피해자가 피해자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건

울산지방법원은 지난해 11월 29일 사기와 농지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된 총책 정모(45)씨에게 징역 5년을, 장씨와 여씨에게 각각 징역 4년과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일부 피해자의 제보로 수사가 시작돼 구속됐음에도 범행을 부인하고 비슷한 수법의 범행을 계속 하고 있는데다 반성하는 태도가 없다”고 꼬집었다. 재판부 지적대로 이 사건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피해자 모임 대표를 맡고 있는 임모(45)씨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음에도 사기꾼들은 비슷한 수법으로 사기 행각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경찰도 숨겨진 피해자가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서로서로 물려 있다 보니 쉬 나서질 않는 것이다. 윤 경감은 “피해자들에게 피해자임을 인정하게 만드는 게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다. 수사기관의 말에 따르면 ‘사기 당한 피해자’가 되지만, 사기꾼 말을 따르면 ‘언젠가 개발 수익을 만질 땅 주인’이라는 여기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는 얘기다. 범인들이 반성 없이 범행을 이어갈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울산=박진만 기자 bpb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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