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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양승태의 신성가족, 이탄희의 연대

입력
2019.02.22 19: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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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근본 무너뜨린 최악의 대법원장

법복 벗으면서도 희망을 말하는 판사

단단한 연대로 사법개혁 물꼬를 터야

지난해 70돌을 맞은 대한민국 사법부의 출발점은 ‘그라운드 제로’가 아니었다. 일제가 이식한 식민지 사법에 뿌리를 뒀다. 법과 제도는 물론, 관행과 사람까지. 김두식 경북대 교수는 ‘법률가들’에서 그 시절 법조인들의 행적을 추적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 과정을 복원한 뒤 아프게 묻는다. “과연 그 시대에 훌륭한 판검사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의 유효기간은 질기게 이어졌다. “전두환 시대의 법원은 어디 가서 정의를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조직”이었고, 그 중심에 유태흥 대법원장이 있었다.(김두식, 위 책) 그는 임명 직전 박철언 대통령 정무비서관을 만나 “분단국의 현실에 비추어 사법부의 수장은 정치적ㆍ공안적 사건에서는 정부에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고, 취임기자회견에서도 이런 생각을 당당히 밝혔다. 그의 재임기간 내내 법원은 권력의 “만만한 먹이”가 됐고, 저항한 극소수 판사들은 가혹한 보복을 당했다. 그는 국회 탄핵소추안 발의 위기도 가볍게 넘기고 임기를 마쳤지만 사법사의 짙은 그늘을 조명할 때 어김없이 첫 줄에 소환되곤 했다.

그런 그가 사후 10여 년 만에 ‘최악의 대법원장’이란 꼬리표를 뗐다. 흑역사를 새로 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더 은밀하고 더 대담하게 사법을 농락했다. 민주화에 힘입어 오욕으로 얼룩진 사법의 시대가 저물고 비로소 독립을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고 믿었)지만, 우리가 끝내 목도한 것은 구시대의 악습을 온존한 채 ‘선출되지 않은(그래서 견제도 받지 않는) 권력’을 누리며 스스로 괴물이 돼 버린 사법부의 민낯이다. 박정희 때의 민복기, 전두환 시절의 유태흥 등에겐 그나마 총칼로 집권한 독재정권의 서슬 퍼런 압박이란 구차한 변명거리라도 있었다. 그러나 양씨는 공범자들이 밤새 골무 끼고 산더미 같은 자료를 훑으며 몸에 익힌 성실함을 무기 삼아 판사들 뒷조사를 하고, 누군가의 절박한 삶이 걸린 재판을 두고 정권과 거래를 시도했다. 전례도 없고 절대 되풀이돼선 안 될 추악한 범죄다.

얼마 전 지인이 물었다. “양승태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깟 상고법원이 뭐라고.” 전ㆍ현직 법관들의 답은 대체로 비슷했다. “인사권을 무기로 사법행정을 더 강력하게 장악하려 했던 것 아닐까요?” 2년 전 이탄희 판사가 동료 뒷조사 등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며 사표를 냈을 때도 법원행정처는 “감당하지 못한 개인만 낙오자라는 식”의 압박으로 대응했다.

“법관은 재판받는 사람의 눈에는 마치 신적인 존재로까지 비칠 정도의 특별한 존재입니다.” 양씨의 재임시절 연설문에 수시로 등장하는 이런 문구에 코웃음을 치다 김두식 교수가 10년 전 사법 신뢰를 흔드는 법조계의 나쁜 관행과 문화를 조목조목 비판한 책 제목이 불현듯 떠올랐다. ‘불멸의 신성가족’. 아직도 만연한 전관특혜 관행, 양씨 수사에서 드러난 대형 로펌과의 무람없는 교류 등을 덧대어 보자. 그는 대법원장 임기 6년만이 아니라 그 신성가족 피라미드의 꼭대기 자리를 영원히 누리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시대적 과제인 사법개혁이 법원 내부의 일부 제도 개선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이유가 한층 분명해진다.

현실은 어떤가.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개혁에 대한 비전조차 제시하지 못한 채 갈지자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일부 고위법관은 정치권과 언론, 국민을 향해 여전히 불만을 뿜어대고, 대다수 법관은 신뢰가 바닥난 사법부의 현실을 한탄만 하고 있다.

이탄희 판사는 결국 두 번째 사표를 냈다. 그는 인터뷰에서 첫 사표를 낼 때 부당한 지시를 수용하는 순간 포기해야 할 “소속감”을 떠올렸다고 했다. “동료 판사들이 정의로움, 공정함, 독립된 재판, 외롭지만 지성인으로서 내리는 양심적 결단 등을 공동의 가치로 삼고 서로 응원하면서 연결된 느낌”은 그를 줄곧 지탱해 온 버팀목이자 법원의 미래를 애써 낙관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아직은 허약한 이 연대가 수렁에 빠진 사법개혁의 흐름을 바꿀 수 있으려면 법조계를 넘어선 단단한 연대가 필요하다. 사법개혁은 우리 모두의 과제다.

이희정 미디어전략실장 ja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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