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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성평등한 방송을 위한 책임

입력
2019.02.23 04:4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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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한 여자고등학교로 강연을 하러 간 일이 있다. 내가 공저자로 참여한 청소년을 위한 페미니즘 책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내용을 흥미롭게 읽어 초대했다는 말에, 나는 책임감을 느꼈다. 아직 하지 않은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여자다움에 대한 사회적 규범에 구애받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넘어서, 대중문화에 만연해 있는 외모 지상주의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여성들은 TV를 보고 스마트폰 속에서 영상과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자신의 외모를 의식하게 되며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집착하게 된다. 그 집착이 어떻게 자신을 혐오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어떻게 여성 개인의 정신과 돈, 시간을 빼앗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나 자신부터가 나의 몸을 다이어트의 대상이 아니라 제대로 기능하는 육체로 인식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을 뿐 아니라, 지금도 나의 몸과 외모를 덜 의식하기 위해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외모를 덜 의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대상화되고 지나치게 꾸며진 여성의 신체 이미지를 보지 않고,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외모에 대해 굳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의식적으로 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성가족부가 제작 배포한 ‘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 안내서’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의미가 있다. 문제가 된 “비슷한 외모의 출연자가 과도한 비율로 출연하지 않도록 합니다”라는 구절은, 의미 전달의 측면에서 본다면 더 다듬어졌어야 하는 문장이다. 하지만 이 문장 속의 ‘비슷한 외모’, 특히 여성의 비슷한 외모가 무엇인지 TV를 보는 사람들은 정확히 알고 있다. 젊고, 마르고, 얼굴이 작고, 완벽한 화장을 한 여성 출연자에게만 주어지는 자리에 대한 고민은 어디로 갔는가? 획일화된 미적 기준이 청소년과 어린이에게 미칠 영향에 대한 고찰은 왜 아무도 하지 않는가? 이런 질문에 답하는 대신, 몇몇 국회의원과 언론은 곧바로 단어 몇 개만을 문제 삼았다. 안내서에 실린 성평등을 위한 노력은, 다양성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한 방송국의 시사 프로그램의 시선은 더욱 저열했다. 출연자 중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4대 1이라 안 되겠다며 가발을 쓰며 조롱한 것이다. 애초에 왜 그 자리에서 ‘마이크를 쥔’ 사람의 성비가 왜 차이가 났는지를 성찰했어야 그게 언론이다.

여성가족부가 다시 확인해 주었듯이, 이것은 검열도, 단속도, 규제도 아니다. 청소년과 어린이들이 방송과 대중문화를 통해 받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점에서 여성가족부가 마땅히 제안해야 할 일이다.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채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섹시 댄스를 추게 하고 여성의 외모를 쉼 없이 품평하는 동안, 현실의 여성 청소년과 어린이들은 어떤 영향을 받아 왔는가? 강연 등 현장에서 만난 교사들에 따르면 여학생들이 걸그룹의 노래로 이성 간의 관계 맺는 방법을 잘못 배우고 걸그룹의 외모를 따라가기 위해 저학년부터 굶어가며 다이어트를 하는 등의 문제가 초등학교 교실에 만연해있다고 한다. 유치원생인 여자아이들이 재롱잔치에서 몸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어른들의 춤을 따라 추는 모습은 어떤가? 이런 현실에 방송이 정말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방송을 통해 고정된 성 역할과 성 차별적인 사고방식과 언어가 아니라, 더 많은 가능성을 배워야 한다. 특히 여자아이들은 지금까지는 부족했던 더 다양한 외모와 나이의 여성을 방송을 통해 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꿈꿀 수 있어야 한다. 이 안내가 필요했던 것은 지금까지 방송이 성평등의 기본조차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사실에 부끄러움을 먼저 느껴야만 한다.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은 다음 세대의 미래를 좀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 가는 데 분명한 책임이 있다.

윤이나 프리랜서 마감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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