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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명의 이슬람 문명기행] 동서고금 학문이 모여든 ‘지혜의 전당’ 바그다드

입력
2019.02.23 04:40
수정
2019.02.23 15:5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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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그다드, 중세 이슬람 황금기 지혜의 보고

※ 이슬람 국가 모로코에서 이슬람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정명 명지대 교수가 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는 이슬람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매주 들려드립니다.

바그다드의 알 피르두스 광장의 모습.로이터 연합뉴스
바그다드의 알 피르두스 광장의 모습.로이터 연합뉴스

문명은 생명체와 같아서 부단히 주변과 소통하다가도 갈등하며 진보하다가도 쇠락하기를 반복한다. 이슬람 문명도 다른 문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 이슬람 문명이 식민지 경험, 늦은 근대화, 전쟁과 테러 등으로 얼룩진 암울한 시대에 처해 있는 것과 달리 중세 시기에는 개방적인 자세로 활발히 교류하며 세계 문화의 주류를 형성했다. 2003년 미국의 공격으로 곳곳이 파괴돼 남루해진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바그다드는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고, 과학과 철학을 자유롭게 탐구하며, 타민족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던 이슬람 문명 황금기의 중심 무대였다.

◇압바스조의 수도 바그다드, 코스모폴리탄 도시로 성장하다

이슬람 문명은 7세기 초부터 주변의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를 정복하며 시리아, 이라크, 이란, 북아프리카, 스페인 등으로 급속히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첫 번째 등장한 이슬람 제국이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세워진 우마이야조(661~750)였고, 두 번째 제국은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건설된 압바스조(750~1258)였다.

750년 우마이야조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제국을 건설한 압바스조가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은 새로운 수도 바그다드의 건설이었다. 바그다드는 육로를 통해 이라크, 이란, 시리아가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했다. 뿐만 아니라 문명의 발상지인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물줄기가 가장 가깝게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주변의 토지가 비옥했다. 압바스조는 운하를 파서 두 강을 연결해 바그다드를 물류의 중심지로 육성했다. 이 덕택에 바그다드는 유럽, 아프리카, 인도, 중앙아시아, 중국을 육로와 수로를 통해 연결하는 국제무역의 관문이 됐다. 또한 바그다드는 현지에서 생산된 직물, 피혁, 종이 등과 해외에서 수입된 향료, 비단, 도자기 등이 넘쳐나는 거대한 상업 도시였다.

상상으로 복원해 본 원형 모양의 9세기 바그다드 왕궁의 모습.
상상으로 복원해 본 원형 모양의 9세기 바그다드 왕궁의 모습.

경제와 상업의 번성은 주변의 인구를 바그다드로 끌어모았다. 그 덕에 바그다드는 건설된 지 한 세기밖에 지나지 않은 9세기 무렵 인구 100만명에 달하는 거대 도시로 성장했다.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인구가 20만명 정도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바그다드는 중국을 제외한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당시 바그다드에는 아랍 무슬림 외에 그리스도교도, 유대인, 조로아스터교도, 페르시아인, 시리아인, 중앙아시아인 등 종교, 문화, 출신 배경이 다른 여러 민족이 함께 살았고, 바그다드는 코스모폴리탄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압바스조 시절 이슬람 제국의 통치자는 아랍 무슬림이었지만, 궁정의 행정업무를 주관하고 농업과 상업 기반 경제 활동을 주도하며 과학과 문화 발전에 기여했던 이들은 다름 아닌 다양한 배경 출신의 이민족이었다.

◇계몽군주 알마문, 지혜의 전당을 설립하다

코스모폴리탄 국제도시로 성장한 압바스조의 수도 바그다드는 동서고금의 지식과 지혜가 한곳에 모여 새롭게 융합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다. 압바스조의 칼리파들은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 등으로부터 철학, 의학, 천문학, 점성술, 수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술 서적을 수입하고 이를 아랍어로 번역시키는 데 재물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의 귀에 익숙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서인 ‘알마게스트’, 유클리드의 수학서인 ‘원론’, 인도학자 브라마굽타의 수학서 ‘싯단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서인 ‘영혼론’ ‘범주론’ ‘니코마코스 윤리학’, 플라톤의 철학서인 ‘티마이오스’ ‘소피스트’ ‘공화국론’ 등이 모두 바그다드에서 아랍어로 차곡차곡 번역됐다.

바그다드에서 진행된 번역 사업은 9세기 무렵 절정에 달했는데, 당시의 번역은 양적인 방대함과 질적인 수준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의 전문 학술 서적이 거의 몽땅 아랍어로 옮겨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바그다드에서 아랍어로 번역된 수많은 그리스 원전은 방대한 이슬람 영토 각지로 전해졌고, 12세기 무렵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에서는 아랍어본 서적이 라틴어로 재번역 되어 유럽에서 르네상스 운동이 개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3세기 바그다드 도서관에서 학자들이 토론하는 모습. 알하리리의 작품 ‘마카마’에 수록된 삽화.
13세기 바그다드 도서관에서 학자들이 토론하는 모습. 알하리리의 작품 ‘마카마’에 수록된 삽화.

주목할 만한 사실은 압바스조의 번역 운동은 개인적 차원에서 우연히 또는 호기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번역은 정부의 후원하에 잘 조직된 프로그램에 의해 진행됐다. 당시 번역 사업은 압바스 제국의 사회 전반적인 특징이었고, 신분이 높은 제후에서부터 상인과 은행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배계층으로부터 열렬한 후원을 받았다.

압바스조의 번역운동은 칼리파 알만수르(754~775 재위) 시대부터 시작되었고, 특히 7대 칼리파였던 알마문(813~833 재위)의 시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했다. 830년경 알마문은 외국의 과학, 철학 서적 번역과 연구를 위해 바드다드에 ‘지혜의 전당(Bayt al-Ḥikma)’을 설립했다. 지혜의 전당은 연구원과 도서관과 번역국을 합쳐 놓은 것으로 헬레니즘 시대에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세운 무세이온 이래 최대 규모의 학술교육기관으로 여겨진다.

알마문은 학자들과 토론을 즐기고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자신이 직접 과학 실험을 계획했던 호학자(好學者)이자 계몽군주로 유명했다. 한 예로, 그는 지구의 크기가 실제로 얼마인지 궁금해 과학 실험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고대 그리스 수학자 에라토스테네스의 실험을 확대해 태양의 고도 측정을 이용, 지구의 대원(Great Circle)에서 1도의 길이를 측정하기로 결심하고 천문학자, 측량사, 도구 제작자로 구성된 연구팀 둘을 꾸려 모술 근처인 신자르 사막으로 파견했다. 그 결과 알마문의 연구팀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지구의 원주와 비슷한 수치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 왜 압바스조의 통치자들은 고대 그리스에 집착했나?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왜 압바스조의 칼리파들은 굳이 이방인, 그 중에서도 고대 그리스 학술서 번역에 광적이라고 할 만큼 열을 올렸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학자마다 다르지만, 대부분은 실용적 차원에서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압바스조가 비록 이슬람을 국시로 내걸었고 최고 통치자인 칼리파가 이슬람의 종교와 정치적 지도자임을 내세웠지만, 결국 국가의 체계적 발전을 위해서는 과학, 의학, 철학 등과 같은 보편적 이성 학문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이슬람 역사학자 디미트리 구타스는 저서 ‘그리스 사상과 아랍 문명’에서 흥미로운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압바스조의 통치자가 번역 사업에 몰두한 가장 큰 이유는 ‘국력의 과시’였다는 것이다. 비록 압바스조가 경제, 상업, 인구, 군사 면에서 서양을 압도할 만큼 외적으로 성장했지만,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문화의 중심지는 여전히 지중해 건너편에 자리 잡은 비잔티움 제국이었다. 압바스조의 칼리파들은 번역을 통해 자신들이야말로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비잔티움 제국보다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열린 정책이 만든 학문 중심지 바그다드

압바스조 통치자들로 하여금 번역 사업에 몰두하게 만든 진짜 동기가 무엇이었든, 우리는 그들에게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어떤 문명이건 융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용과 개방적인 환경이 조성되도록 정책을 만들고 실천해야 한다는 점이다. 압바스조의 통치자들은 바그다드에 모여든 다양한 이민족에게 관용적인 정책을 취했을 뿐만 아니라, 인재 발탁에서도 종교나 출신지를 가리지 않는 열린 자세를 보였다.

지혜의 전당 2대 원장인 후나인 븐 이스하크.
지혜의 전당 2대 원장인 후나인 븐 이스하크.

압바스조의 파격적인 개방 정책은 알마문이 설립한 지혜의 전당 초대 원장인 이븐 마사와이흐, 2대 원장인 후나인 빈 이스하크, 3대 원장인 이스하크 빈 후나인 등이 모두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도였다는 점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원래 네스토리우스파 교도들은 5세기 무렵 예수의 인성론을 주장했다가 비잔티움 제국에 의해 이단자로 낙인찍혀 그리스의 에데사로부터 추방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압바스 제국에서는 종교적 자유를 누리며 그리스 학문의 전파자로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 이처럼 압바스조의 통치자들은 종교, 출신, 문화적 배경을 따지지 않고 광범위한 인재풀을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첩경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김정명 명지대 아랍지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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