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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담긴 지폐 한 장, 열 역사책 안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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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담긴 지폐 한 장, 열 역사책 안 부럽다

입력
2019.02.21 17:21
수정
2019.02.2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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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발행된 네덜란드 지폐 길더. 옥세나아르가 디자인한 지폐의 대표작이다. 마음서재 제공
1985년 발행된 네덜란드 지폐 길더. 옥세나아르가 디자인한 지폐의 대표작이다. 마음서재 제공

네덜란드 여행자 가운데 현지 화폐에서 ‘모더니즘’을 읽어낸 이는 몇이나 될까. 지브롤터의 5파운드 지폐 끄트머리에 왜 원숭이 한 마리가 있는지 호기심을 갖는 이가 있을까. 대만의 인문학자이자 미학자인 셰저칭은 말한다. “모든 지폐는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고. 화폐의 역사를 쫓아 무려 97개국을 여행한 그는 한 나라의 정체성을 화폐로 읽는다.

‘지폐의 세계사’는 42개국의 화폐에 얽힌 역사, 문화를 다룬다. 셰저칭이 지폐 디자이너를 직접 만나거나 지폐 속 유적을 찾아 세계 곳곳을 훑은 경험이 녹아있다. 그가 이토록 지폐에 애착을 갖게 된 건 유년시절의 기억 때문. 1961년 제작된 옛 체코슬로바키아 지폐는 그를 상상의 나라로 인도하는 문이었다. 그는 강과 다리가 그려진 지폐를 들여다 보며 가보지 못한 나라인 체코의 풍경과 문화를 상상하곤 했다.

지폐의 세계사

셰저칭 지음ㆍ김경숙 옮김

마음서재 발행ㆍ326쪽ㆍ1만6,000원

지브롤터 지폐의 원숭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은 지브롤터인들은 ‘원숭이가 거대 바위산에서 사라지면 영국의 통치가 끝난다’는 민담을 믿었다. 민담이 신경 쓰인 영국은 원숭이 개체 수가 줄까 봐 걱정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원숭이가 몇 마리 남지 않자 당시 수상인 윈스턴 처칠이 원숭이를 늘리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전쟁이 끝난 후 원숭이는 엄청나게 번식했고, 이내 지브롤터의 대표 상징물이 됐다. 지브롤터는 이 같은 역사를 담아 1995년부터 지폐에 원숭이를 그려 넣기 시작했다.

미학자인 저자가 꼽은 가장 아름다운 지폐는 네덜란드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명작’으로 평가 받는 그 지폐다. 1960~1980년대 지폐 기획을 총괄한 네덜란드 예술가 옥세나아르 작품이다. 몬드리안의 영향을 받은 옥세나아르는 지폐 디자인에서 고풍스러움을 걷어냈다. 주로 장황하게 묘사되는 지폐 속 인물도 친숙하게 표현했다. 단순하고 직관적인 디자인으로 바꾸고 해바라기, 바늘꼬리도요새, 토끼 같은 친근한 오브제를 그려 넣었다.

1973년 캄보디아가 발행한 1,000리엘 지폐. 타솜의 '앙코르 미소'가 그려져 있다. 마음서재 제공
1973년 캄보디아가 발행한 1,000리엘 지폐. 타솜의 '앙코르 미소'가 그려져 있다. 마음서재 제공

후투족과 투치족 간 뿌리 깊은 대립을 보여주는 브룬디의 화폐, 1차 세계대전 당시 통화 발행량을 크게 늘리느라 난잡하고 저속한 색을 입은 독일의 긴급 통화, 과거 찬란한 영광의 시대를 기억하려는 듯 강렬한 휘장을 그려 넣은 포르투갈의 화폐….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 화폐에 역사가 차곡차곡 쌓여 있음을 확인하고 나면, 환전소에서 받아 드는 돈이 달리 보일 것이다.

문득 한국 화폐에 그려진 인물과 풍경이 궁금해진다. 1만원 지폐라고 하면 세종대왕이 금세 떠오르지만, 세종대왕 뒤편에 훈민정음 다섯 줄이 적혀 있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불휘기픈남간 바라매아니뭴썌 곶됴코여름하나니 새미기픈므른 가마래아니그츨쌔.’(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아 꽃도 좋고 열매가 풍성하며,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마르지 않는다.) 용비어천가의 한 대목이다. 이처럼 지폐를 다시 보게 되는 것, 책이 알려 준 기쁨이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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