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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하려고 애쓰지 마라” 20세기 패션 디자인 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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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하려고 애쓰지 마라” 20세기 패션 디자인 발전소

입력
2019.02.20 17:52
수정
2019.02.20 18:58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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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션의 전설, 칼 라거펠트를 생각하며 

칼 라거펠트. 샤넬 제공
칼 라거펠트. 샤넬 제공

 ◇ 디자이너의 죽음 

19일 늦은 밤,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향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인은 췌장암이었다. 착잡했다. 패션 디자이너는 옷의 언어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세계적으로 매년 10개의 토착 언어가 사라진다고 한다. 위대한 디자이너의 죽음은 곧 언어의 죽음이다. 그가 창조한 색과 형태, 영감의 문법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라거펠트를 한 마디로 설명하긴 어렵다. 패션 디자이너란 협소한 직함에 가둬두기엔, 그의 활동범위는 광범위했다. 그는 패션 브랜드 샤넬의 문화적 유전자를 바꾼 혁명가였다. 사진작가 겸 각종 광고디렉터로서 패스트패션 브랜드 H&M과 아이스크림 브랜드 매그넘의 광고영화를 제작했고 각종 주택과 아파트의 인테리어를 설계한 건축가로, 심지어 서점 운영자로도 활동했다. 그 스스로 ‘일을 할 때 영감은 찾아오는 법’이라며 일에만 푹 빠져 살았던 일 중독자였다. 복식사가인 노엘 팔로마 로빈스키는 그를 ‘걸어 다니는 모순덩어리’라고 칭했다. 라거펠트는 그가 맡은 패션 브랜드의 정신적 유산을 숙지하면서도, 미래의 변화를 포착해서 옷에 녹여낼 줄 알았다. 그는 패션을 통해 변화와 전통이라는 두 개의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었다. 최근 패션계에선 디자이너의 시대가 가고, 아트 디렉터의 시대가 왔다고 말한다. 패션 디자이너의 영역이 옷의 디자인을 넘어, 브랜드 이미지를 위한 모든 시각적 이야기를 창조하는 일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감히 이런 트렌드의 시작이 라거펠트부터였다고 단언한다.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20세기 패션 디자인의 발전소였다.

지난해 12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린 ‘2018~2019 샤넬 패션쇼’에서 칼 라거펠트(가운데)가 비르지니 비아르(왼쪽) 샤넬 부수석과 런웨이를 걷고 있다. 이 쇼가 그의 마지막 런웨이였다. 샤넬 제공
지난해 12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린 ‘2018~2019 샤넬 패션쇼’에서 칼 라거펠트(가운데)가 비르지니 비아르(왼쪽) 샤넬 부수석과 런웨이를 걷고 있다. 이 쇼가 그의 마지막 런웨이였다. 샤넬 제공

 ◇ 샤넬의 전설, 리부트 

1983년 그는 샤넬의 디자인을 맡았다. 현대 패션의 출발점이었던 샤넬의 유산을 잇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는 보수적인 샤넬의 기존 고객층을 만족시킴과 동시에 샤넬을 낡은 시대의 산물로 바라보는 젊은층을 공략해야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당대의 랩 문화와 다소 거친 거리 문화의 요소를 샤넬에 녹여냄으로써, 브랜드 이미지를 젊게 만들었다. 지독한 활자 중독자였던 그에게 18세기의 철학자 볼테르의 말은 앞으로 샤넬의 유산을 어떻게 이어갈지에 대한 밑바탕이 되었다. “설명하려고 애쓰지 마라, 가치 없는 것일수록 구구절절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라거펠트는 샤넬을 새롭게 하기 위해 샤넬의 사적인 삶, 그녀가 좋아했던 취향을 다시금 검증했다. 이 과정을 통해 샤넬이 지켜냈던 모든 것을 새롭게 변형시켜 제시할 뿐 메시지를 강제하지 않았다. 영감을 위해 예술의 경계도 넘나들었다. 이런 철학은 톰 포드와 마크 제이콥스, 빅터 앤 롤프와 같은 당대의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라거펠트는 스스로 브랜드의 이미지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등장하는 검은색 선글라스와 분을 발라 곱게 넘긴 포니테일, 빳빳하게 깃을 올린 재킷, 장갑을 낀 이미지는 서구에서 18세기 정신의 귀족을 추구하던 댄디의 모습이었다. 그는 평생을 댄디로 살았고 이런 자신의 이미지를 샤넬의 전통적인 수트를 비롯한 디자인에 적용하곤 했다.

독일 베를린의 칼 라거펠트 브랜드 매장 앞을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베를린=로이터 연합뉴스
독일 베를린의 칼 라거펠트 브랜드 매장 앞을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베를린=로이터 연합뉴스

 ◇ 자유로운 소풍을 마치고 

라거펠트는 창작 활동 자체를 매우 즐겼다. 그는 창작과정에서 어떤 스트레스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펜디와 클로에같은 명품 브랜드의 디자이너로도 활동했다. 각 브랜드를 궤도에 올려놓는데 공을 세웠지만 항상 자유로웠다. 자기가 맡은 브랜드에 대한 관심이 식으면 가차없이 떠났다. 명품 브랜드라 할지라도 자신의 창작을 가로막거나, 상상력을 제약할 때는 언제든 내려놓는 용기도 있었다. 그는 20세기와 21세기, 두 세기에 걸친 복식사를 새롭게 써 내려간 패션계의 신화였다. 더 이상 그를 런웨이에서 볼 수 없는 게 아쉽다. 패션의 한 시대가 이렇게 저물어간다.

김홍기 패션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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