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3품관 승지서 7품 금정찰방 강등된 다산
다산이 좌천돼 내려간 금정역이 있던 충남 청양군 화성면 용당리 마을 진입로에는 다산사적비(맨 왼쪽)가 서 있다. 그 옆에는 이곳에서 금정찰방을 지낸 사람들의 선정비가 있다. 정민 교수 제공
금정역의 위치와 찰방의 역할

다산이 좌천되어 내려 간 금정역(金井驛)은 어디에 있었을까. 금정역은 원래 충남 청양군 남양면 금정리에 있었으나, 1756년(영조 32)에 인근의 용곡역(龍谷驛)과 합치면서 그리로 옮겼다. 1795년 다산이 근무했던 금정역은 예전에는 홍주목(洪州牧)에 속했고, 오늘날 행정구역으로는 청양군 화성면 용당리(예전 용곡)에 있었다.

이 글을 쓰려고 금정역에 다녀왔다. 화성면 용당리 마을 입구에 금정도찰방 다산정약용선생 사적비가 서 있다. 그 옆에 예전 이곳에서 금정찰방을 지냈던 이들의 선정비 셋이 나란히 섰다. 금정역의 옛 자취는 마을에서 달리 찾을 수가 없다. 역사(驛舍)가 있었을 법한 마을 입구 집의 담장 벽화 속에만 달랑 흔적이 남았다.

이곳에서 승용차로 5분 거리에 병인박해(1866~1871년∙대원군이 프랑스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를 탄압한 사건) 때 순교한 천주교도의 시신을 몰래 매장한 다락골 줄무덤 성지가 있다.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신부로 순교한 최양업 신부의 생가가 그 바로 근처다. 김대건 신부도 당진에서 태어났으니, 충청도 내포 일대는 진작부터 천주교의 못자리로 불려온 신앙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초기 교회의 10인 사제 중 한 사람으로 내포(內浦)의 사도로 불린 이존창(李存昌)이 교회를 이끌고 있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금정역 조에 따르면 이곳에는 음관(蔭官) 6품직의 찰방 1인을 두고, 소속된 아전이 121명, 남자 종 175명과 여자 종 21명이 있었다. 다산은 3품관이던 자신이 7품직이 되어 내려왔다고 썼다. 금정역은 당시 국가에서 운영하던 원역(院驛) 중에서도 꽤 규모가 있던 역이었다. 말은 상등마가 2필, 중등마가 4필, 하등마가 5필 등 모두 11필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는 일은 나랏일로 오가는 관원에게 숙소와 마필과 부대 인원을 제공하는 것인데, 소속 인원이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아 마필 관리 외에 다른 부가적 업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승지였던 다산은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의 꽃보직에서 11마리 말을 관리하는 7품직의 시골 역장에 좌천되었다. 무려 4단계의 강등인 셈. 마음속에 천주교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고, 주문모 신부의 탈출을 직접 도왔던 다산이 이제 천주교도 검거에 드러나는 공을 세워야 하는 곤혹스럽고 모순적인 상황에 놓였다. 중압감 때문이었는지 1795년 7월 29일에 금정역에 도착해 짐을 푼 다산은 평소 그답지 않게 조급했다.

승지였던 다산은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의 꽃보직에서 11마리 말을 관리하는 7품직의 시골 역장에 좌천된 것이었다. 금정역사가 있던 자리, 민가 벽에 말과 선비 그림이 그려져 있다. 정민 교수 제공
다산이 관찰사 유강에게 보낸 편지

도착한 이튿날 그는 충청도관찰사 유강(柳焵)에게 천주교도를 검거하고 교화시킬 방안에 대해 의논하는 ‘유관찰께 드림(與柳觀察)’이란 편지를 썼다. 그 중 한 대목이다.

“이 고장으로 저를 보내신 것 또한 성상께서 뜻하신 것이 있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찰방은 본래 객관(客官)이어서 백성을 교화하거나 권면하여 바로잡는 책임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또 모두 자취를 감추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속이고 숨기는 행실이 많습니다. 말을 타고 강변을 달리다 보면 보이는 것은 박 넝쿨 얹힌 울타리와 오두막집들이 이따금 마을을 이룬 것이 보일 뿐입니다. 저들이 그 속에 몰래 숨어 새처럼 모였다가 쥐처럼 손을 모으는 것을 무슨 수로 적발하겠습니까? 마땅히 말을 내달려 찾아 뵙고 가르침을 청해야 할 것이나, 이곳에 오느라 지쳐서 병이 든지라 수영(水營)에 순찰 오실 날을 기다립니다. 먼저 이 편지를 여쭈오니 삼가 지도하여 주십시오.”

새처럼 모였다가 쥐처럼 공손히 손을 모으는 자들이란 말할 것도 없이 함께 모여 기도하던 천주교도들을 가리킨 표현이다. 마필 관리의 책임을 맡은 찰방이 임지에 도착한 다음날 엉뚱하게 천주교도 검거 방안을 충청도관찰사에게 물었다.

이 편지에 대한 유강의 답장은 다산의 일기 ‘금정일록’ 8월 4일자에 실려 있다. 유강은 답장의 서두에서 은대(銀臺)의 옛 신선이 백루(白樓)의 영승(令丞)으로 내려온 것을 위로하면서 이렇게 썼다.

“말씀하신 일은 감영에 온 뒤로 한시도 감히 해이하지 않고 여러 차례 탐문코자 하였으나, 얻기가 어렵더군요. 말씀대로 명백하게 증거를 잡은 것 없이 단지 있다고 지목하거나 의심스런 비방이 모인 곳을 적발하려 한다면, 요즘 같은 삐딱한 세상에서 잘못 죄에 얽어 넣는 근심과 맞닥뜨리기 쉬울 것입니다. 이는 평생 공변되고자 하는 마음을 저버리는 것일 뿐 아니라 위로 임금을 저버리는 일이니, 마땅히 또 어떻겠습니까?”

뜻밖에 유강은 천주교도 검거가 그렇게 조급하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신중하라고 충고했다. 편지 끝에는 “영감은 이미 범에게 다친 사람인지라 분하고 미워하는 뜻이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백배나 더할 터이지만, 이럴수록 더욱 마땅히 자세하게 살펴야 할 것이외다”라고 까지 썼다.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성과를 내려는 다산에게 이 문제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천천히 살펴야 한다고 타이른 것이다.

한편 유강의 답장에서 ‘말씀하신 일’을 운운한 것으로 보아 다산이 보낸 원래 편지에는 별지에 천주교도 색출에 대한 임금 정조의 특별한 당부와, 그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홍주목사 유의란 인물

당시 금정역은 관할이 청양군이 아닌 홍주목(洪州牧)에 속해 있었다. 다산은 직속 상관인 홍주목사 유의(柳誼, 1734~?)에게도 같은 날 똑같이 편지를 보냈다. 문집에 실린 ‘유홍주에게 드림(與柳洪州)’이 그것이다. 중간 대목만 인용한다.

“경내에 들어온 지 며칠 만에 이미 어진 명성이 자자하고 노래 소리가 길에서 들려 백성들이 한나라 때 선정(善政)으로 이름 높던 소신신(召信臣)과 두시(杜詩)처럼 여긴다고 하더군요. 다만 유독 백성을 인도하여 그치게 하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만은 어째서 이제껏 묵혀두고 계시는지요? 제 생각에 집사께서 백성을 안정시켜야지 소요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셔서 잠시 따뜻하게 적셔 머금어 기르시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법으로 금함이 너무 풀어지고 넓어져서 약으로도 구할 수 없는 지경이 이르게 된다면 또한 조정의 명령을 선양하는 도리에 흠결이 있지 않을런지요? 찰방의 직분은 망아지를 치는 직분인지라, 풍속을 교화하고 권면하여 바로잡는 책임은 제 소관은 아닙니다. 이에 정령(政令)의 끝에 스스로를 기대어 힘을 보탤까 합니다. 그래서 감히 품의하는 바가 있으니 회답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산의 글에는 뜻밖에도 그간 유의가 천주교도 검거나 교화에 힘을 쏟지 않아 성과를 내지 못한 것에 대해 은근히 나무라는 뜻이 담겨있다. 자기 소관의 일은 아니나 힘을 보태려고 의견을 품의하였으니, 답장을 달라고 적었다. 품의 내용은 역시 별지를 통해 전달되었던 듯 다산의 편지 속에는 없다.

하지만 다산은 홍주목사 유의에게서 답장을 받지 못했다. 강직하고 청렴했던 유의가 다산의 글을 공문이 아닌 사적인 청탁 편지로 여겨 열어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8월 12일에 수영(水營)에서 유의를 만나 왜 답장하지 않았느냐고 따져 묻자, 유의는 태연하게 벼슬살이 할 때에는 사적인 편지를 뜯어보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겉봉을 뜯지 않은 상자에 가득한 편지들을 내 보였다.

다산이 그 뜻은 알겠으나 자신이 보낸 것은 공적인 일이었다고 볼멘소리를 하자, 유의가 “그렇다면 공문으로 보냈어야지” 하고 대답했다. 다산이 비밀스런 내용이라 그랬다고 하니, 유의는 “그럼 비밀 공문이라고 했어야지” 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다산이 아무 말도 못했다. 이 에피소드가 다산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겼던지, 훗날 ‘목민심서’의 ‘율기(律己)’ 조에 목민관이 지녀야 할 바른 행동의 예로 자세히 적어 두었다.

글 속의 비밀스런 일이란 당연히 천주교도의 처리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로써 다산에게 맡긴 금정찰방의 직임은 겉으로 보이기 위한 것이었고, 다산에게 맡겨진 실제 임무는 천주교도를 검거하고 회유해서 양민으로 돌아가게 하는 일이었음이 다시금 확인된다. 정조는 다산에게 이 거북한 임무를 맡기고, 그가 이를 잘 수행케 함으로써 다시 중앙으로 불러들일 명분을 삼고자 했다.

다산의 천주교도 문초와 회유

‘금정일록’에 따르면 8월 17일에 다산은 천주교도 김복성(金福成)을 붙잡아다가 자백을 받았다. 8월 30일에는 김복성이 다시 네 사람을 더 이끌고 와서 함께 자수했다. 이때 이수곤(李壽崑)이란 사람은 자신이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김복성은 홍주군 흥구향면(興口香面) 월내동(月乃洞)의 산지기를 지낸 인물이었다. 충청도관찰사 박종악(朴宗岳, 1735~1795)이 1792년 1월 3일에 정조에게 보낸 보고서에 그의 이름과 직분이 등장한다. 이 보고서에는 그가 천주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홍낙민(洪樂敏)을 자기 집에 재워 준 인물로 나온다. 또 그의 집에서 나온 천주교 서적을 불태운 내용도 보인다.

김복성은 금정역 인근 천주교도의 지도자급에 속한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가 산지기로 있던 흥구향면은 바로 금정역이 위치한 마을이고, 이곳에는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趙斗淳)의 선산과 조두순의 묘소가 있다. 관련 내용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박종악의 ‘수기(隨記)’ 속에 자세히 적혀있다. 이수곤이란 이름 또한 1796년 10월 24일자 ‘일성록(日省錄)’ 기사 중 정조가 온양행궁에 행행했을 당시의 포상자 명단 속에 금정역리의 신분으로 한차례 나온다. 그는 당시 67세였다.

다산은 금정역에 부임한 지 17일 만에 천주교도 중 금정역 인근의 지도자 김복성을 붙잡아 와서 단번에 자백을 받아냈다. 다시 13일 뒤에는 그 김복성이 네 명의 천주교도를 더 데리고 와서 이들을 배교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관찰사 유강이 그렇게 탐문하고도 여의치 않던 일을 다산은 한 달도 안 되어 처리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마치 준비된 연출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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