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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법관의 감수성

입력
2019.02.18 18: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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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대법정 앞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정의의 여신이 왼손에 든 법전은 법치를, 오른손에 든 저울은 공평무사한 결정을 상징한다. 신상순 선임기자
대법원 대법정 앞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정의의 여신이 왼손에 든 법전은 법치를, 오른손에 든 저울은 공평무사한 결정을 상징한다. 신상순 선임기자

형사재판 발전사는 재판을 거는 쪽(주로 국가)에 점점 불이익을 부과해 간 과정이었다. 권력이 개인을 피고인으로 세워 범죄자로 확정하기까지, 그 과정을 실체적ㆍ형식적으로 더 까다롭게 만들어 온 것은 역사발전의 명확한 방향이었다.

왕조시대, 신민은 왕의 심증에 따라 언제든 대역죄인이 될 수 있었다. 대체로 그 과정엔 증거나 검증은 필요치 않았다. 근세 초 교회는 애꿎은 이를 마녀라 고발하고, 스스로 판결을 내려 화형대에 세웠다. 소추와 재판권한이 분리된 현대에도 형사재판을 거는 쪽은 재판받는 이보다 항상 절대적 우위에 서 있었다. 유신정권ㆍ5공화국 조작 사건에서 너무도 쉽게 유죄가 인정된 것을 봐도 그렇다.

전능했던 소추권자가 피고인과 비슷한 지위로 내려와 공판의 한 당사자로 대접받은 건 매우 최근 일이다. 이제 국가는 고문ㆍ도청으로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로 유죄를 입증할 수 없다. 진실을 밝히는 주무대는 검사실에서 법정으로 옮겨졌다.

이처럼 사법제도는 형사재판을 거는 쪽에 갈수록 높은 입증책임을 부과해, 법원이 유죄를 선고하기 점점 어려워지는 쪽으로 발전했다. 유전정보(DNA), 폐쇄회로(CC)TV, 위치추적장치(GPS) 발전은 과거 적발이 어렵던 범죄를 단죄할 수 있게 했지만, 이는 증거 자체의 범위가 넓어진 것일 뿐 증거를 해석하는 법관의 재량 자체를 넓힌 건 아니었다.

판사가 유죄를 내리기 쉬운 세상이 결코 우리가 지향할 모습이 아니라는 데 공감대도 형성됐다. in dubio pro reo, 의심스러우면 피고인 이익으로.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법학자가 처음 제시한 이 가치를 향해, 우리는 접근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대법원이 들고 나온 성인지 감수성은 흐름을 바꿨다. 성인지 감수성은 ‘생활에 존재하는 성별 불균형을 인식해 성차별 요소를 감지하는 민감성’이란 뜻. 이 개념은 유무죄 경계에 선 사건에서 법관의 심증을 유죄 쪽에 가깝게 끌어당기며 큰 위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성차별이 실재해 온 현실을 감안할 때, 공익을 추구하는 적극적 국가 작용인 행정의 영역에서 성인지 개념이 도입돼 예산 배정이나 사업성 판단에 활용되는 것은 필요할 수 있다. 엄존하던 차별을 개선하고, 배려받지 못하던 소수자를 챙기는 일에 효과적 행정력이 미치도록 하는 일은 정당하다. 만일 성인지 감수성이 재판 절차 수준에서만 도입됐더라면 큰 논란이 일지 않았을 것이다. 비공개 재판을 확대하고, 피해복구와 상담에 인력ㆍ예산을 투자하며, 피해상황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과정에는 감수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행정이나 사법절차의 울타리를 넘어, 유무죄와 흑백을 가리는 사법 본질의 영역에 이를 적용하는 것은 더 신중했어야 했다. 대법원은 성인지 감수성을 ‘법원이 성폭력 사건을 다룰 때 가져야 할 자질’의 개념으로 설정했는데, 피해자의 맥락에 좀 더 공감한다는 얘기는 결국 법관이 같은 증거를 두고 유죄로 심증을 굳히는 과정에 활용될 소지가 크다.

이 대법원 판례는 사법부가 행정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이후 범죄 입증 책임을 덜고 법원이 더 쉽게 유죄를 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간 ‘첫 후퇴 사례’로 기록될 지 모른다. 대법원은 이 거대한 패러다임 변화를 들고 나오며 전원합의체를 거치지도 않았다.

이번 판례로 ‘합리적 이성’에 기반했던 법관의 자유심증 형성에 감수성 변수가 비집고 들어갈 작은 틈이 허용됐다. 감수성 장착으로 넓어진 법관의 재량은 CCTV와 DNA가 감지해 내지 못한 ‘결정적 장면’을 향해 한발 더 다가가는 긍정적 효과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법관의 재량이 커지는 과정에는 언제나 오판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정의를 실현할 가능성과 오판의 개연성을 동시에 높이는 제도와 개념을 두고 고민해야 할 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 왔는지, 그리고 해야 할 지는 비교적 자명하다.

이영창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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