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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훈령에 의한 적폐청산 한계

입력
2019.02.15 18:00
수정
2019.02.15 18:12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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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눈높이 못 맞추는 검찰 적폐청산

법령 아닌 훈령으론 근거, 실효성 부족

참여정부는 법률로 추진, 논란 피해가

미국과 한국의 정치가 닮은 점 중 하나는 국회 패싱이다. 오바마 정부의 친이민, 트럼프 정부의 반이민의 상반된 정책이 행정명령으로 이뤄졌다. 야당 힘이 더 센 의석 구조에서 합의와 타협이 힘들 때 행정조치는 만능 칼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행정명령, 행정입법은 끊이지 않는 논란거리다. 박근혜 정부는 시행령으로 어린이집 누리과정을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을 통해 조달토록 해 상위 법을 위반했다. 국회 의견이 필요 없는 행정조치는 선의로 출발하지만 끝은 그렇지 못했다.

지난해 거의 모든 부처에 적폐청산을 위한 위원회가 구성됐다. 법무부에는 검찰과거사위원회가, 대검에는 과거사진상조사단이 마련됐다. 역사상 처음으로 검찰 과거를 돌아보며 적폐를 도려낸다는 명분은 컸다. 검찰이 공권력을 얼마나 남용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단죄했는지 드러날 것이란 기대도 당연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난달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검찰의 과거사 청산 등 대통령령, 법무부령 개정으로 가능한 검찰개혁은 대부분 이뤄졌다고 페이스북을 통해 자평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과거사위와 진상조사단의 근거 규정은 법령이 아닌 훈령으로 돼 있다. 법령이란 법률, 대통령령, 총리령, 부령으로 모두 입법예고 등 제정 절차가 까다롭다. 훈령은 법령이 아닌 행정규칙으로 일종의 행정명령이다. 부여된 업무를 수행하려면 법에 근거한 위임이 필요하다. 하나의 예로, 진상조사단 규정이 개인정보의 집합체인 수사기록, 재판기록의 제출 의무를 적시하고 있지만, 법적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이런 의무 부과는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이 된다. 과거 국가운영이 법령에 의하지 않은 점을 단죄하려는 것이 적폐청산인데 그 절차에 법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참여정부 때 제정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기본법’이나 ‘군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이 모두 법률로 제정된 것도 이 같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법률은 조사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제척ㆍ기피와 조사결과의 통보, 이의신청 제도도 두고 있다. 하지만 법을 관장하는 법무부와 법을 집행하는 대검의 과거사 조사 훈령에는 이마저도 없다. 하물며 경찰의 과거사위도 조사결과의 신뢰성이 흔들릴까 봐 두고 있는 규정이다.

그런 까닭에 법률에 정통한 검찰 내부와 관련된 진상조사의 진도는 더디기만 하다. 민간인 사찰사건에 대해 전 중수부장은 반발하고, 용산참사 사건 수사 참여자들은 민ㆍ형사를 통한 불복을 거론한다. 작년 국정감사에서 김학의 전 차관의 경우 소환조사는커녕 전면 부인하는 서면 의견서만 받았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수사검사에게는 조사 요구도 못했다고 의원들이 허탈해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거사위원장이 조사과정과 결과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유지하기 부담스럽다며 사퇴소동을 벌인 것도 마찬가지다.

훈령에 의한 검찰 과거사 진상규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출발 때 합의된 불화에 가깝다. 검찰개혁의 성과로 과거사 청산을 든 조국 수석이 부령과 훈령의 차이를 모를 리 없다. 아무리 명분이 거창해도 법률은 지켜야 한다. 과거처럼 진상조사가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정부 시스템에 맞서야 하는 것도 아니다. 검찰 과거사 조사와 청산이 필요하다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방치하는 것은 또 다른 과거사를 만드는 일이다. 손혜원 의원도 언젠가 “지옥으로 통하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고 말했다.

공부 잘하고 말 잘 들어 집안 자랑이던 큰 아들이 알고 보니 일진이었다. 모두가 놀라 일진에 관심이 쏠린 사이 둘째는 어떠했을까. 사법농단 수사 때 한창 유행하던 말이다. 큰 아들인 사법부에선 직전 대법원장과 대법관 2명이 법정에 세워졌다. 그럼 평소 말썽 많던 둘째는 적폐를 청산했을까, 아니면 여전히 사고를 치고 있을까. 검찰 적폐청산은 일어나길 바랐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가깝다. 과거사위와 진상조사단은 활동 기한을 3월까지 연장해 적폐청산을 추진한다. 이대로라면 국민 눈높이에 맞는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

이태규 뉴스1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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