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기행] <9>역사문화명산 ③오대산
오대산 중심지의 대백탑.

중국 최고의 유물로 막고굴(莫高窟)이 있다. 전부를 개방하는 것이 아니어서 735개 석굴 중 겨우 10개 정도 봤다. 나머지는 대부분 책자로 접했다. 61호굴은 문수당(文殊堂)이라 부른다. 10세기 중엽, 오대 말기 둔황(敦煌) 통치자 조원충이 개축했다. 불단에 있던 문수상은 사라졌지만 사면의 벽화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동쪽 벽에는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에 자리 잡은 불교 국가 우전왕국의 천공공주가 머리에 봉관(鳳冠)을 쓰고 있는데 아름답기 그지없다. 서쪽 벽에는 문수보살의 성지 오대산도(五台山圖)가 새겨져 있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이 그림이 중국 고대 건축의 보물을 발견하는 일등공신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막고굴 도록의 ‘오대산도’. 돈황연구원 편.
오대산 대략 위치. 구글맵 캡쳐.

둔황에서 2,000km, 베이징에서 330km 떨어진 오대산은 ‘중화 10대 명산’ ‘중국 불교 4대 성지’다. 오대산 사찰은 산 전체에 47개가 남아 있다. 동서남북과 가운데, 오대 정상과 산 아랫마을에 사찰이 집중돼 있다. 문수가 설파한 진리 또는 성품이 인격화된 법신을 오방문수(五方文殊)라 하는데 산봉우리마다 나누어 봉공하고 있다. 오대산을 벗어나도 8개의 고찰이 있다. 산 정상과 아래, 산을 벗어난 지역까지 세밀하게 훑어야 진정한 성지순례다.

북문에서 14인승 전용 차량을 타고 11km 떨어진 동대로 오른다. 꼬불꼬불하고 가파르지만 안전하다. 날씨 때문에 시야가 흐리지만 해발 2,795m 망해봉 공기는 맑고 시원하다. 동대에 위치한 문수는 ‘총명(聰明)’이다. 망해사(望海寺)는 예전 모습과 달리 신축했다. 오대 정상의 사찰은 대부분 수나라 때 처음 건축했고 중건을 반복했다. 최근 모습은 도시의 빌딩처럼 밋밋해 실망스럽다. 불자에게 문수가 어떤 건물에 자리 잡고 있는지 중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대산 동대 망해사의 ‘총명’ 문수보살

남대 보제사는 ‘지혜(智慧)’, 서대 법뢰사는 ‘사자후(獅子吼)’, 북대 영응사는 ‘무구(無垢)’, 중대 연교사는 ‘유동(孺童)’의 문수를 대표한다. 서북쪽으로 산길 따라 30분 달리면 화북지방 최고봉인 해발 3,061m 북대 엽두봉에 이른다. ‘무구’를 봉공해서인지 화려한 색감을 배제하고 담백한 느낌을 준다. 문수 옆에 배치한 ‘순진무구’한 보살은 손때가 묻어 아주 정겹다. 운무가 잔뜩 낀 허공을 향해 무심한 자세로 기원하는 사람조차 오대산의 풍광이다.

오대산 북대 영응사
오대산 북대 ‘무구’ 문수전.
오대산 중대 연교사의 문수보살 설법대.

오대산 중대에서 하산하는 길에 본 초원.

서남쪽으로 20분 내려가면 중대 연교사다. 정상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크다. 건물이 너무 큰 탓도 있지만 사람도, 차량도 많아 평지 같다. 웅장한 문수상에 비해 설법대는 짓다 만 공장지대 같아 아쉽다. 고원의 풀을 뜯는 양, 소, 말을 바라보며 바람 불고 운무가 뛰어가는 길을 따라 산에서 내려간다.

오대산은 티베트 불교인 황묘(黄庙)와 한족 불교인 청묘(青庙)가 융합된 채 청나라 시대를 통과했다. 오대산 중심지 ‘대회진’에 위치한 보살정(菩薩頂)을 시작으로 천천히 하산하는 방법이 관람하기에 편하다. 보살정은 티베트 불교의 겔룩파 사원으로 오대산에서 가장 큰 규모다. 5세기 북위시대 처음 세웠으며 중건을 거듭했다. 청나라 강희제와 건륭제가 수 차례 오대산을 방문했을 때 사용한 침궁이다. 만주어로 보살정은 곧 ‘문수보살이 거주한 장소’라는 뜻이다.

뒷문으로 들어가니 대문수전, 대웅보전, 천왕전 순서로 전각을 보게 된다. 대문수전은 문수보살을 중심으로 왼쪽에 관음보살, 오른쪽에 보현보살이 협시한다. 강희제 때 중건하며 황궁처럼 유리기와를 사용해 고궁 내 사찰을 보는 느낌이다. 용과 봉황이 어울린 화새채화(和璽彩畫)만 봐도 보살정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강희제 친필인 오대성경(五臺聖境) 패방이 아니어도 충분히 위엄이 있다.

황궁 양식으로 건축된 오대산 보살정 지붕과 유리기와
보살정의 강희제 친필 패방 ‘오대성경’
‘총카파’를 봉공하는 대웅보전의 건륭제 친필 편액 ‘심인비담’

대웅보전은 여느 사찰과 달리 티베트 불교의 겔룩파를 창시한 총카파(宗喀巴)를 봉공한다. 달라이라마1세로 추존된 겐둔주파(根敦珠巴)의 스승이자 천재 종교 개혁가다. 석가모니 조상 앞에 황색 모자를 쓰고 당당하게 앉았다. 건륭제 친필 편액인 심인비담(心印毘曇)은 심오한 메시지가 담긴 듯 눈길을 유혹한다. 심인은 ‘부처의 내심과 통했다’는 의미다. 그럼 비담은? 신라 화랑의 이름일 리 만무하다. 산스크리어 ‘아비달마(Abhidharma)’에서 온 말이다. 부처의 삼장인 경ㆍ율ㆍ논 중에서 지혜를 주로 설파한 논장(論藏)을 말한다. 지혜의 보살인 문수와 소통하려는 마음, 또는 매듭으로 이어져 있다는 건륭제의 자부심이 아닐까?

미륵보살을 봉공한 천왕전을 지나 칙건진용원(敕建真容院) 문을 지난다. 지붕에는 법륜과 사슴 한 쌍이 금빛 찬란하다. 불ㆍ법ㆍ승 삼보가 탄생한 녹야원 초전법륜(初轉法輪) 당시 부처와 함께 자리한 사슴은 티베트 사원에 항상 등장한다. 칙령으로 건축했다는 문수보살의 진용은 당태종 시대의 전설이다. 승려 법운은 문수상을 세우고 싶었지만, 어떤 얼굴이어야 하는지 몰랐다. 어느날 밤 등불에서 푸른 빛을 뿜으며 형상을 드러낸 보살을 그대로 조상으로 세웠다고 한다. 진용이란 ‘참모습’이니 황제의 칙령을 받을 만하다.

법륜과 사슴이 지붕에 있는 보살정 ‘칙건진용원’
보살정에서 본 대백탑과 행운을 주는 ‘불’자

보살정을 내려가는 계단은 모두 108개다. 하나씩 밟으며 오르면 전생, 현생, 내세의 모든 번뇌를 다 해탈한다고 했던가? 편하게 내려가도 해탈에 도달할 수 있을 지, 누구에게 물어야 지금의 번뇌를 해소할 지 잘 모르겠다. 법문 하나도 풀지 못하는데 어찌 108개나 담고 살아가는지, 그게 중생이런가. 육각의 흰색 바탕에 붉은 글자로 ‘불(佛)’자가 새겨져 있다. 눈을 감고 걸어 부처의 발로 묘사된 마지막 획을 정확하게 잡으면 행운이 생긴다는 속설이 있다. 사람들이 부처의 발가락이라도 잡으려고 줄은 선다. 해탈은 잊고 행운이나 기대해 보자.

보살정에서 멀리 보이는 대백탑과 사이에 현통사(顯通寺)가 있다.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한 때는 서기 1세기 중엽 한나라 시대다. 천축에서 온 고승 가섭마등과 축법란은 뤄양에 백마사(白馬寺)를 세운 후 오대산을 찾아 사원을 건축했다. 중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사찰이다. 처음에 대부영로사(大孚靈鷺寺)로 불리다가 명나라 태조 때 보수하면서 지금의 현통사로 자리 잡았다. 청나라 시대에 이르러 겔룩파 사원으로 다시 변모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대산 사찰 위치도. 주변에 현통사, 탑원사, 라후사 등이 있다.
현통사 천발문수전 천비천발석가문수보살상.

문수전에는 오방문수와 대지문수(大智文殊), 뒷면에 감로문수(甘露文殊)를 봉공한다. 대웅보전과 무량전을 지나면 천발문수전(千钵文殊殿)이 나타난다. 높이 5.4m에 이르는 문수보살상은 아래부터 점점 작아지는 얼굴이 이어지고 꼭대기에는 반가부좌 문수보살이 앉았다. 양쪽 어깨에서 뻗어 나온 팔은 1,000개에 이른다. 자세히 보면 손마다 바리때를 하나씩 들고 있는데 아주 귀여운 석가모니불이 단정하게 앉아 있다. 천수천안관음보살에 비견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다. 대천세계(大千世界)의 온갖 지혜를 간직한 천비천발석가문수보살(千臂千缽釋迦文殊菩薩)의 명성 그 자체다.

현통사의 매력은 동전(銅殿)에 있다. 명나라 만력제 시대 태후의 스승인 묘봉 스님이 동 10만 근을 보시받아 이중 처마로 꾸민 2층 건물을 지었다. 안에는 대불과 1만개의 작은 불상이 새겨져 있다. 만불여래(萬佛如來)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바깥에는 오대를 상징하는 13층의 동탑 5개를 세웠는데 일본군이 침략해 3개를 찬탈해 가고 두 개만 남았다. 종루에 오르니 대백탑 사이를 비둘기가 날아 다닌다.

현통사 동전 오르는 길.
탑원사 대백탑과 ‘친구’ 같은 이름 없는 불상.
서서히 돌아가며 꽃 피듯 벌어지는 라후사 개화현불상.

현통사의 탑원이었다가 명나라 때 중건하며 탑원사(塔院寺)로 독립했다. 석가모니 사리탑인 대백탑은 56.3m 높이로 오대산 어디에서나 잘 보인다. 사람들이 손을 맞잡고 얼굴을 어루만지는 불상이 하나 있다. 금빛 얼굴을 하고 은은한 색감의 옷매무새로 엄마처럼 두 손을 포근하게 가슴에 대고 있다. 웅장한 건물의 본좌가 아니라 하얀 벽에 앉은, 친구 같은 모습이다. 온종일 거대한 불상만 보다가 아치형 불감 속에 이름도 없이 다정한 친구 같은 인상, 두 손을 꼭 잡고 싶어진다.

라후사(羅睺寺)에는 흥미로운 불상이 하나 있다. 승려 뒤를 따라 개화현불전(開花現佛殿)으로 들어선다. 꽃이 활짝 피어나면서 부처가 나타나는 형상으로 오대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불상이다. 개화하는 장면은 사원의 성수(聖樹)로 만들었다. 서서히 왼쪽으로 돌면서 벌어지도록 고안된 장치가 숨었다. 연꽃이 개화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오므라들었다 펼쳐졌다 하며 돌아간다. 금빛의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불, 미륵불을 차례로 볼 수 있다. 밋밋한 불전이 상식이건만, 감칠맛 나는 소품 같은 율동을 보니 신비롭기조차 하다.

청나라 말기 변법자강운동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양계초는 도쿄로 망명했다. 아버지의 망명으로 1901년 도쿄에서 태어난 량쯔청은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건축사를 공부하고 중국 고대 건축사를 연구하는 학자였다. 1930년대 일본학자들은 ‘중국에서 이미 당나라 시대 목조건축물은 사라졌다’고 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을 보려면 나라(奈良)로 오라고 의기양양했다. 1928년 중국으로 귀국한 그는 매우 자존심이 상했다. 1937년부터 시인이자 건축사인 부인 린후이인과 함께 중국 200개 현을 다니며 당나라 이후 고건축물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돈황연구원의 도록 중 ‘오대산도’의 대불광지사.
오대산 오대와 주요 사찰 위치.

아무리 찾아도 당나라 목조건축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막고굴 61호굴 ‘오대산도’와 운명처럼 만난다. 공교롭게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해 막고굴의 유물 5,000여 점을 프랑스로 가져간 폴 펠리오가 촬영한 도록이었다. 높이 3.42m, 길이 13.45m의 벽화 속에서 당나라 시대 건축 양식을 닮은 ‘대불광지사(大佛光之寺)’를 보자마자 바로 달려갔다. 고건축 전문가의 남다른 눈에는 무엇이 보였단 말인가?

오대산 중심에서 서남쪽으로 약 50km 떨어진 불광사를 찾는다. 풍경구를 벗어난 8곳의 사찰 중 하나로 역사 유물로서의 가치가 엄청나다. 불광사는 당나라 시대 건축물로 중국에서 두 번째(첫 번째는 남산사)로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오대산의 사찰은 처음 건축된 시기는 오래됐지만 대부분 청나라 시대 중건됐다. 불광사는 당나라 후기인 서기 857년에 건축됐다.

오대산 중심에서 50km 떨어진 불광사 입구.
전형적인 당나라 시대 두공과 처마 양식의 불광사 동대전.
당나라 말기 목조건축 불광사

동대전(東大殿) 앞에 서니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웅장하며 담백한 당나라 목조건축의 위용이 드러난다. 못 하나 쓰지 않은 건축물이다. 두공(지붕 받침)은 여느 시대와 다르게 크다. 정확히 기둥 길이의 2분의 1이고 옥첨(처마) 아래 깊은 자태를 자랑한다. 창문도 복잡한 문양 없는 직선이며 회색 기와, 붉은 기둥, 하얀 담장을 그대로 담았다. 시인의 날카로운 눈매로 대들보에서 시주자 영공우(寧公遇)의 흔적을 찾는 등 여러 가지 확증을 발견했다. 당시 당나라 황궁 양식의 유명한 사찰이었음을 보여준다고 확신한 량쓰청은 ‘아시아의 불광’ ‘중국 최고의 국보’라고 감탄했다. 곧이어 불광사에 대한 실측 자료를 발표했다. 일본 역사학계는 말문을 닫았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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