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36.5] 기본소득, 아직 실패를 논하기엔

입력
2019.02.13 18:30
수정
2019.02.27 09:07
30면
0 0

※ ‘36.5도’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핀란드가 전국적으로 시행한 기본소득 정책의 결과에 대해 평가가 엇갈린다. 사진은 핀란드 수도 헬싱키의 거리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핀란드가 전국적으로 시행한 기본소득 정책의 결과에 대해 평가가 엇갈린다. 사진은 핀란드 수도 헬싱키의 거리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사상 처음 국가 단위로 시행돼 주목 받았던 핀란드의 기본소득 정책(2017~18년)을 두고 평가가 엇갈린다. 핀란드 정부가 최근 발표한 기본소득 지급 1년차(2017년)의 정책효과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가장 기대를 모았던 고용 개선 효과는 미미했던 반면 설문조사로 확인한 삶의 질 향상 효과는 상당했다. 한쪽 방향으로 수렴되지 않는 결과임에도 해석은 실패냐 성공이냐로 양분돼 저마다 유리한 근거를 부각시키는 상황이다. 복지정책이 확대될 때마다 상반된 정치경제적 입장이 타협을 거부하며 맞부딪는 것은 우리 시대의 보편적 풍경이다. 하물며 인류가 발명한 복지정책의 첨단으로 이목을 끄는 기본소득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분명한 건 기본소득 정책이 핀란드 사례만으로 성패를 단정할 수 있을 만큼 간단치 않다는 사실이다. 일례로 핀란드 정부는 기본소득 지급대상을 장기실업자로 한정했다. 이들이 실업수당보다 적은 급여를 주는 일자리를 거부하며 높은 실업률(2016년 8.8%)을 초래하는 이른바 ‘복지 함정’을 극복하자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특정 계층에만 소득을 보장하는 것은 ‘국민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정액을 지급한다’는 기본소득의 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핀란드에서 자연스레 정책 효과를 뒷받침할 결과물로 여겨진 고용 증대 역시 기본소득 정책이 추구하는 목표의 일부에 불과하다. 정책을 실제 적용할 땐 크든 작든 현실을 감안한 변용이 일어난다는 점을 감안해도 핀란드 실험을 기본소득의 전부인 양 받아들이긴 힘들다.

기본소득 이론가들은 ‘무조건적 지급’이 기본소득 정책의 핵심이란 점에 의견을 같이 한다(이하 필리프 판 파레이스 등 ‘21세기 기본소득’ 참조). ‘무조건’은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이 없을 때로 구체화한다. 첫째는 가구의 경제 상황과 연계하지 않고 개인에게 준다, 둘째는 소득 또는 재산 조사 없이 지급한다, 셋째는 돈을 주는 대가로 일을 할 의무를 부과하지 않는다. 이들은 기본소득이 기존의 공적부조나 사회보험을 대체하는 제도가 아니라는 점도 강조한다. 기본소득은 사회적 취약계층 보조를 넘어 보다 포괄적 목표를 향해 설계됐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개인소득이어야 하는 이유는 가계 민주화, 성평등 확대라는 시대정신과 맞닿아 있다. 현행 가구 단위 소득보전 정책은 통상 (남성)가장이 수령자인 탓에 여성이나 미성년 자녀가 가장에게 종속되기 쉽다는 것이다. 동거가 흔한 서구 사회의 경우 당국이 혼인이나 동거 여부를 일일이 확인해 수급 가구를 지정하기 어렵다는 현실도 감안된 논리다.

소득이나 재산과 무관하게 기본소득을 줘야 한다는 ‘보편성’ 원칙은 보다 논쟁적이다. 빈곤선을 넘는 소득을 벌어들이는 이들까지 가난한 사람과 똑같은 돈을 받는 것은 자원 낭비라는 공격이 곧장 따르기 때문이다. 설계자들의 반론은 이렇다. 보편적 지급은 마땅히 지원을 받아야 할 빈자들이 무지, 수줍음, 모욕감 등으로 절차를 밟지 못하는 상황을 막는 동시에 수급자 선별에 드는 행정 비용을 아낄 수 있다. 핀란드 정부가 강조하기도 했던 또 다른 이유는 수급자들이 복지 함정을 벗어나 일자리 선택의 주도권을 잡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을 받아 당장의 실업을 견딜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면 보다 양질의 일자리를 지원하거나 스스로 창업에 나서는 용기를 낼 거란 논리다. 이는 아무런 의무도 부과하지 않은 기본소득 지급 원칙이 노리는 효과이자, 핀란드 실험에서 일정 부분 확인된 성과이기도 하다.

기본소득 옹호론자들은 이 제도가 궁극적으로 4차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고용시장 대격변에 맞춤한 대비책이라고 주장한다. 무조건적 소득 보장이 일각의 우려처럼 (값싼)노동력 공급의 급감이라는 부정적 충격보다 생존 가능한 분야로의 노동력 이동이란 긍정적 효과로 발현되리라 보는 것이다. 기본소득 덕에 시간제 근무나 휴직이 자유로워 고용시장 유연성이 높아지면 인공지능(AI) 로봇 시대에 자연스레 일자리를 나누는 효과를 낼 거란 기대도 있다. 설령 핀란드의 실험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해도 다른 누군가가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품이 너른 상상력이다.

이훈성 경제부 차장 hs0213@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