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영화 ‘가버나움’… 배우들도 실제 불법체류자 출신
슬픔과 분노가 서린 자인의 눈빛이 쉬이 잊히지 않는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사람을 칼로 찔러 법정에 선 열두살 소년의 분노 어린 눈길이 맞은편 부모를 향한다. 고소 이유를 묻는 판사에게 소년이 차갑게 말한다.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니까요.”

소년의 이름은 자인.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빈민촌에 산다. 낮에는 가짜 처방전으로 산 약을 물에 탄 약물주스를 거리에서 팔고, 저녁에는 식료품점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가족의 끼니거리를 받아 온다. 집에서 자인을 기다리는 건 지독한 가난과 학대다. 어느 날 어린 여동생이 나이든 남자와 강제 결혼을 하자 견디다 못한 자인은 집을 뛰쳐나오고, 굶주린 채 거리를 헤매다 에티오피아 출신 불법체류 여성 자힐과 한살배기 요나스를 만난다.

“개똥 같은 삶”에 지쳐 부모를 고소한 소년 자인의 이야기를 담은 레바논 영화 ‘가버나움’(감독 나딘 라바키)이 한국에서 어느새 10만명에 가까운 관객을 불러모았다. 12일까지 누적관객수 9만4,525명(영화진흥위원회). 최근 더욱 척박해진 다양성영화 시장에서 매우 귀한 흥행이다. 상업영화인 ‘극한직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적은, 전국 60여개 스크린에서 하루 130회 상영으로 거둔 성과다.

‘가버나움’은 빈곤과 아동 학대, 난민 문제, 여성 매매혼 등 세상 한편에서 벌이지고 있는 비극을 뜨겁게 고발한다. 제주도 예멘 난민 문제로 갈등을 겪은 한국에도 생각할거리를 던진다. 이 영화가 더 큰 울림을 주는 건,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배우들의 실제 삶이기 때문이다. 자인은 시장에서 배달 일을 하던 시리아 난민 소년, 라힐과 요나스는 불법 체류자였다. 자인의 여동생 사하르도 영화 출연 전에는 거리에서 껌을 팔았다. 영화에서처럼 배우들도 출생신고가 돼 있지 않거나 불법 체류자라서,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참석 일주일 전까지도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영화수입사 그린나래미디어 관계자는 “다양성영화가 1만명을 넘기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낯선 제3세계 영화가 반향을 얻은 건 실제 자신의 삶을 연기한 주인공들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엔딩크레딧에선 자인과 라힐, 요나스, 사하르 등 주인공들이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소개해 감동을 더한다.

세상에서 가장 여린 아이들이 가장 강력한 힘으로 연대한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제작진은 영화에 출연한 아이들과 가족에게 지속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가버나움 재단을 설립했다. 한국 관객들도 마음을 보태고 있다. 지난달 31일 극장 성금함에 85만7,900원이 모였고, 이 성금은 조만간 자인과 자인 가족에게 직접 전달될 예정이다. 이달 2일 모은 2차 성금 70만1,000원과 영화 흥행에 따른 수익금의 일부도 ‘가버나움’ 주인공들을 위해 쓰인다. 영화가 일으킨 작은 기적이다.

‘가버나움’은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지난달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후보였고, 24일(현지시간)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영화상에도 아랍권 여성 감독 작품 최초로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라 있다. 그린나래미디어 관계자는 “상영 4주째에 접어들었지만 평일 관객수 3,000~4,000명 수준으로 개봉 주와 비슷하다”며 “아카데미 시상식 이후까지 장기 흥행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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