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계 구조 개혁을 위해 정부와 민간이 머리를 맞댄 ‘스포츠혁신위원회’ 1차 회의가 11일 오후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려 참석 위원들이 회의에 앞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겨울이 저물어가는 이맘때면 그리운 곳이 있다. 숨이 답답할 만큼 힘들어질 때면 찾아가던 전남 해남의 땅끝이다. 서울은 아직 겨울의 끝자락에 붙잡혀 있는 2월, 그곳엔 이미 봄이 포근히 내려앉아 반겨준다. 기어이 끝이란 임계점으로 스스로를 내몰 때엔 그 이유가 있는 법이다. 막상 더는 갈 곳이 없는 그곳에 서면 그제서야 들리는 내면의 울림을 통해 위안을 받게 된다. 속절없이 낙하하던 공이 바닥에 이르러야 튀어 오르듯 끝은 반작용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곳이다. 땅끝에 있는 사찰 미황사의 금강 스님은 “끝은 체념이자 또 다른 시작이다. 땅끝은 다시 힘을 갖게 해주는 곳”이라며 등을 토닥여줬다.

평창동계올림픽이 벌써 1년이 지났다. 한국 스포츠의 지난 1년은 롤러코스터를 탄 듯했다. 성화에 당겨진 평화의 불꽃이 세상을 바꾸었다. 한반도에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던 때가 언제 있었냐는 듯 지난해 4월 판문점에선 남북 정상이 만났고, 6월엔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이 조우했다. 이달 27~28일에는 베트남 하노이에서 또 한번 북미 정상회담이 열려 평화의 불씨를 키워나간다.

평화올림픽은 자축할만하지만 정작 체육계에선 메달과 성과에만 매달리다 곪은 문제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평창에 잠시 환호했던 국민들은 체육계의 맨얼굴에 절망하며 분노했다.

정점은 쇼트트랙 대표 심석희가 조재범 전 코치에게 당했다는 성폭행 폭로였다. 체육계로선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다. 한국 스포츠는 끝으로 내몰렸고, 전면적인 구조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합숙훈련으로 대표되는 선수촌 운영 방식의 변화를 비롯해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 전체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교육부 장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여성가족부 장관들은 황급히 모여 성폭력 등 체육계 비리 근절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에선 기시감이 든다. 11년 전에도 스포츠계 성폭력 문제로 시끄러웠다. 2008년 당시 문체부와 교육부, 대한체육회는 ‘성폭력 가해자는 영구 제명한다. 성폭력 신고센터를 설치해 원스톱 처리 체계를 마련한다. 지도자와 선수에게 연 1회 성폭력 예방 교육을 의무화한다’ 등 스포츠 성폭력 근절 대책을 내놓았다. 최근 정부가 내놓은 대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엔 국가인권위원회까지 나섰다. 스포츠계 성폭력 근절을 위한 특별조사단을 신설하고, 스포츠 시스템의 전면 개선을 이끌겠다고 했다. 글쎄다. 인권위는 2011년에 이미 ‘스포츠 인권 가이드라인’을 마련한 바 있지만 현장에선 시늉뿐이었다.

대책이 부족해 지금의 사단이 벌어진 게 아니다. 결국은 제도를 운용하는 조직과 사람들의 문제다. 대한체육회나 산하 경기연맹들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어떻게 조용히 수습하느냐에만 몰두했다. 겉으로 강화되는 제도와 무관하게 끊임없이 피해자가 나오는 이유다.

11일 스포츠 구조개혁을 위한 스포츠혁신위원회가 출범했다. 위원회는 혁신의 첫걸음으로 “이처럼 심각한 문제가 제기됐는데, 누군가는 공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며 책임론을 내세웠다. 아무도 책임지겠다는 체육계 인사들이 없다는 경고다. 어쩌면 그들은 버티면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물러나는 게 오히려 무책임할 수 있다. 현안을 책임지고 해결하는 게 급선무다” 같은 변명으로 시간을 끌면 된다는 것을.

추락은 순간이지만 다시 올라가기는 어렵다. 바닥을 치고 튀어 오르려면 우선 구태부터 털어내야 한다. 이대로를 외치는 욕심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한 늪에서 계속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겨울을 보내는 2월의 거리는 유난히 지저분하다. 응달의 눈과 얼음이 녹으며 그 속에 겨우내 가려있던 시커먼 먼지들이 땟국처럼 흘러내린다. 겨울 때를 다 씻어내야 봄이다. 봄은 예쁜 꽃으로만 찾아오지 않는다.

이성원 스포츠부장 sungw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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