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소읍탐방]충남 홍성 ‘홍주성 천년여행길’
홍주읍성의 서남 방향 성곽. 홍주성은 주민의 일상과 호흡하며 1,000년을 이어왔다. 도심 한가운데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고풍스러운 정취를 풍긴다. 홍성=최흥수기자

한우로 유명한 두 지역, 충남 홍성과 강원 횡성이 헷갈린다면 이제부터 ‘홍주성’을 기억하면 좋겠다. 홍성에는 ‘홍주’ 또는 ’홍주성’이라 표기한 입간판이 의외로 많다. 홍주는 조선시대 충남 서부 해안 내포지역 22개 군현을 관할하던 중심지다. 홍성은 고려 현종 9년(1018)부터 홍주라 불리다 1914년 인근 결성군(현 결성면)과 합해 현재에 이르렀다. ‘홍성 100년, 홍주 1,000년’이다. 홍주읍성 안에는 지금도 관아(홍성군청)가 남아 있다. 주민을 모두 이주시키고 공원처럼 깔끔하게 꾸민 서산 해미읍성이나, 민속마을 형식의 관광지로 전락한 순천 낙안읍성과 달리 홍주성은 여전히 일상과 괴리되지 않고, 주민과 호흡을 같이하는 홍성의 중심이다.

◇전통시장 ‘삼천원 국밥’ 먹고 ‘천년여행길’ 나들이

장날이면 줄을 서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간 홍성전통시장 ‘3,000원 골목’ 보리밥집은 의외로 한산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이렇게 손님이 없을까. “시금치가 떨어져서 오늘은 더 장사를 할 수 없는데, 미안해서 어째?” 그래도 괜찮다며 억지로 졸라서 밥상을 받았다. 넉넉하게 보리밥을 담은 비빔그릇에 무생채, 콩나물, 된장국, 배추김치와 물김치가 놓였다. 난로 위에서 끓고 있는 숭늉까지 더하니 시금치가 빠졌다 해도 3,000원이 미안할 정도다. 바로 옆의 국밥집도 마찬가지다. 돼지머리국밥, 순대국밥, 쇠고기시래기국밥은 올해부터 1,000원이 올라 4,000원이지만 콩나물국밥, 도토리묵밥, 열무국수는 여전히 3,000원이다. ‘삼천원 국밥’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홍주성 천년여행길’ 나들이에 나섰다. 홍성의 옛날과 현재를 두루 살피는 읍내 나들이길이다.

홍성은 충남 서부 물산의 중심지였다. 홍성전통시장에 보부상 그림이 걸려 있다.
홍성전통시장 ‘삼천원 골목’의 한 식당 내부. 일부 품목을 4,000원으로 올렸지만 아직 3,000원 메뉴가 많다.
홍성전통시장의 3,000원 콩나물 국밥.
홍성전통시장의 3,000원 보리밥. 시금치가 빠진 상태다.

홍성은 읍 단위치고 시장이 꽤 번성한 곳이다. 전통시장 외에 상설시장과 명동거리(서울 명동과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을 상대로 하는 패션 상점이 몰려 있다)가 따로 있다. 평소 한산하던 홍성전통시장도 장날(끝자리 1ㆍ6일)이면 골목마다 발 디딜 틈 없이 난전이 들어선다. 2,000원에 세 개, 여섯 개를 담아주는 호떡과 찐빵 등 주전부리 가게에도 길게 줄이 선다.

홍성은 예부터 서해 바다가 물길을 따라 내륙 깊숙이 파고든 지형이라 온갖 물산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시장 한 귀퉁이 벽면을 장식한 보부상 그림은 홍성장의 위상을 대변한다. 장돌뱅이 보부상은 사라졌지만, 홍성 광천 결성 보령 청양 대흥 등 6개 지역 보부상 조직인 ‘원홍주등육군상무사(元洪州等六郡商務社)’는 아직도 사무실을 유지하고 있다. 3대에 걸쳐 100년 넘게 맥을 이어오고 있는 대장간도 홍성전통시장의 자랑이다. 쇳덩이를 두드릴 때 쓰는 모루 옆에는 쇠를 식히는 나무 물통이 놓여 있다. 물을 비우면 뒤틀어지기 때문에 항상 채워진 상태다. 대장장이 모무회씨가 아들과 함께 주로 간단한 농기구를 제작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요즘은 등산용품도 만든다.

홍성 대장간에서 농기구를 만들고 있는 모습.
홍성대장간에서 제작한 여러 가지 농기구.
투박한 형상의 대교리 석불입상.
주민들이 ‘장군 젓가락’이라고도 부르는 오관리 당간지주.

시장골목에서 조금 벗어난 마을 공원에는 ‘대교리 석불입상’이 서 있다.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눈 코 입이 어느 것 하나 반듯하지 않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지만, 홍성전통시장의 수호신으로 대접받고 있다. 전통시장에 화재가 빈발하자 시장번영회에서 ‘미륵제’를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주민과 상인 간 축제와 화합의 장이 펼쳐진다. 시장에서 홍성천을 건너면 주택가 어귀에 ‘오관리 당간지주’가 서 있다. 높이 4.7m로 제법 큰 편인데 고려시대 사찰인 미륵사 당간지주로 추정하고 있다. 두 개의 돌기둥이 삐죽 솟은 모습에 홍성 사람들은 ‘장군 젓가락’이라고도 부른다.

전통시장 북측에는 ‘홍주의사총’이 있다. 1906년 5월 홍주성에서 의병과 일본군 간 벌어진 전투에서 희생된 의병들의 유해를 안장한 대형 봉분이다. 홍주성 전투는 벼슬을 버리고 귀향한 민종식이 서천 보령 청양 등지의 의병을 규합해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홍주성을 탈환한 전투다. 호서지역 거점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일본은 곧바로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홍주성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희생된 수많은 의병을 추모한다는 의미에서 ‘구백의총’이라 부르다, 2001년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하면서 홍주의사총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의병들을 추모하는 ‘홍주의사총’.
홍성읍내 월계천변의 ‘홍주순교성지’ 조형물. 천주교에서는 생매장터로 기록하고 있다.

의사총 옆 월계천 주변은 천주교에서 ‘홍주순교성지’로 조성해 놓았다. 신유박해(1801년)부터 병인박해(1866년)까지 홍주에서 희생된 212명의 순교자를 추모하는 공간이다. 홍성에는 홍주옥사와 동헌 등 6곳의 순교 터가 있다. 특히 홍주성 북측 홍성천과 월계천이 합류하는 지점은 감옥이 부족해 일부 신자를 생매장한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홍주의 순교자 중 충청도 첫 순교자인 원시장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황일광 시몬 등 4명은 교황청으로부터 공경의 대상이 될 만한 신앙인에게 내리는 복자(福者) 칭호를 받았다. 순교성지는 대교공원과 연결해 산책 코스처럼 꾸며져 있다.

◇홍성의 역사 인물과 돌아보는 홍주성

대교공원에서 다시 월계천을 건너면 홍주성 북문 터다. 홍주성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 토성으로 쌓았다가, 조선 문종 1년(1451) 현재의 석성으로 완공했고, 고종 7년(1870)년 홍주 목사 한응필이 대대적으로 수리했다고 알려졌다. 일제강점기에 일부가 허물어져 1,772m의 성벽 가운데 현재는 약 810m만 남은 상태다. 홍주읍성은 읍내 중심을 흐르는 월계천과 홍성천이 동ㆍ남ㆍ북으로 동그랗게 감싸 천혜의 해자(垓子)를 형성하고 있다. 천년여행길은 복원 중인 북문 터에서 월계천을 따라 반 시계 방향으로 이어진다. 걷기 길에서 살짝 벗어난 지점에는 국내에서 유일한 목빙고(木氷庫) 유적이 있다. 얼음 저장 창고인 빙고는 보통 돌로 쌓고 흙을 덮는 구조인데, 이곳 빙고는 나무로 쌓은 것이 특징이다. 세광엔리치 아파트 공사 중 발굴돼 현재 아파트 입구로 옮겨 복원해 놓았다.

일제강점기에 허물어진 홍주성 북문 터에 성곽의 일부 형체가 남아 있다. 현재 복원공사 중이다.
홍주성 북문 터의 마을 담장 벽화.
아파트 공사 중 발견한 국내 유일의 목빙고.
홍주성 서쪽 성벽의 최영 장군 흉상. 성벽 안쪽이 홍주초등학교와 홍성군청이다.

홍주초등학교에 이르면 홍주성의 서쪽 성벽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홍성군청 외벽을 지나 남쪽으로 비스듬히 휘어지는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이곳이 도심 한가운데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호젓하고 고풍스럽다. 고성(古城)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유럽의 오래된 성곽 도시가 부럽지 않다. 석성 주변에는 홍성이 배출한 역사 인물의 흉상을 배치해 놓았다. 고려 말기의 명장 최영(1316~1388), 세종대왕을 도와 훈민정음을 창제한 조선시대 문신이자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1418~1456)은 홍북면 노은리에서 태어났다. 3ㆍ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만해 한용운(1879~1944)은 결성면 성곡리 출신이고,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김좌진(1889~1930) 장군은 갈산면 행산리 태생이다. 조선 선조 때 한시의 대가인 이달(1539~1612)의 시비도 세워져 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인물을 묶어 ‘역사인물축제’를 열고 있는 홍성의 저력이 느껴진다.

홍주성 외벽에 설치한 김좌진 장군 흉상.
홍주성 석재에 ‘대흥(大興)’이라는 새김이 선명하다. 이곳부터 예산 대흥 사람들이 쌓았다는 표시다.
홍주성 성벽에는 사찰에서 사용했던 석재가 곳곳에 섞여 있다.
홍주성 내의 우물터. 주민들에게 물 좋기로 소문 나 있다.

성벽은 홍주읍성 동쪽 중간쯤에서 끊어진다. 이곳부터 성곽 내부로 들어간다. 한겨울에도 물이 콸콸 넘치는 옥사 옆 우물 터에는 산책 나와 물을 받아가는 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홍성 인근에선 이미 유명한 약수터다.

복원한 남문(홍화문) 주변엔 1824년 성벽과 건물 수리 내용을 기록한 ‘홍주성수성기적비’와 5명의 홍주목사선정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뒤쪽 ‘병오항일의병기념비’는 이중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애초 기념비가 있던 자리에는 홍주성 전투에서 의병을 공격하다 죽은 관군과 일본군을 추모하는 애도지비(哀悼之碑)가 있었다. 1907년 외무대신을 지낸 김윤식이 글을 짓고 매국노 이완용이 글씨를 쓴 비는 광복이 된 후 땅에 묻히고, 그 위에 병오항일의병기념비가 세워졌다. 홍성 주민들의 기개와 자존심이 응축된 비석인 셈이다.

홍주성 내부의 비석군.
일본군을 추모하는 비를 묻고 그 위에 세운 병오항일의병기념비.

바로 앞은 ‘홍주성 역사관’이다. 성곽의 외형을 해치지 않고 반 지하로 설계한 배려가 돋보인다. 역사관에서 건너 보이는 홍성군청 뒷마당에는 홍주성의 동헌인 안회당(安懷堂)과 휴식처인 여하정(余何亭)이 자리 잡고 있다. 인공 연못과 커다란 버드나무가 어우러져 제법 운치 있다. 군청 앞마당은 아름드리 느티나무 두 그루가 차지하고 있다. 고려 공민왕(1351~1374년 재위) 때 홍주가 목(牧)으로 승격한 것을 기념해 심었다는 전설을 근거로 한다면 수령 650년 정도로 추정된다.

군청에서 큰길로 나오면 홍주성의 정문이자 동문인 조양문(朝陽門)이 성벽과 이어지지 못하고 회전 교차로에 갇혀 있다. 1870년 홍주 목사 한응필이 고쳐 세웠고, 1975년 해체 복원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13년 서문과 1915년 북문을 철거한 일제가 조양문도 없애려 했으나 홍성 군민의 결사적인 반대로 화를 면했다고 한다. 완전히 복원된 홍주읍성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주민들의 삶과 괴리된 죽은 유적이 아니라 일상과 어우러진 성곽 도시, 과거와 현재가 응축돼 또 다른 천년을 꿈꾸는 홍주의 미래가 그려진다.

홍주 관아의 동헌으로 사용된 안회당. 홍성군청 뒷마당에 있다.
안회당 뒤편의 여하정.
홍성군청 앞마당의 쌍둥이 느티나무. 수령 65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홍주성의 정문이자 동문인 조양문. 현재 로터리로 차량이 다니고 성벽과 분리된 상태다.
◇홍성 여행 정보

▦홍성은 서해안고속도로 홍성IC, 당진대전고속도로 예산수덕사IC에서 가깝다. 서울 용산역에서 홍성역까지 장항선 열차가 하루 15회 운행한다. 약 2시간이 걸린다. ▦‘홍성길동무’ 협동조합에서 ‘홍주성 천년여행길’ 동행 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비용은 개인 1만5,000원, 단체 10만원이다. 홍성전통시장에 있는 ‘홍성관광두레’ 사랑방(070-8844-6245)으로 문의.

홍성=글ㆍ사진 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라이프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