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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퀘벡 석면 파업(2.14)

입력
2019.02.14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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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캐나다 퀘벡의 '세트포드 탄광' 광부들이 파업인력 대체에 항의하는 피켓 시위를 벌이는 장면. humanrights.ca
1949년 캐나다 퀘벡의 '세트포드 탄광' 광부들이 파업인력 대체에 항의하는 피켓 시위를 벌이는 장면. humanrights.ca

캐나다 동부 퀘벡(Quebec)주는 북미의 프랑스 섬 같은 지역이다. 현 주민 대부분은 캐나다에서 태어났지만, 약 80%는 지금도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여긴다. 1980년과 95년 두 차례 분리ㆍ독립을 위한 주민투표를 할 만큼 주권 민족주의 의식이 강하고, 경제 규모나 경쟁력 면에서도 독립의 자신감을 가질 만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캐나다 주 가운데 가장 넓고, 인구도 두 번째로 많다. 주도 몬트리올은 토론토(온타리오) 다음으로 큰 도시다.

16세기 중반 프랑스 식민지로 모피사냥 등을 위한 개척민들이 정착한 게 시작이었다. 1867년 캐나다가 영국령이 된 뒤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은 이들이 주로 퀘벡에 머물렀다. 영국계가 점점 늘어나고, 경제적 이권과 언어 등 교육, 문화, 외교 이슈가 있을 때마다 양 진영은 대립했다. 퀘벡주 정부는 연방정부와 대체로 불화했고, 대표적인 정치 집단이 프랑스계의 주권을 주장해 온 보수 연합국민당(UPP)이었다. 1936년 주지사가 된 모리스 뒤플레시(Maurice Duplessis, 1890~1959)는 상징적 존재였다. 그는 보수 가톨릭 교회를 정치 기반으로, 혁명 이전의 ‘왕정 프랑스’를 정통으로 여긴 이였다. 풍부한 노동력과 전력, 구리 아연 석면 등 막대한 자원을 바탕으로 세계 대전기 퀘벡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교육과 정치, 문화 수준은 별로 진전되지 못했다.

반전의 계기가 된 게 1949년 2월 퀘벡 남동부 석면광 도시 아스베스토스(Asbestos)의 광부 파업이었다. 프랑스 또는 영미합자 회사는 점점 커져갔지만 대다수 프랑스계인 광부의 삶은 열악했다. 노조는 2월 13일, 석면분진 차단 등 노동환경 개선과 노조 보장,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시작했다. 주 정부는 당연히 기업을 편들어 주동자를 수배ㆍ체포했고, 양측의 직간접적 충돌로 다수가 다쳤다.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캐나다 전역의 진보ㆍ자유주의 진영이 퀘벡 광부들을 응원했다. 몬트리올 대주교 등 가톨릭교회 일부도 노동자들을 편들었다.

사태는 6월 양측 합의로 종식됐지만 노동자들이 얻어낸 건 거의 없었다. 하지만 퀘벡 주민들의 권리의식이 달라졌다. 그 싸움을 주도하거나 응원한 활동가와 언론인들이 대거 정치에 투신했다. 그 변화가 1960년대 퀘벡의 혁신과 교육ㆍ보건 복지를 골자로 한 이른바 ‘조용한 혁명’의 밑천이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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