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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그렇게 또 30년이 흐르고 나서

입력
2019.02.09 04:4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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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연휴 때마다 고향집으로 달려가는 나를 두고 친구는 키득거렸다. “아서라. 나이 쉰 살 넘어서까지 설 쇠러 고향에 가겠다고?” 촌스러운 짓일랑 이쯤에서 그만두고 함께 온천 여행이라도 다녀오자는 친구의 유혹을 마다한 채, 설 전날 아침 7시에 출발하는 KTX 표를 끊었다. 기차로 40분. 오송역에서 택시 타고 집으로 가니 딱 8시였다. 일옷으로 갈아입고 곧바로 명절맞이 작업에 돌입했다.

나에게도 모던한 꿈은 있었다. 사회생활 시작할 때부터 품었던 오래된 소망. 명절 연휴가 되면 고향 대신 선글라스 끼고 공항으로 직행하는 무리에 섞이고 싶었다. 얌통머리 없다는 핀잔이 날아들든 말든, 금쪽 같은 연휴를 나 혼자 유유자적 보낼 수 있다면 더 부러울 게 없을 듯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직장생활 시작하고 몇 년간은 여기저기 누수가 생기는 생존 문제를 틀어막는 일만으로 버거웠다. 10년쯤 지나면 내 소망대로 명절 연휴를 즐길 수 있으려니, 위안을 했다. 대략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통장 잔고에 여유가 생겼다. 웬걸, 설이나 추석이면 함께 모여 전 부치고 만두 빚고 상 차리며 착착 죽이 맞던 여동생 두 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결혼을 했다. 50대 후반이던 엄마는 70대로 접어들었다. 늙어버린 엄마 혼자 허둥거리며 명절 준비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해외여행을 입에 올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 뒤 10여 년이 또 흘렀다. 남동생이 결혼하면서 엄마에게 며느리가 생겼다.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며 군침을 흘리는 찰나, 도시에서 귀하게 살아온 올케가 시골 우리 집에 가서 첫 명절을 보낼 광경이 그려졌다. 사려 깊고 예쁜 올케의 얼굴이 눈에 밟혀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25kg짜리 트렁크를 질질 끌며 고향으로 향했고 비행기 수하물에 부치는 꼬리표 대신 일관성이라는, 아무 짝에도 써먹지 못할 타이틀 하나를 가까스로 건졌다.

그렇게 꼬박 30년이 흘렀다. 시간의 위력이랄까. 돌아보니 그 사이 많은 것이 변했다. 복잡하던 고향집 차례 절차는 간소한 추도예배로 바뀌었다. 명절 준비 품목도 그에 맞게 대폭 조정됐다. 마음 아리는 가장 큰 변화는 고향 마을의 쇠락이다. 나 어릴 때 어른이던 분들은 절반 넘게 세상을 떠났다. 그에 비례해 늘었어야 할 아이들은 거의 없다. 우리 집 바로 아래 일가를 이루고 살던 다섯 집 중 네 집이 고향을 뜬 후 지금은 빈터만 덩그렇다.

이제 80대 후반이 된 부모님과 차례차례 50줄을 넘고 있는 형제들은 모이면 넓은 거실 창으로 동네를 내다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한다. 기억으로만 남은 이웃을 떠올리는 일은 아무래도 쓸쓸하다. 그렇게 주고받는 이런저런 이야기 도중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떤 얼굴이 불쑥 떠오르기도 한다. “아, 마서방이 네 아버지를 찾아왔더라.” 식탁에 마주앉아 만두를 빚던 엄마가 말했다. “넌 그 사람 모르겠구나. 46년 만이라고 했으니.” 꿈결처럼 아련한 풍경이 스멀스멀 살아났다. “마서방? 빗자루 장사하던 아저씨잖아. 키가 훌쩍하게 크고, 자전거에 싸리비 잔뜩 달고 다니던.” 엄마는 46년 만에 만난 마서방 아저씨의 근황과 그이가 수십 년 만에 아버지를 찾아와 눈물 흘린 사연을 들려주었고, 나는 콧물을 훌쩍이며 고개만 주억거렸다.

이렇게 또 한 번의 설이 지나갔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생각이 많아졌다. 언제부터인가 명절은 시간에 쫓기며 사는 우리 부모형제가 모처럼 느긋하게 모여 툭툭 끊겼던 기억의 실을 잇고 생각의 가지를 정리하고 마음을 다잡는, 소중한 치유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얼마나 오래 이 의례를 계속할 수 있을까? 마침내 그 질문에 닿자 목구멍이 시큰해졌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나는 앞에 놓인 트렁크를 꽉 쥐었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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