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4>김구의 밀정, 한도원
일제 경찰의 계략 파악 위해 투입… 딸 유모차에 폭탄 실어 이봉창에 전달 추정
[저작권 한국일보] 한순옥 할머니가 지난 1월 22일 경기 성남시의 자택에서 1946년 8월 7일 백범 김구 선생이 사진 여백에 써 선물로 준 메모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한설이ㆍ현유리 PD

백범 김구 선생이 생전 손녀처럼 여긴 한순옥 할머니의 아버지 한도원 지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재판기록과 국가보훈처 공훈록 등 여러 문헌과 증언 등을 종합한 독립운동가 한도원의 생애는 무력항일과 첩보전, 은밀하게 진행된 군자금ㆍ무기 조달 등 치열했던 한국 독립운동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한도원은 늘 재정난에 시달렸던 김구가 일제 요인들을 암살하기 위해 공수한 자금과 무기를 집에 숨겨두기도 했으며, 김구를 암살하기 위해 혈안이 된 일제 경찰 곁에서 ‘이중 첩자’로 활동하는 등 밀정(密偵)의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설계자 김구를 2선에서 돕는 충실한 실행자였던 셈이다.

◇암살 위협받던 김구의 ‘이중 첩자’

한도원은 독립운동의 첫발을 상하이(上海)의 항일무장단체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에서 내디뎠다. 사립 명문인 평양 숭실학교를 중퇴한 그는 앞서 상하이에 머물던 매형 김예진(1896~1950ㆍ독립장) 목사를 만나기 위해 스물한 살이던 1925년 9월 국경을 건너간다. 이듬해 1월 나창헌, 이유필, 박창세, 김예진 등과 조직한 병인의용대는 임시정부를 지지하며 일본을 위해 암약한 밀정 처단에 나선다(보훈처 공훈록). 병인의용대는 활동을 시작한 그해 2월 일제에 독립운동가 정보를 보내던 밀정 박제건을 살해했다. 김예진 목사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같은 해 3월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기도 했다. 김구의 오발탄 사건이 1930년에 발생한 것으로 짐작해볼 때 한도원은 병인의용대 활동을 시작하면서 김구와 인연을 맺은 것으로 파악된다.

한순옥 할머니는 “어머니께서 김구 선생이 갑자기 ‘나 왔소’라 소리 내며 집에 찾아와 식사하고 주무시기도 하는 등 상하이 동포들 집을 수시로 들락날락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라며 “집을 떠날 때는 귀신같이 사라지곤 했다 하셨다”라고 말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식사는 직업을 가진 동포들의 집-전차회사와 버스회사 차표 검사원이 60~70명이더라-에 다니며 걸식하고 지내니, 거지는 상등 거지다”라고 적었다. 한도원은 1925년 상하이에 오자마자 9년 동안 상해전차(上海電車) 차장(승무원)으로 일했다. 한순옥 할머니는 “(김구가) 우리 집에 군자금이나 무기를 맡기러 올 때면 영리하게 행동하는 어머니를 보고 ‘남편(한도원)보다 나은 것 같다. 함께 일해보자’라고 농담 섞어 이야기하셨다고 한다”라고 전했다. 한도원의 아내 홍성실 역시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재원으로 김구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이런 한도원이 본격적으로 김구와 손발을 맞춘 건 병인의용대 활동이 와해되고, 전차회사에서 해고된 1934년부터다. 1932년 1월과 4월 각각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잇따른 의거에 발칵 뒤집힌 일본이 배후인 김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이후다. 일본은 김구가 머물렀던 상하이에 일본 특별고등경찰들을 증파했고 오대근, 임영창 등 한국인 밀정을 활용하며 1934년부터 프로젝트명 ‘대 김구 특종공작’으로 세 차례에 걸쳐 암살을 시도했다.

누가 밀정이고 누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살얼음판 같은 상황. 이때 김구는 한도원에게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에서 근무 중인 후지이(藤井) 경부보의 밀정으로 일해달라”는 비밀 명령을 내린다(보훈처 공훈록). 경부보는 현재 우리나라 경찰조직 내 경위에 준하는 계급으로 염탐 대상인 후지이는 당시 상하이 독립투사들 사이에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곁을 맴돌며 독립운동가들을 노리는 계략을 파악해 달라 부탁한 것이다.

이때부터 한도원은 일제 측 후지이 경부보, 임시정부의 김구를 향한 ‘이중 첩자’ 생활을 시작한다. 후지이 경부보는 “김구와 김원봉(의열단 단장)이 장제스(蔣介石)와 연락해 군자금, 무기를 모으고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투사를 양성하고 있다”라며 “조선 청년을 입교시키고 있는 남경중앙군관학교에 입학해 정보를 빼내라”(1937년 4월 16일 해주지방법원 형사부 판결문ㆍ독립운동사 자료집 11집)고 한도원에게 지시하기도 한다. 당시 한도원이 정확히 어떤 정보를 김구와 후지이 경부보에게 흘렸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일제가 표적인 김구의 소재파악을 위해 한국인 밀정을 활용했던 점을 감안하면 일제 측에 잘못된 정보를 흘리거나 일제의 공작을 미리 김구에게 알리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일제는 김구가 난징(南京)에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뒤 1935년 1월 밀정 오대근을 난징에 파견해 김구를 살해하려 했지만 이내 허위 정보였음을 깨닫게 된다(‘일제의 김구 암살 공작과 밀정’ 논문).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왜구가 나의 종적이 난징에 있다는 냄새를 맡고 상하이에서 암살대를 파견한다는 보고를 접했다”라고 말했다. 누가 어떻게 김구에게 보고했는지 알 수 없지만 한도원 등 김구가 심은 밀정들이 그 역할을 담당했을 거로 짐작된다. 관련 논문을 쓴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윤대원 교수는 “김구가 일제 측에 심은 밀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어 모든 게 추론일 뿐”이라면서도 “김구의 소재를 알고 있는 이들은 엄항섭 등 최측근들 뿐이지만 김구가 심어놓은 알려지지 않은 밀정들이 일제에 허위 정보를 흘렸으리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후 한도원은 1935년 4월 남경군관학교를 자퇴한 뒤 김구, 안공근과 함께 난징에 체류하면서 독립운동에 전념한다. 1년여간의 이중 첩자 생활을 마감한 것이다(동 판결문). 분노한 후지이 경부보의 악행이 이어지자 같은 해 12월 한인애국단 간부 노종균(독립장)은 병인의용대 출신 김창근에게 후지이 경부보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김창근이 관사 정문에 설치한 폭탄이 불발되면서 이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저작권 한국일보]한도원 지사_박구원 기자
◇이봉창 의거에 군자금ㆍ무기 전달도

한도원은 무력 항일의 불씨를 다시 지핀 이봉창 의사의 의거에도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보훈처 관계자는 “과거 작성된 한도원의 공적서에는 ‘이봉창 의사에게 12월에 보관 중인 군자금 500원과 폭탄 및 권총을 사용하도록 주선했다’라고 진술한 것으로 나온다”라며 “문헌으로 증명되지 않아도 독립운동가의 공식 행적과 주변 증언을 종합해 타당하면 공훈으로 인정되기도 했다”라고 설명했다. 이봉창의 의거에 사용된 자금은 중국 돈 300불(일본 돈 약 150원)과 일본 돈 100원 등 총 250원가량(당시 화폐단위는 백범일지 기록에 준함). 이는 모두 김구가 전달한 것으로 300불은 상하이에서 김구가 직접 전달했고 100원은 도쿄에 있던 이봉창 의사에게 송금된 것이다. 이 자금은 미국, 멕시코, 쿠바 등 해외 동포들이 보내온 것이었다. 한도원이 주장한 12월(1931년)은 이봉창 의사가 일왕을 제거하기 위해 도쿄로 떠나기 직전으로 김구로부터 해외에서 송금받은 군자금과 무기 등을 보관했다가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한도원의 폭탄 전달과 관련해선 이봉창 의사의 예심 제7회 신문조서(1932년 2월 13일)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에 따르면 1931년 12월 13일 저녁 이봉창은 김구를 만나 거사 자금을 전달받고 함께 사진관에 가 폭탄을 든 채 촬영을 했다. 이틀 뒤 김구는 이봉창과 식사하던 중 잠시 외출한 뒤 폭탄 2개를 신문지에 싸서 전달한다. 의거 후 “2개의 폭탄은 사진관에 있었던 것인가”라고 묻는 일본 판사의 질문에 이봉창은 “사진관에서 갖고 온 것이라면 시간이 더 걸렸을 터이므로 백정선(김구의 가명)은 어딘가 가까운 집에서 갖고 온 것으로 생각됩니다”라고 답했다. 김구가 폭탄을 누군가에게 맡긴 뒤 거사 전 찾아와 전달했다는 뜻이다.

의거와 관련한 아버지 한도원의 사연을 한순옥 할머니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내가 3살 때 폭탄을 도시락에 숨겨둔 채 내가 타던 유모차 안에 실어 전달했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어요. 아기가 탄 유모차면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해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정확히 폭탄이 어디에 쓰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집에 김구 선생의 사진 등이 있던 건 생생합니다.”

실제 도시락에 폭탄을 숨기는 행위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와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공사 암살 계획에도 나오는 만큼 독립운동가들의 폭탄 운송 방식 중 하나였다. 올해 아흔인 한순옥 할머니는 아버지의 무장 투쟁과 밀정 활동에 대해 직접 자세히 듣지 못했지만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유모차 에피소드’만큼은 자녀들에게 수차례 이야기했을 정도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외 공훈록에 따르면 한도원은 이봉창 의사가 도쿄에서 의거일을 암호화한 ‘곡물은 1월 8일에 팔겠소’라는 내용의 전보를 김구에게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이봉창 의사와의 인연을 암시하는 단서는 더 있다. 1930년 12월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상하이로 넘어온 이봉창 의사는 임시정부의 소재를 찾고 있었다. 본인이 희망하는 전차 회사 취직에 도움을 받는 것과 동시에 독립운동이란 막연한 이상을 실현할 방법을 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중 프랑스 조계에서 우연히 만난 전차회사 차장(승무원) 감독으로부터 임시정부의 위치를 알게 됐고 그곳에서 김구 선생을 만났다(1932년 2월 12일 예심 제6회 신문조서ㆍ이봉창 의사 재판 관련 자료집). 실제 한도원은 1925년 상하이로 건너간 뒤 9년간 상해전차의 차장으로 근무하면서 병인의용대 활동을 전개했다. 한 지사의 행적과 들어맞는 부분이다.

◇3년의 옥고, 광복 후 DJ와 6ㆍ25 맞기도

밀정 생활을 끝마친 한도원은 1936년 7월 김동우ㆍ오면직ㆍ유형석 등과 함께 비밀결사 조직인 맹혈단(猛血團)을 조직한다. 무장항일을 지향했던 맹혈단은 일제 밀정 옥관빈을 사살하고, 중국 주재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암살 등을 모색했다. 무력 항일 활동을 이어오다 오면직 등과 함께 일제에 붙잡힌 그는 국내에 송환돼 1937년 6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3년의 옥고를 치렀다. 한순옥 할머니는 “어릴 적 아버지를 면회 갔을 때 아버지가 얼굴 전체를 밀짚모자로 가리고 걸어 다녔던 기억이 난다”라고 말했다.

해방을 맞은 한도원은 가족과 전국을 떠돌며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지 못해 고전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취업한 회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고 함께 6ㆍ25를 맞기도 했다. 조선상선주식회사의 목포출장소장으로 일했던 한도원은 목포에서 해운업을 하며 이 회사의 양곡 수송을 맡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거래를 하던 사이였다. 전쟁 발발 열흘 전인 1950년 6월 15일에는 김 전 대통령과 서울로 출장을 갔다가 전쟁을 맞는 바람에 함께 목포로 내려오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거래처인 조선상선 직원 한도원 등 일행 5명이 사공을 찾아가 돈을 쥐여주고 배를 탔다. 목포까지는 400여 킬로미터였다. 무작정 남쪽을 향해 걸었다”라고 말했다(김대중 자서전 중 ‘죽음이 곁에 있었다’ 부분 발췌).

1958년 부인과 사별한 한도원은 재혼했고, 그 뒤론 가족과 왕래가 잦지 않았다. 1984년 숨진 그가 지녔던 유품과 사진 등은 재혼한 부인 측이 보관해왔지만 재혼 뒤 자식을 두지 않아 이 자료들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한순옥 할머니는 “아버지는 독립운동했던 내용에 대해 거의 말씀이 없었다”라며 “해방 후 번듯한 직장을 구하지 못할 때는 ‘내가 왜 독립운동을 했을까’라며 한숨을 내쉬곤 했다”고 말했다. 한도원은 금전적인 문제로 친누나와 틀어져 왕래가 끊어질 정도로 광복 후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지난해 서훈을 받은 김예진 목사의 부인 한도신(1895~1986ㆍ애족장) 여사가 그의 누님이다. 1990년 한도원은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아내 홍성실씨도 딸의 증언에 의하면 독립운동에 헌신한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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