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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2003년 소버린, 2019년 ‘강성부 펀드’

입력
2019.01.25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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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11일 SK 경영권을 놓고 소버린과 SK가 표대결을 벌인 SK주총에서 SK가 경영권 방어에 성공한 후 신헌철 당시 SK대표이사 사장과 소버린자산운용 관계자가 악수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5년 3월 11일 SK 경영권을 놓고 소버린과 SK가 표대결을 벌인 SK주총에서 SK가 경영권 방어에 성공한 후 신헌철 당시 SK대표이사 사장과 소버린자산운용 관계자가 악수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행동주의 펀드, 기업 투명성 높이는 데 도움

기업 투자여력 줄이는 등 부작용도 많아

국민연금의 행동주의 펀드 흉내, 부작용 커

2003년 4월 3일, 금융감독원에 ‘크레스트증권’이라는 낯선 이름의 증권사가 “SK그룹 지주사 SK㈜의 지분을 8.64% 확보했다”는 보고서가 접수됐다. 모나코 소재 소버린자산운용의 국내 자회사 크레스트증권과 SK그룹 간의 경영권 쟁탈전이 시작된 것이다. 소버린은 지분을 14.99%까지 늘린다. 당시 최태원 회장 등 총수 일가 직접 지분은 1.39%에 불과했다. 게다가 최 회장 등 경영진이 분식회계 등으로 검찰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어 2만원 하던 주가는 5,000원대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 틈을 노려 소버린은 1,700억원이 채 안 되는 돈으로 최대 주주가 됐다. 주주권 보호를 명분으로 적극적인 경영 참여를 표방하는 ‘행동주의 펀드‘가 경영권을 위협하기에 절호의 기회였다.

2019년 1월 23일,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의결권 행사 지침) 방향을 검토하는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는 내년 3월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조양호 회장 이사 연임에 반대하기로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대주주 탈법에 대해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극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그 며칠 전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대한항공과 한진칼에 대해 국민연금이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검토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증권사 분석가 출신 강성부씨가 대표인 ‘한국기업지배구조펀드’(KCGIㆍ이하 강성부 펀드)가 지난해 11월 한진칼 지분 9%를 매입해 2대 주주가 된 후 한진그룹의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것과 시기가 겹친다.

소버린은 지배권을 놓고 2년간 싸움을 벌이다, 2005년 8월 SK㈜ 주식을 전량 처분했다. 이를 통해 2년 만에 소버린이 벌어들인 이익이 1조원에 달한다. 소버린 철수 후 국내에서는 행동주의 펀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교수로서 ‘소액주주 운동’에 적극적이던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과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 등은 총수 일가가 적은 지분으로 대기업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관행을 고치기 위해, 기관투자자 등 주주들이 뭉쳐 경영진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효과적임이 입증됐다고 평가했다. 반면 이런 ‘주주 이익 강화’ 시도는 주식투자자에게만 좋을 뿐 기업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해온 사회나 국민경제에는 오히려 해악이 될 뿐이라는 반박도 거셌다. 단기 차익을 노리는 행동주의 펀드에 맞서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필요 이상 지분을 확보하느라 투자 여력이 줄어 장기적으로 기업경쟁력을 악화시킨다는 지적도 나왔다.

16년 지난 지금 볼 때, 소버린 사태를 계기로 대기업들이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경영 투명성을 확대해 왔다는 점에서 소액주주 운동가들의 주장은 옳았다. 하지만 경영권 안정 노력이 기업 투자 확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 역시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난 24일 한국경제연구원은 “행동주의 펀드가 개입한 기업은 1년 후 고용이 전년보다 18.1%, 투자는 23.8% 감소했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단 3년 후에는 다시 증가로 회복된다는 점에서 수치상 충격은 단기적이다.

하지만 경영권 위협을 경험한 기업 오너에게는 트라우마가 오래 남는다. 전통의 식품회사 오너에게서 확인한 것이다. 그 오너에게 가장 힘들었던 적이 언제냐고 물었더니, “사모펀드의 경영권 공격을 받던 시절”이라고 답했다. 기업승계 과정에서 상속세를 내느라 지분이 줄어들었는데, 그 틈을 타고 사모펀드가 지분을 사 모았다. 이를 막기 위해 우호 지분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했단다. 제대로 기술개발이나 투자에 신경을 쓸 수도 없었다.

한진 총수 일가에 대한 여론은 차갑다. 그렇다고 정부가 한진 경영권을 공격하는 강성부 펀드를 돕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다른 기업인들의 투자심리를 얼어붙게 할 것이다. 올해 경제전망이 미세먼지 낀 하늘처럼 잿빛인 상황에서 ‘기업 투자 활성화’와 ‘국민연금을 통한 기업 규제’ 사이를 오가는 정부의 갈지자 행보가 가슴을 더 답답하게 한다.

정영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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