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3> 2ㆍ8 독립선언의 숨은 조력자
체포된 유학생들 위해 옥바라지ㆍ구명 운동ㆍ기금 모금
“조선청년 구해달라” 호소에 日변호사 4명 마음 움직여
백남훈 임원 활동… 대만ㆍ中유학생들과도 국제적 연대
일본 도쿄의 조선유학생 단체 가운데 비밀결사 조직이었던 조선학회 회원들이 1920년 4월, 2ㆍ8 독립선언의 대표자들이 출옥한 이후 모여 촬영한 사진. 왼쪽 상단에 이날 촬영에 참석하지 못한 백남훈의 사진이 별도로 삽입돼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2019-01-28(한국일보)

백설(白雪)이 분분(紛紛)한 밤이었다. 1919년 2월 8일. 이역만리 타향 일본 도쿄(東京) 지요다구(千代田區) 사루가쿠초(猿樂町)에 자리한 일본 유일한 조선인 유학생 아지트 ‘재일본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현 재일본 한국 YMCA)’ 회관 강당에선 조선 청년 400여 명의 만세삼창이 폭설처럼 울려 퍼졌다. 앞서 대외적으론 오후 2시부터 조선 유학생들의 친목 모임인 학우회 임원선거 총회가 예정됐지만, 이날 집회는 조선청년독립단이 주최하는 독립선언 대회라는 사실이 암암리에 알려져 있었다.

1919년 3ㆍ1운동의 불씨를 일제의 심장인 도쿄 시내에서 지폈던 조선인 유학생들의 2ㆍ8 독립선언의 현장. 이 역사적 장면의 페이지들을 넘길 수 있었던 동력을 만들어낸 유학생들 배후엔 당시 34세였던 황해도 은율군 출신 청년 백남훈(白南薰ㆍ1885~1967)이 있었다.

백남훈의 사망 직후 출간된 회고록 ‘나의 일생’(1968ㆍ백남훈선생기념사업회)의 추천사에서 친구 김낙영(독립운동가)은 백남훈을 이렇게 말했다. ‘2ㆍ8운동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선언문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는 의미) 참가한 사람들 이상으로 수고를 많이 한 사람. 나라 일을 위하여 교도소에 붙잡혀 들어간 사람들의 음식이나 책, 의복을 들여보내는 일, 변호사 대는 일, 어려운 학생 도와주는 일, 일본 사람과의 종종 생기는 시끄러운 일의 교섭 또는 처리 등 말하자면 공사나 대사가 하는 일을 도맡아서 한 사람. 이 모든 일을 대표하여 수고한 분이 해온(백남훈의 호)이었던 것이다.’

거사의 뒤에서 묵묵히 일해 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늘 그렇듯, 2ㆍ8 독립선언의 숨은 주역이었던 백남훈의 사연도 100년 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경기 용인시에 거주하는 백남훈의 손자 백수현(61)씨 조차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기억이나 문건이 없다고 했다. “옛날에 할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위해 자료를 모으는 작은 아버지를 도왔던 기억만 있어요. 할아버지가 해방 후 밀양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셨을 때 많이 힘드셨다는 이야기 정도만 들었을 뿐입니다.” 도쿄에서 2ㆍ8독립선언을 전후해 운동가들의 그림자로 헌신한 그의 행적은 가족에게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백남훈은 찬란한 1919년 봄의 독립운동 물결 가운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조력자에 가까웠다. 붙잡혀간 동료들의 구명을 위해 모금운동을 주도했고, 이들의 옥바라지를 도맡았으며, 형량을 줄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일본인 변호인들을 그러모았다. 베일에 가려졌던 그의 행적과 2ㆍ8 운동의 여러 이야기를 1968년 출간된 자서전 ‘나의 일생’과 김인덕의 ‘일본지역유학생 2ㆍ8운동과 3ㆍ1운동’,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독립운동사 제3권’, 사전 입수한 일본 규슈(九州)대 오노 야스테루(小野容照) 교수의 3월 출판 예정 ‘한국역사연구회 3ㆍ1운동 총서’ 원고를 토대로 재현했다.

1917년부터 1923년까지 재일본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에서 간사와 총무로 몸 담았던 백남훈. 재일본동경YMCA 제공

◇일본인 유력 변호인단 구성에 온 힘

50년전 출간돼 사실상 시중에서 사라진 백남훈의 ‘나의 일생’에는 눈이 쏟아진 2월 8일 현장이 그 어떤 문건에서보다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이에 따르면 만세를 외치던 사람들의 단상 뒤 춘원 이광수가 쓴 독립선언서가 현수막으로 걸려 있는 가운데 강당에 미리 잠복해 있던 일제 경찰의 진압이 이뤄졌다. 의자가 날아다니고, 이곳저곳에서 격투가 벌어지는 아수라장 속에서 경찰 밀정 선우갑이 지도부를 지목한다. “이놈 잡아라, 저놈 묶어라.” 현장에서 붙잡힌 독립선언서 서명자 9명(11명이나 2명은 일본에 없었다)을 포함한 20여명의 학생 가운데에는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재 일본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간사로 일하던 백남훈도 있었다.

자료들에 따르면 백남훈은 이미 3개월전부터 이날의 거사를 알고 있었고, 유학생들의 뒷바라지를 챙겼다. ‘나의 일생’에는 1918년 12월의 어느날 일본 정칙영어학교 재학생 백관수(당시 30세)가 찾아와 백남훈에게 “일본의 조선 유학생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정하고 준비 중입니다. 백 선생님께서는 일의 뒷수습을 해 주셔야 하니 모른 척 해 주십시오. 그리고 기독교청년회의 등사판을 사용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적혀있다. 2월 8일 밤 현장에서 도쿄 지요다구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로 끌려갔던 백남훈은 다행히 바로 석방됐고, 그의 일은 이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백남훈의 시급한 과제는 9명에 대한 재판 준비였고 변호사 선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백남훈은 가장 먼저 찾아간 기독교 청년회의 이사를 맡고 있던 일본인 법학박사에게 문전박대를 당했다. 분한 마음도 잠시, 걱정이 밀려왔다. 그는 회고록에 ‘이 재판이 조선이 아닌 외국인 일본에서 열리는데다 변호사 비용을 댈 기독교청년회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선 청년들의 일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에게 변호를 의뢰하기도 어려웠다’며 당시의 고민을 토로했다.

지성이면 감천이었을까. 다행스럽게 백남훈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도쿄대학(당시 동경제국대학) 학생청년회 간사에게 의논, 이아이 오시유키(今井嘉幸), 사쿠마 고죠(作間耕造) 변호사를 소개받고 흔쾌히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변호 약속을 받아냈다. 백남훈은 여기서 더 만족하지 않고 조선인 관련 재판의 권위자를 찾다가 1911년 신민회사건(105인사건)의 변호를 맡아 유명해진 하나이 다구조오(花井卓藏) 변호사를 찾아가 역시 변호 허락을 받았다. 이어 우자와 후사아키(鵜澤聽明) 변호사를 찾아가 조선인 유학생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저작권 한국일보]2ㆍ8 독립선언/ 강준구 기자/2019-01-28(한국일보)

결정적으로 이 재판은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가 처음으로 식민지 조선인을 변호한 사건이기도 하다. 후세는 무장독립단체 의열단(義烈團)원 김지섭을 변호하고 박열 대역 사건의 변호사로도 활동하는 등 수많은 조선인 관련 사건 변호로 조선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우리들의 변호사’로 불린 인물이다.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인으로는 최초로 2004년 서훈(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았다.

후세 변호사는 사회주의 색채가 강했던 인사로, 백남훈은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길 때 조심스러워한 흔적이 뚜렷하다. 회고록에서 그에 대한 기록을 가장 마지막에 배치하면서 ‘후세 다쓰지 변호사가 자진 변호를 요청하여 왔는데 후세씨는 사회주의 색채를 가진 분이라고 하여 다소 주저하였으나 우리를 위하여 변호하여 준다는 호의를 생각하여 감사히 수락하였다’고 썼다. 4명의 변호사는 백남훈이 직접 찾아가 변호를 부탁한 반면 후세 변호사는 자진해서 변호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도쿄 재 일본 한국 YMCA의 다즈케 가즈히사(田附和久) 2ㆍ8 독립선언 기념자료실 실장은 “‘나의 일생’이 출판된 시기(1968년)가 한국의 반공 시대였기 때문에 사회주의 경향을 가진 후세 변호사에 대해 일부러 낮은 평가를 한 것이 아니냐는 학계 의견도 있다”라며 “백남훈이 직접 후세 변호사를 찾아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더 연구되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미 후세 변호사는 경술국치 1년 후인 1911년 ‘조선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는 글을 써 일제강점기 최초의 필화사건을 겪었던 인물이어서 백남훈이 이를 알고 직접 그를 찾아갔을 수 있지만 당시 반공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소극적으로 기록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렇게 구성된 5인의 일본인 변호인단은 무료로 2ㆍ8 독립선언 주역들의 변호를 맡았다. 일본 사법당국은 이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하려 했으나 변호사들의 변론덕분에 출판법 위반이 최종 적용돼 각각 7~9개월 형을 받았다.

항일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적을 인정받아 일본인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후세 다쓰지 변호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옥바라지 이어 성탄절 옥중 기도모임

재판에 필요한 기금을 모으고, 감옥에 있는 9명의 사식을 넣고, 서적과 의복을 넣어주는 것도 백남훈의 일이었다. 형이 확정된 뒤 면회가 월 1회로 제한되고 나서는 아예 백남훈이 이를 전담했다. 매월 감옥에 가다 보니 간수와도 친해져 간수가 ‘여기가 당신의 사랑방이냐’는 농담을 할 정도였다.

백남훈은 그해 12월 성탄절에 모두 기독교인이었던 9명을 위해 특별히 교도소장에게 한자리에 모여 기도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기도를 일본어로 할 것, 기도 이외에 다른 말은 하지 않을 것, 간수부장을 동석시킬 것을 조건으로 허락을 받고서야 간신히 성탄절 교도소 교회당에 모일 수 있었다. 백남훈은 ‘다 같이 머리를 숙여 일어로 기도하니 9인도 나도 다 울었다. 끝난 후 눈물 젖은 눈으로 인사를 교환하고 작별하였다’고 기록했다. 이듬해 3월 9일 이들은 출소했고, 이날도 백남훈이 감옥에서 나오는 이들을 맞아 제일 먼저 기독교청년회관으로 데려가 학생들과 재회시켰다.

2ㆍ8 독립선언 후 일본 정부는 도쿄 조선 기독교청년회 탄압에 나섰다. 2ㆍ8 독립선언이 이뤄진 기독교청년회가 중국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와 연결된 거점이자 일본 내 조선인들의 독립운동 근원지라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일본의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기독교청년회 회관은 유일하게 마음 놓고 드나들 수 있는 집과 다름 없었다. 일본에서 식민지 조선인이 소유한 유일 건물이 바로 이 기독교청년회 회관이었다. 1920년 재 일본 유학생 총원 828명 가운데 682명이 도쿄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이들 대부분이 기독교청년회관을 드나들며 각종 학생단체 회합과 강연에 참석해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18년에는 특히 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내세운 민족자결주의가 조선유학생들에게 민족독립을 쟁취할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조선유학생들의 활발한 활동에 일본 정부는 식민지 시대 일본 유학생을 ‘민족해방운동의 저수지’라고 불렀다. 이들이 모이는 기독교청년회 회관에 대해 일본 내무부는 ‘종교적 회관이 일종의 배일사상자 양성기관 같이 보인다’고 기록했다.

재일 조선인유학생들의 아지트였던 조선기독교청년회 회관. 1914년에 지어져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됐다. 재일본YMCA 제공/2019-01-28(한국일보)
◇유학생들 간의 활발한 국제적 교류

당시 조선 유학생들이 ‘조선인들끼리’의 조직만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일본의 식민지, 반 식민지 상태였던 대만과 중국 유학생들과의 연대 조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일본 규슈대 오노 야스테루(小野容照) 교수는 ‘한국역사연구회 3ㆍ1운동 총서’에서 일본 유학생들간의 국제적 교류가 활발했고, 이것이 2ㆍ8 독립선언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 오노 교수는 1915년 결성된 신아동맹당을 도쿄에서 활동하던 조선인이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국제교류단체로, 조선, 대만, 중국 학생들이 식민지배하의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해 협력하기로 뜻을 같이한 단체로 주목했다. 오노 교수는 “출판을 중심으로 하는 합법적인 계몽활동밖에 경험하지 못했던 조선인 유학생에게 신아동맹당은 첫 독립운동이었다”라고 평했다.

일본에서 생활한 14년간 백남훈은 학우회의 회장, 기독교청년회의 간사와 총무, 비밀결사였던 조선학회의 서기를 맡으며 조선유학생 조직 임원 명단에 내내 이름을 올렸다. 그의 교류는 조선인에게만 한정되지 않았다. 2ㆍ8 독립선언 후 일본 정부가 조선기독교청년회를 탄압할 때 당대 일본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의 대표격이었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교수는 조선기독교청년회 편에 섰다. 다츠케 실장은 “요시노 교수는 대부분의 일본인이 조선의 사정에 무관심할 때 백남훈을 비롯한 조선유학생들을 자신의 모임인 여명회에 초청해 이야기를 듣고, 또 기독교 청년회의 초청으로 청년회관에서 강연까지 했던 예외적인 인물이었다”라며 “일본 정부가 조선기독교청년회를 탄압할 때 백남훈을 ‘우리들의 친우로서 진실되고 온후한 신사’라고 평가하며 조선기독교청년회의 편을 들었다”고 말했다.

주건일 서울 YMCA 간사는 “1910년대 당시부터 서울 YMCA에서 간사를 일본의 조선기독교청년회 총무로 파견을 보내는 게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라며 “지난 100년간 2ㆍ8 독립운동 기념식을 도쿄와 서울에서 동시에 열어왔는데, 이번 100주년을 맞아 2ㆍ8 독립선언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독립선언서에 담긴 세계 평화의 열망과 억압당하는 많은 사람을 대변하고자 한 정신을 어떻게 이어나갈지 논의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재일본동경YMCA 건물에 마련돼 있는 2ㆍ8 역사자료관. 재일본동경YMCA 제공

1923년 백남훈은 14년만에 고국으로 돌아가 이후 20여년을 교육계에 종사했다. 1925년에는 백관수 등과 함께 조선의 현재를 학술적으로 조사, 연구해 발표하는 조선사정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창씨개명은 끝까지 거부했다.

하지만 그도 친일행적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조선총독부가 1935년 펴낸 ‘조선공로자명감’에 이름이 올라가면서다. 민족문제연구소측은 “백남훈은 조선임전보국단 창설 발기인에 이름이 올랐다”고 지적했다. 논란에도 서훈(1990년 애국장)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백남훈은 해방 후 한국민주당 총무, 5대 국회의원(민의원)까지 지낸 뒤 박정희 군사 쿠데타 이후 정치인생을 마감했다.

1968년 출판된 백남훈의 회고록 '나의 일생' 원고. 독립기념관 제공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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