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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을 받는 이유? 이전 모든 수상자와 마찬가지로 ‘노력’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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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을 받는 이유? 이전 모든 수상자와 마찬가지로 ‘노력’ 때문”

입력
2019.01.24 19:00
수정
2019.01.24 20:48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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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휴고상 시상식에서3년 연속 최우수 장편상을 수상한노라 제미신이 청중을 향해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다. 유튜브 캡처
지난해 휴고상 시상식에서3년 연속 최우수 장편상을 수상한노라 제미신이 청중을 향해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다. 유튜브 캡처

 다섯 번째 계절 

 N.K.제미신 지음ㆍ박슬라 옮김 

 황금가지 발행ㆍ612쪽ㆍ1만5,800원 

지난해 8월 19일미국 샌프란시스코 새너제이에서 열린 휴고상 시상식. 풍성한 검은 머리를 틀어 올린 흑인 여성이 단상에 올랐다. 2016년소설 ‘다섯 번째 계절’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로는 처음으로 휴고상 최우수 장편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2년 연속 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뤄낸 것도 모자라 1953년 휴고상 제정 이래 최초로 3년 연속 수상이라는 역사를 만든 노라 제미신(N. K. 제미신)이었다. 휴고상은 한해 가장 뛰어난 성취를 보인 SF문학에 수여되는 상으로 SF계의 노벨문학상이라 불린다.

“친구들이 자꾸 문자 메시지를 보내서 수상소감을 읽을 수가 없네요.”제미신은 유쾌하고 능청스럽게 입을 뗀 후 작심한 듯 준비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반대론자들이 있겠죠.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제가 이 자리에서 상을 받는 이유는 이전에 이 상을 받았던 사람들과 똑같은 이유에요. 그건 바로 제가 ‘엄청’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죠(여기서 한 차례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가 터졌다). 흑인 작가의 작품은 흑인 독자들만이 읽을 거라는 가정 때문에 제 첫 소설이 계속 거절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계속 썼어요. 하지만 제가 이 무대에 설 자격이 없다고 말한 그들은 지금의 이런 영광을 누릴 수 없겠죠. 이제 그들 방향을 향해 이 로켓 모양의 가운데손가락을 들어올리겠습니다.” 오랫동안 백인 남성 작가 중심이었던 장르에서, 아프리카계 여성 작가로서 많은 편견에 시달려왔던 제미신이 통렬한 한방을 날리는 순간이었다.

제미신에게 2016년 처음으로 휴고상을 안긴 작품이자, 시리즈 전부가 휴고상 수상작이 된 ‘부서진 대지’ 3부작의 포문을 연‘다섯 번째 계절’이 출간됐다. 시리즈는 신비한 힘을 지닌 채 태어난 여성들의 모험을 그린다. 신비한 힘은 열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를 통제하고 지진 활동을 일으킬 수 있는 ‘조산력(造山力)’으로 묘사된다. 시리즈는 권당 600쪽에 육박할 만큼 방대한 세계관 속에 쉼 없이 내달리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숨을 멈추게 하는 아름다운 문체로 독자를 이끈다.

N.K. 제미신 '다섯 번째 계절'. 황금가지 제공
N.K. 제미신 '다섯 번째 계절'. 황금가지 제공

소설의 배경은 ‘아버지 대지’라는 개념이 지배하는 혹독한 세계, 그 안에서도 ‘고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거대한 초대륙이다. 이곳에 겨울이 최소 반년에서 길게는 수 세대에 걸치고 지진 활동이나 다른 대규모의 환경 변화가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재해의 시기가 있다. ‘다섯 번째 계절’이다. 지진활동을 조정할 수 있는 소수종족 ‘오로진’은 두려움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꼭 필요한 존재이기도 하다. 소설은 이 오로진으로 태어난 세 여성 인물 다마야와 시에나이트, 에쑨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오로진이라는 이유로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오로진 훈련소이자 착취기관인 펄크럼으로 보내지는 10대 소녀 다마야, 펄크럼에서교육받은 뒤 임무 수행을 위해 떠나는 20대 여성 시에나이트, 오로진으로서의 능력을 숨긴 채 살아가다 자식을 잃은 30대 여성 에쑨의 사연이 엇갈리며 이야기는 전진한다. 오로진의 운명을 타고 난 세 여성이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과 이를 헤쳐나가는 모험을 통해, 소설은 사회적으로 핍박당하는 종족에 대한 인종 차별과 문화적 충돌을 그려낸다. 소설 후반부에 다다랐을 때 독자는 세 여성이 오로진이라는 배경만 공유하는 것이 아닌 특별한 하나의 운명으로 엮여 있음을 알게 된다.

노라 제미신은 2018년 영국환상문학협회가 수여하는 영국환상문학상의 특별상이자 그해 장르소설계에 공헌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칼 에드워드 와그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황금가지 제공ㆍlaura hanifin
노라 제미신은 2018년 영국환상문학협회가 수여하는 영국환상문학상의 특별상이자 그해 장르소설계에 공헌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칼 에드워드 와그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황금가지 제공ㆍlaura hanifin

작가는 2009년 미항공우주국(NASA)이 후원하는 천문학 관련 워크숍에 참석했다 얻은 아이디어를 확장시켜 소설을 탄생시켰다. 소설은 땅에 대한 다양한 비유와 놀라운 상상력으로 ‘SF판타지의 새로운 황금기’라는 수식을 획득했다. 인류가 자행해온 뿌리 깊은 차별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여러은유가 많은 생각거리를 던진다. 작가 역시 소설이 현실과 연계돼 읽히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2016년 ‘다섯 번째 계절’ 출간 당시영국 일간 가디언과 가진 인터뷰에서 제미신은 “흑인 여성으로서, 나는 현상 유지에 딱히 관심이 없다. 내가 왜 그러겠는가? 지금의 현실은 해롭다. 상당히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데다, 그 외에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한가득”이라고 밝혔다.

유명 SF 작가가 됐지만 제미신의 지난 여정이 무난했던건 아니다. 2000년대 중반에 쓴 첫 장편 소설 ‘킬링 문’은 고대 이집트를 연상시키는 배경에 유색인 캐릭터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져 주류와는 동떨어진 작품이라는 이유로 출판을 거절당했다. 2015년 SF문학계에도‘다양성’이 화두로 떠오르자 휴고상 수상에서 보수적인 일부 회원들이 특정 작품을 후보로 밀어주던 이전 관행이 문제시 됐고, 이듬해 제미신이 휴고상을 타자 ‘실력 덕이 아니라 흑인 여성이어서 탔다’고 비하하는 목소리 역시 나왔다. 휴고상 시상식장에서 제미신의 소감은 이런 일부 뒷말에 대한 일침이었다.

소설은 굳이 정치적신념에 대한강박 때문이 아니라도 충분히 흥미롭게 읽힌다. 현재 20여 개국에 판권이 판매됐으며 미국 TNT 드라마 채널에서 드라마 제작도 준비 중이다. 후속작 ‘오벨리스크 관문(가제)’와 ‘돌빛 하늘(가제)’ 역시 2019년 하반기와 2020년 상반기 순차적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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