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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외벽에 또렷한 한글

입력
2019.01.2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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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준호의 실크로드 천일야화] <41> 알렉산더와 클레오파트라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2002년 새로 문을 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외벽에 한글로 '월'자가 선명하다.
2002년 새로 문을 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외벽에 한글로 '월'자가 선명하다.

알렉산드리아를 가는 길에 각오를 단단히 했다. 어릴 적부터 워낙 지중해 세계도시에 대한 환상을 키워왔기 때문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상상 속의 알렉산드리아에는 아직도 청년 알렉산더 대왕과 클레오파트라가 살고 있었고, 도서관에는 세계의 석학들이 지구와 우주를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카이로에서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3시간 정도 달렸다. 도로 빼고는 인공의 흔적이 잘 보이지 않던 지평선 멀리서 낮은 건물들이 고개를 들면서 호흡이 빨라졌다. 드디어 알렉산드리아다.

이곳에서는 큰길이 모두 지중해를 끼고 뻗어 있었다. 그래서 주말에 잘못 발을 디뎠다가는 버스 안에서 몇 시간이고 갇혀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이날 교통은 뻥뻥 뚫렸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도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알렉산더는 BC 332년 이집트를 페르시아의 철권 통치로부터 독립시켰다. 그는 페르시아 정복자들과 달리 이집트의 전통과 종교를 존중했고, 정복자들의 토지를 모두 빼앗아 이집트인에게 돌려줬다. 이집트에서 소의 화신인 아피스 제사에도 참석했다. 페르시아 치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나자 이집트인들은 알렉산더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알렉산더는 스물 네살 때 나일강 서쪽의 신전에서 신탁을 들었다고 주장하면서 이집트인의 신뢰는 하늘을 찔렀다. 알렉산드리아, 이 도시의 탄생은 BC 331년 1월20일이라고 역사는 전한다. 알렉산더가 지중해의 이름 없는 어촌을 둘러보다 “내 이름을 붙인 도시를 짓겠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날이다. 지중해와 마레오티스 호수 사이의 모래톱이었다.

알렉산더는 BC 327년 정복전쟁에 나서 인도 서북부까지 1만7,600㎞를 원정했다. 귀국길인 BC 323년 6월초 바빌로니아에서 고열로 숨진 그는 “나를 미라로 만들어 아버지인 아몬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아몬은 이집트의 대표 신이다.

말 64마리가 이끄는 영구차 부대가 이집트를 향해 움직이던 중 ‘알렉산더 대왕을 고국 마케도니아에 매장해야 한다’는 무리들이 들고 일어났다. 권력투쟁이 시신을 중심으로 벌어진 것이다. 이 투쟁에서 승리한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 시신을 알렉산드리아로 옮겼다.

마케도니아의 귀족 장군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리아로 수도를 옮기고 항구도시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이집트에서 유일하게 해상무역과 내륙운송이 가능한 곳이기도 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파로스 등대가 있던 자리 부근에 배들이 정박해 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파로스 등대가 있던 자리 부근에 배들이 정박해 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파로스 등대는 바로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명령으로 BC 290년 세워졌다. 버스가 웬 공원을 한참이나 들어가 등대 자리라며 바닷가에 내려줬다. 두리번두리번 등대를 찾았지만 보일 턱이 없었다. 500여 년 전에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파로스섬의 방파제 남쪽에 바빌로니아 양식으로 건설된 원추형의 이 등대는 꼭대기에 바다의 신 포세이돈 조각상, 그 아래에 7.3m, 38m, 69m의 3단 기단이 겹쳐져 120m 높이로 세워졌다고 한다.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밤에는 불빛, 낮에는 반사경으로 선박의 안전을 책임졌던 이 등대는 수 차례의 대지진으로 일부가 무너졌고 1480년에 등대 조각으로 요새를 만들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바닷가 요새에는 어부들만 무심한 세월을 낚고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건립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BC 288년 건립된 이 도서관은 한창 때 90만권의 장서를 자랑했다. 당시 그리스 전체와 아시아 일부 지역의 책을 더한 것과 비슷했다.

학생들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다.
학생들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다.

이들의 책 욕심을 전해주는 일화가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 때 아테네로부터 그리스 3대 비극작가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원고를 빌렸다. 보통은 거액의 보증금을 맡기고 책이나 원고를 빌려와 필사한 후 원본을 돌려줬지만 이때는 달랐다. 보증금을 포기하고 필사본만 돌려보낸 것이다.

BC 47년 로마 공격 때 일부가 탔고 415년에는 잿더미로 사라진 이 도서관을 부활시키자는 논의가 1974년 알렉산드리아대학에서 시작됐다. 1995년 유네스코의 전폭적 지지로 공사가 시작됐고, 2002년 10월16일 문을 열었다.

이곳에 들어갈 때도 2곳의 검문소를 거쳐야 했다. 몇 단계의 층계로 구분된 도서관 안은 개방형 좌석과 폐쇄형 탁자 그리고 이름 모를 책이 가득 꽂혀있는 책꽂이로 가득했다. 여행객이 오락가락 하는데도 학생들은 책 속에 파묻혀 있었다. 몇 개 층을 통합한 공간에 자연광이 천장 유리를 뚫고 비치고 있었다.

이 도서관 외벽은 세계 각국의 언어로 뒤덮여 있었다. 왼쪽 중간에 한글 ‘월’자가 커다랗게 적혀 있어 놓칠래야 놓칠 수 없었다.

알렉산드리아 콰이트베이 앞으로 유람선이 떠다니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콰이트베이 앞으로 유람선이 떠다니고 있다.

15세기에 바닷가에 만들어진 콰이트베이 요새 주변은 고양이 천국이었다. 맘루크 왕조의 술탄 콰이트베이가 오스만투르크로부터 해안선을 방어하기 위해 지은 성채였다. 19세기 무너졌다 20세기에 재건된 이곳은 군사에서 관광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이집트 여행의 마지막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떠나면서 클레오파트라를 빼놓을 수는 없겠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때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은 공주에게 흔히 붙여진 이름이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연기한 팜므파탈은 바로 클레오파트라 7세로 BC 70년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복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해 이집트를 공동 통치했으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가 서른 살 많은 카이사르를 유혹한 얘기는 유명하다. 하인을 상인으로 분장시켜 카이사르에게 카페트를 선물로 보냈는데 그 속에서 반라의 클레오파트라 7세가 나왔다는 것이다. 둘 사이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마지막 왕인 15세, 카이사리온이 태어나긴 했지만 클레오파트라 7세는 자신을 정부로만 취급했던 카이사르와 로마에 실망했다.

클레오파트라 7세의 옆모습을 새긴 주화.
클레오파트라 7세의 옆모습을 새긴 주화.

그 후 안토니우스와 정식 결혼해 자식 3명을 낳고 살았지만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 패하면서 이마저 끝이 났다. 옥타비아누스 유혹에 실패한 그가 스스로 독사에 물려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전쟁에는 문외한이었지만 언어와 예술, 문화에 조예가 깊었던 클레오파트라 7세의 코가 1㎝만 낮았어도 역사가 바뀌었을까 자문해 본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유일하게 새겨진 동전으로 유추해보자면 결론은 ‘아니오’다. 역사를 바꾼 것은 그의 미모가 아니라 머리와 가슴이었다.

전준호기자 jhj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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