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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기업인 결의대회? 토론장!

입력
2019.01.21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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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19 기업인과의 대화’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 행사에는 주요그룹 총수 등 130여명의 기업인이 참석했다. 류효진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19 기업인과의 대화’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 행사에는 주요그룹 총수 등 130여명의 기업인이 참석했다. 류효진 기자

취임 첫 해였던 2008년 4월28일 이명박 대통령은 삼성ㆍ현대자동차ㆍSKㆍLG그룹 총수 등 기업인들을 청와대로 불러 경제 관련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대기업 총수들은 과거에 비해 대폭 늘어난 투자ㆍ고용 계획을 쏟아냈고, 대통령은 전국경제인연합회로부터 30대 기업의 투자 규모와 신규 고용 계획을 ‘보고’ 받았다. 당시 이 대통령은 “어려운 때일수록 공격적 경영으로 과감하게 투자해달라”고 말했다.

2013년 취임한 박근혜 전 대통령도 그 해 8월28일 대기업 회장단과 청와대에서 첫 번째 간담회를 열었는데, 마찬가지로 기업에 과감하고 선제적인 투자를 당부했다. 당시 30대 그룹은 연간 투자액을 당초 계획보다 6조원 늘리고, 신규 고용 규모도 1만3,000명 늘어난 14만명으로 확대하겠다고 화답했다.

대통령과 기업인의 만남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기업은 청와대의 ‘역점 과제’에 맞춰 준비한 투자 계획과 성과를 쏟아냈고, 대통령은 규제 완화 등을 약속하면서 기업들의 ‘성의 표시’를 촉구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녹색성장’, 박근혜 전 대통령의 ‘창조경제’와 ‘청년희망펀드’가 그렇게 힘을 얻었다. 형식은 간담회였지만 청와대 눈치를 봐야 하는 기업인의 ‘결의대회’였고, 대통령의 경제 훈시를 듣는 자리였다. 소통은 없었다.

진보 정권으로 분류되는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의제가 대ㆍ중소기업의 동반성장과 상생협력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로 대기업 총수들을 불러 ‘대ㆍ중소기업 상생협력 보고 대회’를 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상생협력이 정부의 강요에 의해 추진되면 장기적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강조했지만, 기업들이 느끼는 온도 차는 분명했다. ‘공정경제’를 주요 국정과제로 채택한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 대기업들이 앞다퉈 2,3차 협력사들과의 상생협력 방안을 내놓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역대 대통령들이 한결같이 기업인과 간담회를 열고, 그 자리에선 ‘투자를 늘려 일자리를 만들자’,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살아보자’는 희망적인 이야기가 반복되지만 큰 울림이 없던 것은 이런 한계 때문일 것이다.

지난 15일 문재인 대통령이 130여명의 기업인을 청와대로 초청해 진행한 ‘기업인과의 대화’는 ‘수박 겉핥기’ 수준이었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의 정책 방향 제시→기업의 투자 결의’로 이어졌던 상명하복식 대화 대신 쌍방향 토론이 시도됐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물론 일부 기업인들은 정부 시책에 맞춰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홍보하는데 급급했지만, “혁신 성장을 위해서는 실패에 대한 용납이 필요하다”(최태원 SK 회장)거나 “공무원이 규제를 왜 유지해야 하는지 입증하지 못하면 자동 폐지하도록 바뀌어야 한다”(이종태 퍼시스 회장)는 등 경제 문제에 화두를 던지거나 실질적인 정책 제안을 하는 기업인도 적지 않았다.

내용을 차치하더라도 대통령과 기업인이 격의 없이 토론한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 일자리 정책의 실현 도구쯤으로 여겨졌던 기업이 경제 정책을 함께 논의하는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청와대의 시각 변화도 읽힌다.

그러나 토론의 물꼬를 튼 정도로 만족하기엔 눈 앞의 경제 문제가 시급하다. 집권 3년차에 나온 이런 시도가 이미 늦은 것 아니냐는 아쉬움도 나온다. 업종별, 기업규모별 대화를 늘려 경제 현안에 대한 ‘심화 토론’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돌이켜보면 기업들이 과거 대통령 앞에서 약속했던 투자ㆍ고용 계획은 실제 이행된 경우가 많지 않다. 이번 대화에서 논의된 내용들 역시 경제 정책의 실질적인 변화로,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지 예상하긴 어렵다. 어느 때보다 ‘분위기와 그림’이 좋았던 만남이었지만 ‘인증샷’ 남기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앞으로가 중요하다. 좋은 분위기를 경제 활력으로 연결시키는 건 정부의 몫이기도 하고, 기업의 책임이기도 하다.

한준규 산업부장 manb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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