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아 엄마, 세상에 외치다] <14> 특수학교에선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장애인 엄마, 세상에 외치다. 삽화=김경진기자

일반초등학교에 입학했던 아들이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치며 이듬해 5월 특수학교로 전학을 했다. 통합교육에서 맞춤 특수교육으로의 전환. 엄마인 나는 아들이 학교에 다니는 목표를 다시 설정해야 했다.

아들 인생에 다시는 비장애 아이들과 생활해 볼 통합교육의 기회가 없을 것이란 사실이 먹먹하게 다가왔지만, 다른 한 편에선 깊이 있는 특수교육을 통해 아들이 전반적인 면에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솟았다.

특수학교로의 등교 첫날, 상황파악이 안 돼 울부짖는 아들을 교실에 떼어놓고 달아나는데 교실 문밖에 붙어있는 시간표가 얼핏 눈에 띈다. 국어, 수학, 창체…. 잘못 봤나 했다. 저 시간표는 아들과 쌍둥이인 비장애 딸의 시간표와 똑같다.

하굣길에 데리러 가서 한 번 더 확인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특수학교라 해서 ‘특수한 맞춤 교육’을 기대했는데 일반초등학교와 똑같은 시간표대로 학습이 이뤄지고 있었다.

“특수학교에서 왜?”라는 생각에 교육부에 문의를 했다. “졸업 이후 사회통합을 위해 장애 학생들도 비장애 학생들과 똑같은 교과 내용을 배우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큰 흐름은 같되 수업 내용은 장애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뤄진다는 말도 덧붙인다.

개운하지는 않지만 아직은 특수학교의 시스템을 모르는 초보 엄마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그로부터 1년 8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일반학교와 특수학교를 모두 다녀보니 어때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글쎄. 솔직하게 툭 까놓고 말해볼까? 일반학교도 특수학교도 모두 다 한숨이 난다.

대한민국은 장애가 없는 비장애인에게 모든 것이 집중돼 있다. 딸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과, 아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너무나 다르다. 같은 대한민국인가 싶을 정도로 환경이, 지지적 기반이, 시스템이 다르다.

어쨌든 다시 돌아와서 특수학교 이야기. 특수학교에 다니며 아들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큰 선물을 하나 받았다. 바로 ‘친구’라는 존재다. 일반학교에 다닐 때 아들은 친구가 없었다. 반 친구들은 착했지만 그들에게 아들은 친구라기보단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돌봐줘야 할 ‘불쌍한 존재’였다. 또는 담임으로부터 칭찬 스티커를 받기 위해 도구로 사용되는 존재가 아들이었다.

그랬던 아들이 특수학교에 와 처음으로 동등한 입장에서의 친구관계란 것을 경험했다. 너만 장애인이냐? 훗. 나도 장애인이다. 너도나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친구들이다.

전학하고 얼마 후 담임이 한 가지 소식을 전한다. 마지막 5교시의 종이 울리자 빨리 집에 가고 싶었던 아들이 옆자리 친구의 신발주머니를 들어 친구 손에 건넸다는 것이다. 도움만 받으며 살아온 아이가 서로 간의 도움이 필요한 사회 속에서 살다 보니 스스로 타인을 돕는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얘기를 전해 듣고 박수가 절로 나왔다.

그뿐이 아니다. 아들의 신경을 건드리는 라이벌 같은 친구도 생겼다. 다운증후군 여자친구와 수시로 부딪히는데 나는 그마저도 기뻐서 웃음이 난다. 인간관계는 그렇게 갈등을 통해서도 배워나가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친구 관계와 사회성 부분에서는 특수학교의 환경이 고맙다. 하지만 여기서도 고민은 있다. 아들은 졸업 후엔 세상 속에서 비장애인과 부대끼며 살아나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그들과 어울려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 특수학교에선 그것을 배울 수 없기에 이 부분은 온전히 엄마인 나의 숙제가 된다. 가정에서 따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되는 것이다.

◇장애 정도 다른 아이들 수업시수 맞추려면…

그럼 이제 교육으로 가보자. 특수학교에 간 아들은 처음의 기대대로 ‘맞춤 특수교육’을 잘 받고 있을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아 보인다. 이건 특수학교의 문제도, 담임의 문제도 아닌 시스템의 문제에서 발생한다. 개별성의 문제가 아닌 보편성의 문제인 것이다.

서로 다른 장애 정도와 특성을 보이는 6명의 장애 학생을 데리고 담임이 혼자 수업을 진행한다. 누군가는 말도 못하고 연필로 선긋기도 못하는데 누군가는 이미 한글도 잘 쓰고 숫자 개념도 알고 있다. IEP라는 개별화교육 회의를 통해 학생 개개인별 학습 목표가 정해져 있지만, 교실 현장에서 매 시간마다 IEP에 맞춰 수업을 진행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당장 오늘 가르쳐야 할 교과 분량이 정해져 있다. 이것을 수업시수라 한다. 국어는 1년에 몇 시간, 수학은 몇 시간 이렇게 정해져 있다는 얘기다. 그런 상황에서 교사는 일단 진도를 나가야 한다.

수업이 진행되는 40분 동안 6명 학생 모두에게 개별적인 교재와 교구를 따로 제공하고 그에 맞춰 개별적인 수업을 한다는 건 애초부터 말이 안 될지도 모르겠다. 하루에 한 두 시간은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모든 수업에서 그러하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그러다 보니 “집중력 있게 특수교육이 진행되어야 할 특수학교에서 오히려 전일적인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는 현장의 고백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해를 위해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특수학교의 현장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이다. 이번 시간에 배울 주제는 ‘도서관’이라 가정해 본다. 우리 아들처럼 도서관이 먹는 건지 공간을 뜻하는 건지도 모르는 학생은 그에 맞춰 이미지화된 것들로 개념을 이해하는 것부터 가르쳐야 하지만, 이미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고 있는 누군가는 그 안에서의 예절과 책을 빌리고 반납하는 법 등을 구체적으로 지도해야 한다.

그 와중에도 누군가는 교실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며, 누군가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누군가는 양말을 벗으려 하고, 누군가는 귀를 막고 “우우우”하며 소리를 지르고 있다.

이런 학생이 6명인데 그나마도 6명이면 감사하다. 7,8명의 과밀학급인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교사는 한 명이고, 이들은 모두 한 교실에 있다. 학생들이 난리가 난 상황에서도 교사는 40분 안에 도서관에 대해 가르쳐야 할 것들을 모두 끝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시간엔 또 다른 진도를 나갈 수 있다.

특수교육의 교과서 구성은 국립특수교육원에서 담당한다. 국어, 수학, 창체 등 비장애 학생들과 같은 주제의 교과목을 배우되 그 안의 내용은 장애 학생에 맞게 대안형 교육과정을 넣었다고 한다.

그런데 평균적인 인지를 갖고 있는 비장애 학생들과 다르게 인지력과 이해력이 천차만별인 장애 학생들에겐 ‘중간 수준의 교육’이라는 게 의미가 없다. 맞춤 교육이 아니면 소용이 없다. 그러다 보니 학생 개개인에 맞는 맞춤 특수교육은 학교 현장의 몫이 된다. 교사 개인의 몫이 된다. 시스템이 현장을 뒷받침하지 못하기에 그 부담을 온전히 교사가 지게 되는 것이다.

◇어울려 살기 위해 필요한 생활지도는 뒷전

이런 현실이다 보니 발생하는 문제가 또 있다. 당장 수업시수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라 일상생활지도 부분은 비중 있게 다루질 못하고 넘어간다.

생활지도란 밥 먹을 때 식사예절을 비롯해 양치질하고 화장실에 가서 뒤처리하는 법, 책상을 정리하고 옆자리 친구와 갈등 관계를 해결하는 법 등 말 그대로 일상적인 생활의 모든 것을 지도하는 것을 말한다. “학교는 교육하는 기관이지 양육하는 기관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지만 장애 학생들에겐 일상생활 지도도 엄연한 특수교육의 한 과정이다.

교육부와 교육청, 국립특수교육원 등은 “모든 수업 안에 일상생활지도가 함께 녹아 들어가 있다”고 하지만 현장에서도 진짜 그럴까?

일부 지역에서 공익근무요원이 장애 학생들의 화장실 뒤처리는 혐오업무라며 거부 의사를 밝혔는데, 엄연히 특수교육의 일환이어야 할 생활지도를 실무사나 지원사, 공익근무요원 등 특수교육지원 인력이 담당하곤 하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수업시수 지키기도 벅찬 교사들이 생활지도에 얼마나 큰 시간을 할애할 수 있을까.

특수학교다. 통합교육과는 그 목표가 달라야 하고 깊이 있는 특수교육을 기대하는 특수학교다. 그런 특수학교에서 배워야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어떤 것들을 배워야 이들이 졸업한 뒤 사회로 나가 비장애인이 주류인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원점에서부터 다시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류승연ㆍ작가 겸 칼럼니스트

류승연 작가 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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