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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경솔하고 오만한 우리의 맨얼굴이 거기 있다

입력
2019.01.19 04:4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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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에는 세 종류가 있다. 침묵하는 것과 소리를 내는 것, 그리고 말하는 것. 침묵하는 도구로는 수레가, 소리 내는 도구로는 소가, 말하는 도구로는 노예가 있다.” 고대 로마 농경학자 바로가 명쾌하게 정의한 도구의 범위다. 그 시대에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다. 주인 마음대로 사고팔 수 있는 노동력이자 기분 나쁘면 마구잡이로 때리고 부러뜨려도 상관없는 도구였다. 품질 좋은 노예 하나를 살뜰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은 대략 20년이었다. 그 사이에 여자 노예가 사내아이라도 낳으면 미래의 도구를 공짜로 확보하는 셈이니, 주인으로서는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초창기 로마는 이웃나라를 정복해 포로로 잡아 온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며 도로를 닦고 건물을 짓고 수로를 내는 데 썼다. 이들 ‘말하는 도구’들은 머리를 쓸 줄도 알았다. 노예의 이점이 명백해지면서 귀족들이 탐을 내 하나둘 사적 재산으로 흡수되었다. 많은 인류학자들은 로마가 노예제도의 이점에 맛을 들이면서 약탈경제를 구축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전쟁으로 이웃나라의 땅과 자원을 빼앗고 그곳에 살던 백성들을 군인으로 차출한 뒤 또 다른 전쟁에 투입해 자원과 노예를 긁어모으는 식으로 전쟁을 계속했다. 그때까지 경험한 그 어떤 경제 행위보다 높은 수익을 창출하는 전략이었다.

모든 재화가 그렇듯 흘러넘치는 잉여는 부주의한 낭비를 낳았다. 휘하에 1,000 명의 노예를 두는 귀족이 심심찮게 나오고, 성실과 절약을 미덕으로 알던 평민들까지 노예를 부렸다. 침략국에서 약탈한 자원과 노예에게 부과되는 세금 덕에 로마 시민들은 공민세를 내지 않아도 됐다.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노예들이 처리해 주니 애써 도구를 개발할 필요도 없었다. 빛나던 건축기술은 퇴보하고, 물레방아와 수확용 기계 기술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수세기 동안 제국을 지탱하던 노예제도가 영속되지 못하는 날이 왔다. 이민족으로 구성된 병사들은 툭하면 반란을 일으키고, 호전적인 켈트족이나 게르만족 앞에서 참패를 당했다. 황제조차 정확한 규모를 가늠하기 힘들 만큼 방대한 국경선 수비는 국고를 야금야금 집어삼켰다. 학자들은 로마의 급속한 팽창과 몰락에 이 노예제도가 자리 잡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로마제국 멸망과 함께 수그러들었던 노예제도는 근대 패권주의와 함께 부활했다. 식민지 개척시대, 노예무역은 가장 수익성 높은 사업 중 하나였다. 인류사의 치부라 할 이 제도는 19세기 말에 폐지됐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때마침 구원투수처럼 등장한 석유 기반 무생물 노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미래학자 벅민스터 풀러가 ‘에너지 노예’라 이름 붙인 이 무생물 노예들은 인간 노예와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다재다능했다.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 이 존재들은 극한의 작업환경에서도 군말 없이 24시간 일을 했다. 그뿐인가. 석유화학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플라스틱과 합성섬유, 합성원료가 사람들의 의식주를 든든하게 떠받쳐 주었다. 석유 기반 현대사회의 부도덕에 대한 경계와 비판의 목소리가 비등했지만, 압도적인 편리와 풍요 앞에서 그런 목소리가 설 자리가 없었다. 다만 부주의한 낭비에 취한 사회가 위기에 봉착하는 건 시간문제다.

“우리는 한국의 쓰레기통이 아니다.”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서 한국으로 반송되는 수천 톤 불법 쓰레기의 내용물이 TV 화면에 비춰지는 동안 얼굴이 화끈거렸다. 경솔하고 오만한 우리의 맨얼굴이 그 더러운 쓰레기 더미에 그대로 오버랩됐다. 어쩌다 우린 여기까지 왔는가?

누군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할지 모른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냐고. 식민시대 노예상들도 자신의 사업이 정당하다고 말했다. 로마인들이 ‘말하는 도구’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지금 당신과 똑같았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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