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정 작가 “현빈이 연기한 유진우는 테슬라 CEO 머스크 보며 영감”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쓴 송재정 작가. 실험적 드라마 작가로 정평이 난 그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은 '인터스텔라' 등으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놀런이다. 가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철학적인 질문을 던져서다. CJ E&M 제공

유럽 한복판에 우뚝 솟은 이슬람풍의 붉은빛 궁전. 스페인 최고의 이슬람 건축물로 손꼽히는 알람브라 궁전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이다. 독특한 건축 양식과 신비로운 분위기로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낭만도 잠시. 역사의 터전에 700년 전 멸망한 왕국의 전사들이 밀려온다. 1m는 훌쩍 넘어 보이는 칼을 들고 궁전을 누비는 모습에 살기가 가득하다. 수많은 칼은 한 사내에만 향한다.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 게임회사 대표인 유진우(현빈)가 증강현실(AR) 게임에 접속하면 벌어지는 일이다.

게임과 현실을 잇는 ‘다리’는 스마트 렌즈다. 그가 렌즈를 눈에 끼고 게임에 접속하면 유적은 전쟁터가 된다. 한국에서 AR게임을 전면에 내세워 제작된 드라마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처음이다. 신선한 소제 덕에 입소문은 났다. 지난 13일 방송은 시청률 10%(닐슨코리아 기준)를 기록했다. 케이블채널 드라마인 것을 고려하면 높은 수치다.

21세기 현실에서 벌어진 가상의 싸움판이라니. 실험은 송재정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새로운 소재 없을까 고민할 때 ‘포켓몬고’ 열풍이 불었거든요. ‘이게 뭐지?’ 신기한 마음에 직접 휴대폰에 프로그램 내려 받고 여의도에 나가 포켓몬을 잡아봤어요. 엄청난 경험이었죠. 그래서 이걸 드라마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어 기획했죠.” 송 작가가 15일 서울 영등포구 전경련회관에서 기자들을 만나 처음으로 들려준 드라마 제작 계기다. 이 자리는 20일 드라마 종방을 앞두고 마련됐다.

가상과 현실의 만남은 ‘핏빛’이다. 드라마에서 유진우는 게임을 할 때 칼에 베이면 실제로 피를 흘리고 고통을 느낀다. 게임 속 상황이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지난 겨울 세상은 KT 아현지사 통신구 화재로 마비됐다. 초연결 시대, 무너진 IT 네트워크로 인한 참사였다. 드라마에선 게임 오류(버그)로 현실이 엉망이 된다. 드라마의 설정이 현실과 닮아 섬뜩하다. 송 작가는 “실제로 증강현실을 실현하는 게임용 렌즈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들었다”며 “이런 장치들이 뇌신경을 자극하면 오류가 발생할 수 있고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쳐 두려운 상황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혐오가 기승을 부리는 분노사회가 게임의 오류를 부추길 수 있다는 상상까지 더해졌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직장 상사를 죽이고 싶어 게임을 하는 유저가 있을 수 있죠. 그 분노와 살의가 게임에 표출됐을 때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았어요.”

송 작가는 ‘탐험가’다. 시ㆍ공간의 경계를 허무는 데 관심이 많다. ‘인현왕후의 남자’(2012)에선 부적으로,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2013)에선 향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갔다. ‘W’(2016)에선 만화를 매개로 가상과 현실이 포개진다. 송 작가는 1996년 SBS ‘폭소하이스쿨’의 예능 작가로 데뷔했다. 시트콤 ‘순풍산부인과’(1998)를 비롯해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2000)로 이름을 알렸다. 예능과 시트콤 작가로 작품을 시작한 송 작가는 여느 드라마 작가와 달리 독특한 구성이 돋보인다. ‘거침없이 하이킥’(2006)이 대표적이다. 송 작가는 극 속 유미(박민영)네 집 거실 바닥에 시체를 숨겨두는 아이디어를 내 시트콤을 갑자기 미스터리 스릴러로 이끈 주역이었다. 송 작가는 “드라마 작법을 배운 적도 없고, 오히려 드라마를 더 안 본다”고 했다. 영화와 책이 그의 이야기 텃밭이다. 송 작가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주인공인 유진우 캐릭터도 미국 전기자동차 생산업체 테슬라의 최고경영자인 일론 머스크의 전기 ‘일론 머스크, 미래의 설계자’를 읽고 영감을 받아 썼다. 책도 소설보단 인문학 서적을 즐겨 본다고 한다. 송 작가는 “여러 가지가 섞인 행보와 취향이 새로움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송 작가는 음악 마니아로 유명하다. 1980년대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던 노르웨이 팝 밴드 아하의 ‘테이크 온 미’의 유명 뮤직비디오를 바탕으로 ‘W’를 만들었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동명의 기타 연주곡이 극의 미스터리를 이끄는 주요 도구로 쓰인다. 송 작가는 “중학생 때 아하의 ‘빠순이’”였다. 학창 시절, 공부 보단 교실 맨 뒤에 앉아 만화책과 팝송을 들으며 공상을 즐겼단다.

송 작가는 요즘 시청자 참여로 드라마의 이야기가 바뀌는 ‘인터렉티브 영상 콘텐츠’에 관심이 많다. 요즘 넷플릭스에선 시청자가 특정 대목마다 이야기를 정하는 ‘블랙미러: 밴더스내치’가 화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더 신경쓰는 건 감정의 리얼리즘이다.

“판타지적 장르는 경계가 없어 좋아요. 부적 같은 민간 신앙도 증강현실 같은 과학도 소재가 될 수 있죠.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인간 감정의 리얼리즘예요. 겉은 판타지라도 그 안의 감정은 리얼해야 이질감을 느끼지 않죠. 그게 제 드라마가 현실적으로 비치는 이유가 아닐까요?”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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