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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2019년의 은행 파업

입력
2019.01.16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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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국민은행의 1차 총파업이 끝난 지난 9일 오전 서울 KB국민은행 여의도본점에서 직원들이 고객을 맞이하는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KB국민은행의 1차 총파업이 끝난 지난 9일 오전 서울 KB국민은행 여의도본점에서 직원들이 고객을 맞이하는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주 뉴스로 다뤘던 국민은행의 총파업을 2000년에도 현장에서 취재기자로 지켜봤다. 그 해 세밑(12월 22~28일), 전국에서 경기 고양시 일산 국민은행 연수원에 모여든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노동조합원 1만여명은 비장했다.

불과 이태 전 외환위기로 동료 행원들이 맥없이 잘려 나간 걸 봤던 탓일까. 정부 주도의 국민ㆍ주택 합병이 몰고 올 추가 감원을 두려워한 그들의 외침은 절박했다. 한겨울 연수원 운동장에 친 천막에서 일주일을 먹고 자며, 화장실 찬물로 언 몸을 씻던 백면서생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금융당국과 은행장들이 연일 대국민 담화를 내고, ‘불법파업이니 속히 해산하라’는 유인물을 삐라처럼 뿌려대던 경찰 헬기가 막판엔 초저공 비행으로 천막을 흩어 강제해산에 나선 것도 당시로선 이해 못할 풍경이 아니었다. 정부도 노조도, 그 사이에 볼모로 낀 고객도 저마다 자신의 불편에 민감했다.

그로부터 19년 뒤, 국민은행 노조원 9,500명(은행 추산은 5,500명)이 지난주 벌인 총파업은 그 때에 비하면 정말 ‘아무 일 없이’ 지난 듯하다. 비록 하루짜리 엄포성 파업이었다 해도 19년 전의 혼란, 긴장감은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파업 당일 오전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지점에서 한국일보 취재진이 만난 70대 한모씨는 “파업하는 줄도 몰랐다. 지점에 와도 주로 ATM을 이용해 불편할 건 전혀 없다”고 말했다.

대신 사방에 가득한 건 냉소다. “5,000명이 자리를 비워도 아무 일 없구나” “고연봉에 배가 부르니 생떼만 늘었다”는 여론의 비아냥은 이제 반대로 노조에게 엄포로 돌아오는 형국이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고용된 노동자로서 이번 국민은행 파업이 던지는 고민은 작지 않다.

은행원처럼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은 노동자라고 파업권을 포기하란 법은 없다. 하지만 주변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파업은 동력을 갖기 어렵다. 프랑스 공공부문 파업이 세계적인 화제가 되고, 또 반복되는 이유는 불편을 참고 응원해 주는 시민들이 있기 때문이다.

노조는 신입 행원과 정규직 전환 직원의 권리 보호를 뒤늦게 강조했지만, 애초부터 파업의 프레임은 ‘성과급 300%’ 같은 추가 보상 요구로 굳어져 버렸다. 작년 2조원 넘는 순이익을 낸 기업에서, 대부분은 금리상승이란 상황이 만든 이익임에도, 평균 연봉이 9,000만원도 넘는다고 알려진 직원들이 ‘돈을 더 달라’고 하는 명분은 아무래도 대중의 공감을 얻기 어려웠다.

이번 파업은 그저 국민은행 노조의 일회성 판단 착오로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 수년 전부터 자동화가 가져 온 인력 과잉에 고민하던 은행들은 내심 쾌재를 부르는 분위기다. 수천명이 한꺼번에 자리를 비워도 별 문제가 없더라는 역설적인 이미지는 향후 은행권 인력 감축에 한층 명분을 더할 것이다. 이미 주요 은행들은 희망퇴직 규모를 키우고 있다.

이번 파업으로 궁지에 몰린 건 사실 은행원뿐 아니다. 은행원이 온라인ㆍ모바일 뱅킹에 밀려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듯, 이제 각 산업의 노동자들은 사용자뿐 아니라 기계와도 맞서야 한다. 고임금 은행원에게 부는 역풍을 보며 쌤통이라 박수 치는 누군가에게도, 시기나 정도의 문제일 뿐 이번 일은 남 일이 아니다.

정부는 질 좋은 일자리를 조금이라도 유지하고자 이미 많은 무리수를 두고 있다. 그나마 여유 있고, 정부의 입김이 미치는 금융사들에게 계속 인력을 채용하도록 압박하는 것도 개중 하나다. 한쪽에선 목돈을 쥐어 고참 직원을 내보내면서, 다른 쪽에선 계속 필요 이상의 신입을 뽑는 기형적 현상이 그래서 지속되고 있다. 뭔가 정상이 아니란 걸 알지만, 그래도 ‘일자리’란 말에 누구도 나서 뭐라 하지 못할 뿐이다.

2019년의 은행 파업이 이 땅 노동자들에게 던지는 씁쓸함이 결코 가볍지 않다. 어떻게 풀 것인가. 답이 보이지 않아 더 서늘하다.

김용식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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