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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입찰 불리하니 다쳐도 산재처리 말라”... 원전 노동자들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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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입찰 불리하니 다쳐도 산재처리 말라”... 원전 노동자들의 눈물

입력
2019.01.19 09:00
수정
2019.01.19 12:00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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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다 부상당한 용역업체 직원들 하소연]

재입찰 벌점 우려해 쉬쉬… 사고로 장애 남아도 회유

‘숙련도 투입 규정’ 원자로 점검작업, 치료 못하고 출근도

영남의 한 원자력발전소로 출근하는 방사선 관리 직원들.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는 곳으로 한수원 관계자가 촬영해 제공한 사진이다. [저작권 한국일보]
영남의 한 원자력발전소로 출근하는 방사선 관리 직원들.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는 곳으로 한수원 관계자가 촬영해 제공한 사진이다. [저작권 한국일보]

지난 4일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영남 지방의 한 원자력 발전소에서 근무하는 방사선 안전관리 용역업체 직원들의 노동조합 사무실이 분주하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주간 조와 오후 6시부터 작업에 들어가는 야간 조가 교차하는 시간이다. 얼마 전 전남 영광의 한빛 원전으로 파견을 다녀왔다는 한 직원은 “확실히 동해 공기가 좋다. 서해는 정말 미세먼지가 심해 말도 못 할 정도다”라며 농을 던졌다. 용역업체 비정규직 신분으로 방사선 안전관리를 도맡는 이들의 일상은 그러나 가벼운 농담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스산하다. 소속 용역업체가 입찰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사고를 숨기는 등 부당한 갑질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방사선 관련 물질로 인한 피폭 등 각종 사고 위험과 맞서야 하는 ‘위험의 외주화’가 빚어내는 병증의 현장. 이곳에서 일하다 심한 부상을 당했지만 용역업체가 산재 처리를 하지 말도록 막아서면서 괴로움을 겪어야 했던 직원 3명을 만났다. 이들의 신원이 드러날 경우 용역업체가 고용승계를 거부할 수 있어 부득이 가명을 사용하고 현장의 세부 묘사를 덜어냈다.

◇산재 처리 미루다 월급도 못 받아

김상철(가명ㆍ47)씨는 2년 전 작업 중 당한 부상 후유증에 아직 시달린다. “힘을 좀 쓰고 난 날에는 누웠을 때 목까지 뻣뻣해지면서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는 제때 산업재해 신청을 하지 않은 회사(용역업체)의 조치 때문에 쉬는 기간 월급마저 받지 못했다. 사고는 2017년 오버홀(overhaulㆍOH) 계획예방정비기간 한 발전소에서 작업을 하던 중 발생했다. 오버홀은 원자로 작동을 멈추고 물을 빼낸 후 직접 인력이 들어가 점검하는 과정으로 국내 24개 원자로 오버홀에는 매년 90명가량의 방사선 안전관리 직원들이 투입된다. 이들은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의 지시로 일하지만, 3년마다 입찰을 통해 바뀌는 용역업체 소속이다.

김씨의 일은 원자로 건물 내 작업자들의 피폭을 최소화하기 위한 전반적인 안전관리다. 작업장소의 방사선량에 따라 마스크를 쓰라고, 차폐복을 입으라고 안내하거나 방사선량이 기준치 이상으로 검출되는 지역에는 10여㎏에 달하는 차폐를 들고 와 덮는 작업도 한다. 그렇게 원자로 건물 2층에서 혼자 작업을 진행하던 김씨는 위층에서 협력업체 직원 A씨가 실수로 떨어뜨린 나무 받침대에 맞아 크게 다쳤다.

기록에 남을까 우려해 구급차도 부르지 못하고 병원으로 간 김씨를 사고 이틀 만에 찾아온 용역업체 소장과 한수원의 담당 팀장은 그에게 “산재처리를 하지 말고 치료를 받으라”고 종용했다.

직원이 안전사고를 당하면 소속 용역업체의 벌점으로 이어지고, 이후 재입찰에서 큰 손해를 보기 때문에 용역업체들은 숨길 수 없는 사망사고나 장애가 남을 정도의 심각한 안전사고가 아닌 한 대부분 산재 처리를 막아선다. 한수원도 발전소별로 점수를 부과하고 순위를 매기는데 순위가 낮을수록 해당 발전소 팀장급 관계자의 인사고과에 영향을 줘 수당 등이 줄기 때문에 산재 숨기기에 동참한다.

A씨는 치료비를 대 주겠다고 했지만, 일주일 만에 다른 지역으로 파견을 가고 김씨와 연락이 끊어졌다. 병원에서는 김씨에게 두 달간 아무것도 하지 말고 치료만 받으라고 했지만 오버홀 기간 막바지라 작업을 대신할 사람이 없었고, 대체인력을 데려오려고 해도 방사선관리 업무 1년이상의 경력자 가운데 숙련도에 따른 등급을 맞춰 투입해야 하는 규정 때문에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원래 90일가량 진행되는 오버홀은 1년 넘게 늘어져 기존 한 오버홀 당 30명이 투입되던 인력은 다른 지역 원전 오버홀이 겹치기 시작하면서 하나둘 파견 갔고, 김씨가 사고를 당한 시점에는 10명 이하로 줄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말 없이 매일 일해야 했던 김씨는 퇴근 후 물리치료만 간신히 받았다. 약속된 치료비도 받지 못한 김씨가 참다못해 이듬해 A씨를 신고한 이후에야 업체는 “산재처리를 해 주겠다”고 뒤늦게 움직였다. 사고 발생 반년이 훨씬 지나서야 김씨는 회사 말을 믿고 두 달 가까이 일을 쉬었다. 김씨는 이번에야말로 그간의 치료비와 산재치료 기간 중 지급되는 휴업급여를 받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근로복지공단은 부상 직후 주기적으로 치료받은 내역이 있어야 하는데 김씨가 초기 몇 개월만 병원에 다니다 치료를 중단해 회사를 쉬던 동안은 치료 기간으로 볼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그간 쓴 치료비 중 근로복지공단에서 받은 금액은 3분의 1에 불과했어요. 회사에서 쉬라는 말없이 산재신청만 해 줬어도 월급을 못 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김씨는 이후 회사로부터 더 큰 상처를 받았다. 김씨에게 회사는 복귀 조건으로 “더 이상 아파도 아프다 하지 말고 산재처리 하지 말 것”을 걸었다. “현재 회사 소속으로 있는 동안에는 다시 산재 신청은 못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 하나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사람이 없어요.” 김씨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삼켰다. 

[저작권 한국일보]안전계약 특수조건_신동준 기자/2019-01-18(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안전계약 특수조건_신동준 기자/2019-01-18(한국일보)

◇3년마다 재입찰, 벌점 무서워 산재 거부

박정태(가명ㆍ37)씨는 지난해 당한 사고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하다. OH 기간 박씨는 발전소 안에서 머리 위에 매달린 기계장치를 살펴보던 중이었다. 기계에 헐겁게 부착돼 있던 2㎏이 넘는 철제 부품이 박씨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피를 뚝뚝 흘리며 동료의 차를 타고 급히 인근 소규모 병원으로 갔지만, 이내 큰 병원으로 옮겨 골절 수술까지 해야 하는 중상이었다. 박씨도 김씨와 마찬가지로 해당 업무를 혼자 하고 있었고, 대체 인력을 구하지 못했다. 박씨는 “병원에 입원한 도중에도 처리할 일이 있다고 연락이 와 병원에서 출근한 적이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병원은 완치에 6개월이 걸리고 그사이 골절 부위 후유증을 우려했다. “회사(용역업체)는 수술비와 당장의 병원비만 줬는데, 후유증이 발생했을 때 산재처리를 위해 필요한 서류인 공상처리내역확인서를 달라고 하니까 껄끄러워하며 주지 않았어요. 이후 수차례 이야기했는데도 지금까지 묵묵부답입니다.” 회사가 모른 척하는 사이 죄책감은 동료의 몫으로 돌아갔다. 박씨는 “그날 함께 기계를 조작했던 동료만 집으로 찾아와 미안하다고 했다”고 말했다.

원전에서 발생하는 안전사고에 대해 한수원과 용역업체들이 나 몰라라 하는 행태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과거엔 장애가 남을 정도의 심각한 사고를 당해도 산재처리 받기가 힘들었다. 현재 OH 인력인 이철민(가명ㆍ44)씨는 2000년대 초반 원전 폐기물 처리과에서 일하다 크레인에 오른손이 끼어 중지 한 마디를 잃었다. 이씨는 “회사에서 술을 사주며 치료비를 준다, 일시금을 준다며 사탕발림해 산재처리를 하지 않도록 유도했다”고 말했다. 당시 이씨와 일했던 노조 간부는 “그때는 산재 신청을 시도만 해도 해당 용역업체가 거의 재입찰을 못 받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3개월 동안 입원해야 했던 이씨는 이후 산재 처리는커녕 회사가 약속했던 보상도 받지 못했다. 더욱이 이씨가 속한 용역업체는 용역 재입찰에 실패한 뒤 사업을 접어 그가 보상받을 길은 요원해져 버렸다.

영남지역 원전에서 일하는 OH 노조 간부는 “작업 특성상 전국의 원전을 도느라 예정 없는 장거리 운전을 하는 경우도 많은데 급히 이동하다 교통사고가 나도 개인 보험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라며 “출근 도중 7중 추돌사고가 났지만 걸을 수 있는 정도라는 이유로 곧바로 출근했다”고 말했다.

◇산재 사망률 높은데 부상률은 낮은 구조

이러한 상황은 비단 원전 하청 근로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내 전체 용역ㆍ파견직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은 산재 사망률은 높은데 산재 부상률은 낮은 기형적인 통계가 도출되고 있다. 2015년 산재보험 통계에 따르면 1,810명의 노동자가 일하다 사망했고 8만999명이 다쳤다. 10만명당 5.3명이 일하다 죽고 458명이 다친 셈이다. 같은 기간 국제노동기구가 발표한 독일의 산재보험 자료에 따르면 10만명 중 1.6명이 일하다 사망해 한국이 독일보다 노동자가 일하다 사망한 경우가 3배 더 많았다. 하지만 독일 노동자가 일하다 다칠 확률은 10만명당 2,371명으로 나와 오히려 독일이 5배 더 높게 나왔다(김승섭 고려대 교수 분석). 사망 등 숨길 수 없는 중대재해가 아닌 부상재해에 대해서 광범위한 산재 은폐가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이다.

정부는 2017년 산재 은폐 형사처벌을 신설하는 등 대책을 내놓고, 지난해 말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의 죽음을 계기로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돼 원청에 하청업체 안전 책임을 강화하도록 했지만 여전히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다. 한 노조 간부는 “아무리 처벌을 강화해봤자, 3년마다 하청업체가 바뀌고 산재가 발생하면 하청업체에 벌점을 매겨 입찰에 불리하게 만드는 구조에서는 노동자들만 피해 보는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정흥준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국내 원하청 구조에서는 하청업체가 독립적인 사업체 역할을 한다기보다 노무관리만 하는 노무도급 업체인 경우가 많아 산업안전이나 개별노동자의 고충을 처리할 여력과 의지가 부족하고 아무리 원청 책임을 강조해도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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